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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인생대역전

미국대학 석·박사학위 버리고 ‘발 전문 발명가’로 사는 윤정일

”과거엔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해 박사학위 땄지만 지금은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발명을 합니다”

■ 기획·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글·최숙영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 2002.12.18 12:49:00

미국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발 각질 제거기’를 개발하고 있는 윤정일씨. 철없는 유학생이었던 그가 사업 실패로 좌절한 후 다시 발명가로 성공하기까지의 인생대역전.
미국대학 석·박사학위 버리고 ‘발 전문 발명가’로 사는 윤정일
“지금 당신 앞에 주사위가 놓여져 있다고 쳐요. 당신은 1이라는 숫자를 만들고 싶은데 주사위의 숫자는 엉뚱하게도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6이라는 숫자가 나와요.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발 각질 제거기 등을 만드는 (주)발손의 윤정일 사장(43)은 자신의 인생을 주사위에 비유했다. 주사위를 던졌을 때 원하지 않는 숫자가 나오는 것처럼, 미국에 있는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교수직을 포기하고 발 각질 전문가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고작 발 각질 전문가가 되려고 그 힘든 박사 공부를 했냐”고 야유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의 인생의 목적지는 어느새 교수가 아닌 발명가로 바뀌어져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아버지는 자수성가하신 분이에요. 많이 배우진 않았지만 사업적으로는 성공을 하셨어요. 유통업을 하시면서 정계 쪽으로도 인맥이 많았는데, 짧은 학식이 늘 당신을 짓눌렀던 모양이에요. 많이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있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한테는 공부 잘 하는 아들이 최고였죠.”
하지만 어렸을 때 그는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한글을 깨치지 못해 ‘꼴통’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학교 선생님들은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올 때마다 “머리가 좋은 아이인데 왜 방치를 하냐?”고 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당신 역시 외국인을 상대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지만 무언가 텅 비어 있는 듯한 집. 유년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쓸쓸하게 남아 있다.
그러던 어느해. 그는 그토록 당당하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형이 보디빌더를 한다며 다니던 대학마저 그만두자 못 배운 것이 가슴의 한이 됐던 아버지는 “자식 하나 잘 가르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젠 다 소용없다”면서 펑펑 우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했죠. 그러니까 아버지는 제 자랑을 하고 다니셨어요. 아버지는 저한테 거는 기대가 컸던 것 같아요. 장차 아버지의 사업도 맡아줄 것을 은근히 바라셨죠. 그럴수록 저는 마음이 무거웠어요. 아버지에 대한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서였을까. 대학졸업 후 그는 88년 지금의 아내인 이명인씨(38)와 후다닥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인 89년에 아내를 남겨둔 채 혼자 유학길에 올랐다. 그에게 유학은 아버지로부터의 ‘도피’였던 셈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부벌레들만 모여 공부한다는 미국의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그는, 그러나 초창기엔 학생들에게 동양인이라고 ‘왕따’를 당하는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그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윤사장은 자신이 졸업한 학교가 정확히 밝혀지는 것을 꺼려했다. 이유는 자신이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가 주제가 되지 않고 단지 자신의 고학력이 가십거리로 세간에 알려질까 두렵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학생들이 저한테 냄새가 난다면서 싫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김치를 먹어서 마늘냄새가 몸에 배어 있나 봐요. 내 머리를 만지면서 키가 작다고 ‘boy’라고 놀리는 친구도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그들과 한판 붙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숙사 공동샤워장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한명이 “boy, boy”라고 놀리면서 “냄새가 나니까 여기서 샤워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1대1로 겨루자. 그래서 내가 지면 진짜 네 boy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흔쾌히 승낙을 하더라고요. 제 실력을 모르고서요. 사실 저는 태권도 4단이거든요. 당연히 그날 싸움은 제 승리로 끝났죠. 그 친구가 헛발질을 하는 틈을 타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거든요. 그후로는 학생들이 왕따를 시키지 않았어요. 한국인의 매운맛을 보여준 거죠.”

미국대학 석·박사학위 버리고 ‘발 전문 발명가’로 사는 윤정일

자신이 개발한 발 각질 제거기를 살펴보는 윤정일씨.

