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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고아원 원생들의 역대 대통령 자택 세배 나들이

■ 글·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3.02.07 17:12:00

“5년째 대문 활짝 열어놓고 아이들 반기는 전직 대통령은 전두환·김영삼뿐”
새해 첫날 서울과 인천의 고아원 원생들이 전두환·김영삼·노태우 전직 대통령과 노무현 당선자 자택,
국회의장·서울시장·국무총리 공관을 찾아 세배를 하는 이색 행사가 열렸다. 그 현장을 동행 취재했다.
새해 첫날 고아원 원생들의 역대 대통령 자택 세배 나들이

전두환 전대통령 자택에서 다과를 함께했다.(왼쪽)노태우 전대통령은 미국으로 떠나 만날수 없었다.


지난 1월1일. 새해 첫날 연희2동 전두환 전대통령 자택 골목엔 아침 일찍부터 골목 가득 검은색 대형승용차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었다. 청와대를 떠난 지 15년이나 지났건만 여전히 그의 집앞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오전 10시10분경. 두대의 승합차가 골목 끝에 나란히 멈추더니 한대에선 색색의 색동저고리를 입은 초등학생들이, 다른 한대에선 같은 모양의 생활한복을 맞춰 입은 초등학생들이 줄지어 내렸다. 아이들은 낯선 풍경이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참새처럼 재잘거리다가 인솔자를 따라 전대통령 자택으로 향했다.
이들은 서울 은평천사원과 인천 해피홈 원생들로 대부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다. 그런데 새해를 맞아 활빈당 단장 홍정식씨(54)의 주선으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3명의 전직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국회의장, 국무총리, 대법원장, 서울시장 등을 찾아다니며 세배 나들이를 나선 것. 홍씨는 벌써 5년째 매년 새해 첫날이면 고아원 원생들을 데리고 이 행사를 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에게 높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줌으로써 꿈과 희망을 키워주기 위해 이 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대문 앞에 서자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전 전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마중을 나와 기다리다 아이들을 1층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엔 약과를 비롯한 과자와 딸기, 음료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해마다 오는 어린 손님들이라 미리 준비를 해놓았다”는 게 안실장의 이야기. 응접실 한쪽 벽엔 전 전대통령이 재임중 찍은 대형 사진과 세계 각국에서 받은 훈장들이 걸려 있어 과거의 화려함을 상기시켜주었다.
도착한 지 한 10분쯤 지났을까, 부인 이순자 여사가 먼저 응접실에 들어섰다. 이여사는 “대통령 할아버지가 아침 일찍부터 방문한 손님들을 만나느라 조금 늦을 것 같다”며 양해를 구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이여사의 얼굴은 세월 때문일까, 백담사 시절에 비해 많이 늙어보였다. 하지만 얼굴표정은 그때에 비해 훨씬 밝고 평온해 보였다. 아이들이 간식을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한과가 비닐포장이 되어 있어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 걸 발견하곤 일일이 비닐포장을 벗겨 나눠주는 모습은 영락없는 이웃집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30분쯤 지나서야 응접실에 들어선 전 전대통령은 아이들이 인천에서부터 찾아왔다는 말에 “차를 오래 타고 오느라 힘들지 않았냐”며 홍씨에게 “아이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건강해야 하고, 그 다음엔 정직해야 한다”며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는 이어 “노력도 중요하다. 본인도 육사를 들어갔을 땐 공부를 못했지만 꾸준히 하니까 내 앞에 있던 사람을 한명씩 한명씩 따라잡을 수 있었고 졸업할 땐 1등이 되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홍씨에 따르면 전 전대통령은 작년엔 세배온 아이들에게 “판검사가 되기보다는 자전거포 주인을 하더라도 자기 기술을 가져야 한다”며 색다른 충고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까치 까치 설날은…” 하며 설날노래를 부르자 손뼉을 치며 따라 부르는 등 잠시 동심에 젖기도 했던 부부 내외는 아이들과 사진을 찍은 후 “내년에도 또 오라”는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집을 나온 아이들은 인근에 있는 노태우 전대통령 집으로 향했다. 약간 추운 날씨였지만 아이들은 바깥나들이가 마냥 신이 난 모습이었다. 전대통령 수행비서는 물론 자택을 경호하는 청원경찰들에게까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연발해 어른들을 미소짓게 만들었다.