92년 경영학 석사를 받은 그는 이번에는 전공과목을 바꿔서 워싱턴DC에 있는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도중에 전공 과목을 바꾼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사업을 하려면 정치 쪽도 알아야 한다면서 정치학을 적극 권했던 것이다.
“미국의 정치는 어찌 보면 로비예요. 정치지망생들은 대학에서부터 그것을 배우죠. 저 역시 워싱턴DC에 있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때 ‘사교클럽’을 형성해서 있는 집 자식들과 어울려 다녔어요. 제가 속했던 사교클럽에는 아랍국가들의 황태자들도 있었고, 미국 대기업의 자제들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저 자신도 변해가는 것을 느꼈어요. 제 주제 파악을 못 하고 겉멋이 든 거죠. 툭하면 아버지한테 전화를 해서는 ‘1천5백만원짜리 롤렉스시계 사 달라’ ‘링컨 컨티넨탈 자동차 사 달라’고 했고, 술집에 가면 웨이터들에게 팁을 30만원씩 주었어요. 그렇게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나의 꿈도 점점 퇴색해갔죠.”
불행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찾아오는 법. 박사과정을 마칠 무렵 아버지가 “힘들다”면서 “빨리 한국에 들어오라”고 했다. 불행의 조짐은 그때부터 나타났지만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차일피일 ‘한국행’을 미루면서 미국의 유학생활을 마냥 즐기고만 있었다.
“제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96년 한국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폐암 선고를 받은 지 두달 만이었어요. 그때 아버지 회사는 채권, 채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이미 사업이 기울 대로 기울어져 있었어요. 반강제로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은 저는 아버지 친구분의 소개로 모피사업에 투자했는데, 그게 제 인생이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꼴이 된 거예요. 97년 외환위기 속에서 회사가 부도가 났어요. 그나마 있던 재산 다 날리고 아버지의 선산마저 빚쟁이들한테 빼앗기게 되자 더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어요. 사람들 만나기도 싫어지고 말수도 줄어들고 세상의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어요.”
이후 그의 생활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인천의 10평 임대아파트를 겨우 구한 뒤 처음에는 결혼반지를 팔고 그다음에는 아이들 돌반지를 팔고 하는 식으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 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없어도 단 하나, 팔 수 없는 게 있었다. 아버지의 사파이어 반지였다. 아버지의 선산은 빚쟁이들한테 빼앗겼을망정 아버지의 사파이어 반지만큼은 죽는 한이 있어도 지키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식구들의 패물을 팔아서 생활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나중에는 더이상 팔 것이 없어지자 막막해지더라고요. 아내는 영어강사라도 하라고 했지만 있는 재산 다 날리고 아버지의 선산마저 지키지 못한 놈이 뭐가 잘났다고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나,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어강사를 못 하겠다고 했더니 아내가 원망을 하더군요. 그때 많이 서운했어요.”
하지만 아내 이씨의 입장에서도 할말은 많았다. 남편이 가장 역할을 해야 되는데 갈수록 무기력해지니까 옆에서 지켜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저렇게 아무 일도 안 하고 썩힐 바에야 뭐하러 미국 유학까지 가서 그 힘든 공부를 하고 왔나,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결혼할 당시 화려하게 결혼을 했고 결혼한 뒤에도 호화롭게 살았기 때문에 갑자기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는 그 상황을 저 자신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인천의 10평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창피해서 친정어머니한테도 한동안 얘기를 안 하고 숨겼을 정도였어요. 그러던 차에 어떻게 우리 사정을 알았는지 친한 선배가 자기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봐 달라고 해서 남편 대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죠. 지금은 웃으면서 말을 하지만 그때는 정말 고통스런 시간이었어요.”

미국대학 석·박사학위 버리고 ‘발 전문 발명가’로 사는 윤정일

윤사장은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손발과 관련된 제품을 연구하고 있다.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부부간의 사랑도 식는 느낌이었다. 서로 말도 안 하게 되고 관심도 줄어들었다. 이때가 이들 부부의 최대 위기였다. 그러던 중 윤씨는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한 중소기업체에서 번역할 사람을 구한다는 모집 광고를 보고 번역 일을 시작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바이어들의 통역을 맡아 3년 동안 각종 박람회를 쫓아다녔다.
그는 거기서 발명에 대해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발명 아이디어 하나가 수십억원에 거래되는 것을 보고 ‘아, 이런 세계도 있구나’ 하며 발명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
“어느날 와이프가 발 각질을 미는 것을 보았어요. 와이프는 아이를 낳은 후 발이 꺼칠하고 각질도 많이 생겼거든요. 그런데 아내가 발 각질을 밀 때마다 분진이 어지럽게 날리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분진이 날리지 않는 발 각질 제거기를 만들 수 없을까’를 연구하다가 지금의 ‘매직풋’을 발명하게 된 거예요.”
매직풋을 만들 때의 에피소드도 재밌다. 아내 이씨의 머리빗에서 착안해 1차적으로 발 각질 제거기를 개발한 후 얼마나 효능이 있는지를 시험할 때였다. 마침 곤하게 잠들어 있는 아내가 눈에 띄었다. 그는 아내의 발을 잡고 각질을 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열중했던 탓일까, 아내의 발에서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작업을 계속하다 통증을 느낀 아내가 잠결에 걷어찬 발에 뺨을 맞고 말았다고 한다. 얼마나 속상했는지 낚싯대를 메고 나가 이틀 동안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발명한 기계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목욕탕 앞에 가서 목욕을 하고 나오는 여자들의 발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처음엔 모르는 남자가 발을 만지려고 하니까 여자들이 기겁을 하면서 미친 사람 취급을 했다. 하지만 그의 의도를 알고부터는 적극 협조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연령별로 다양한 여성들의 발을 대상으로 시험할 수 있었다고.
‘매직풋’은 20만개를 내년 상반기까지 독일, 일본 등에 OEM(주문자상표 부착방식)으로 납품하는 해외수주에 성공했으며, 현재 전국 주요 백화점 점유율도 40%에 이르고 있다. 지난 99년 말 (주)발손이란 회사를 차린 그는 그동안 ‘매직풋’ 외에 손과 발에 관련된 발명특허를 받은 것만 해도 16여개에 달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개발중이라고 한다.
“이제 예전의 저를 완전히 버렸어요. 미국에 있는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교수실보다는 공장의 기름때와 퀴퀴한 지하 사무실이 제게는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세계 최고의 발 관련 특허 보유자로 인정받기 위해 앞으로도 많은 노력을 할 겁니다.”
그는 13년 전 작은 꿈을 키우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지금은 발명하면서 큰 꿈을 이루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수수한 점퍼 차림에 까맣게 끝이 닳아버린 싸구려 갈색 구두를 신고 중고 아토스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윤정일 사장, 그의 발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았다.


여성동아 2002년 12월 4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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