새해 첫날 고아원 원생들의 역대 대통령 자택 세배 나들이

상도동 김영삼 전대통령 자택을 찾은 어린이들.(왼쪽)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집을 비워 아이들은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두번째로 방문한 노 전대통령 자택은 청원경찰들만이 대문을 지키고 있을 뿐 썰렁했다. 부부 내외가 미국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이들은 빈집 앞에서 설날 노래를 부르고, 선물로 준비한 양초와 복조리를 대문에 걸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노 전대통령은 89년 처음 이 행사를 시작했을 때는 아이들을 정말 반갑게 맞아주셨어요. 세뱃돈을 1백만원이나 주셨죠. 하지만 다음해부터는 한번도 세배를 받지 않더라고요. 나라의 어른들부터 명절만이라도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서민들의 방문을 반겨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다음 목적지인 상도동 김영삼 전대통령 자택에 도착한 것은 12시10분경. 앞에 들렀던 전직 대통령들과는 달리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아이들은 먼저 점심을 먹은 후 김 전대통령을 만나기로 했다. 홍씨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해마다 김영삼 대통령 집에서 점심을 먹게 된다”며 웃었다. 그에 따르면 작년엔 떡만두국이 나왔다고 했는데, 올해는 떡국으로 아이들을 대접했다.
밥을 먹는 아이들에게 “오늘 방문하는 세명의 전직 대통령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자 전부 “모른다”고 했다. 하긴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이제 초등학교 6학년. 김영삼 전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때가 초등학교 1학년의 어린 나이였으니 전직 대통령들을 기억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사실 아이들이 전직 대통령에 대해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다니니까 재미있어요.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높은 사람들 얼굴도 보고…”라는 한 여자아이의 말처럼 명절날 아이들이 즐겁게 들어설 수 있게 대문이 열려있다는 자체가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10분쯤 지나자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다. 2층에 올라서자 거실 벽에 걸린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쓰여진 족자가 눈에 띄었다. 김 전대통령이 직접 쓴 신년 휘호인데, 문득 이 글을 쓴 시기가 지난 대통령 선거 이전인지 이후인지 궁금해졌다.

새해 첫날 고아원 원생들의 역대 대통령 자택 세배 나들이

박관용 국회의장으로부터 세뱃돈을 받는 어린이들.


김 전대통령은 거실에서 박종웅 의원 등 상도동 인사들과 모여 한담을 나누다 아이들을 반겼다. 부엌에서 음식장만을 거들던 손명순 여사도 나와 아이들과 악수를 하며 점심은 잘 먹었는지, 춥지는 않은지 자상하게 물어보았다. 아이들이 복조리와 양초를 건네자 손여사는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받았다.
김 전대통령은 3년 전부터 조깅 대신 새벽마다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수행비서에 따르면 김 전대통령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는 비서관이 몇달 만에 살이 15kg이나 빠졌을 정도로 왕성한 체력을 자랑한다고 한다. 특히 그의 강스매싱은 젊은 사람도 받아내기 힘들 정도라고. 또한 여전히 칼국수를 좋아해 밖에서 사람을 만나도 강남의 한 칼국수집에서 만나곤 한다며 근황을 전해주었다.
다음 목적지는 원래 청와대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문턱이 너무 높아 포기하고 대신 명륜동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자택으로 향했다. 선거 기간 국민과 함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었기에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홍씨는 이미 신계륜 당선자 비서실장에게 가겠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했다. 아이들도 노무현 당선자는 텔레비전에서 많이 보았던 터라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는 문턱 역시 높았다. 명륜동 자택은 경찰들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었고, 담당 경찰로부터 노당선자가 집에 없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결국 빌라 정문 앞에서 설날 노래를 부르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외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다.
전직 대통령들과 대통령 당선자의 자택을 순회한 아이들은 이번엔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과 대법원장 공관, 그리고 명륜동 서울시장 공관,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을 두루 돌았다. 이들 역시 새해 첫날이어서인지 대부분 공관을 비운 상태였고 박관용 국회의장만 시간을 쪼개 아이들을 반겨주었다.
이날 아이들이 받은 세뱃돈은 모두 1백60만원. 전두환 전대통령이 50만원, 김영삼 전대통령이 20만원, 박관용 국회의장이 20만원, 그외에도 김석수 국무총리가 50만원, 이명박 서울시장이 20만원을 비서실장을 통해 전달했다.
“전대통령은 5공화국 대통령이어서 그런지 항상 세뱃돈으로 50만원을 주세요. 김영삼 전대통령도 이름이 영삼이어서인지 해마다 세뱃돈을 30만원을 주었는데, 올해는 20만원이 담겨 있더군요.”
홍씨는 이날 받은 세뱃돈을 해피홈에 80만원, 은평천사원에 60만원을 기탁하는 것 이외에 아이들이 북녘어린이돕기에 성금을 보태고 싶다고 해서 20만원을 관련단체에 기탁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해마다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세요. 다른 전직 대통령들도 아이들에게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으면 좋겠어요. 내년부터는 전직 대통령이 되는 김대중 대통령도 아이들을 좋아했으면 좋겠네요. 노무현 당선자도 청와대에 들어가면 대문을 활짝 열어 서민들이 마음놓고 드나들 수 있게 했으면 합니다. 그게 바로 제가 이 운동을 하는 목표입니다.”
그는 앞으로 설날(2월1일)과 정월대보름(2월15일)엔 서울이 아니라 각 시·도마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어린이들이 지역 유지의 자택을 찾아가 세배를 하는 운동을 벌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여성동아 2003년 2월 4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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