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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교수 채용 주장하며 서명운동 주도한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 박정은

■ 기획·이한경 기자(hklee9@donga.com) ■ 글·최희정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 2002.11.21 12:28:00

지난 10월 중순 서울대 법대생들을 대상으로 이색 서명운동이 전개됐다.
서울대 법대 학생회가 여교수 채용을 주장하며 서명운동을 벌인 것. 서울대 법대에는 법학과가 생긴 이후 50여년 동안 여교수가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은 가운데 법대 학생회장인 박정은씨가 이런 주장을 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교수 채용 주장하며 서명운동 주도한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 박정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남성 중심적인 것 같다. 기업체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여성의 채용을 주저하고, 가정에서도 역시 맛있는 음식은 아버지나 오빠, 남동생의 몫이다.
우리네 정서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가부장적인 정서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외되고 차별당하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많다.
요즘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고 있는 서울대 법대 학생회장 박정은씨(23)는 이런 남성 중심의 그릇된 구조를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 자신이 다니고 있는 서울대의 법대 교수 33명 중 여교수가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럽고 안타깝다고 한다.
“저희 학교에 법대가 생긴 지 50여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여자 교수가 한명도 없었어요.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소박한 진리가 좋아 법대에 진학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법대뿐만이 아니라 법학계가 여전히 남성 중심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요. 1학년 때부터 이런 현상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오다 학생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법대 여교수 채용’을 제가 할 일로 정하고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남학생들은 일일이 이름을 부르면서 여학생들은 뭉뚱그려 부를 때 소외감 느껴
서울대 법대 학생회는 10월10일부터 3일 동안 법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서울대 법대 여교수 채용’과 ‘법여성학 강좌개설’ 문제를 놓고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동안 법대에 여교수가 전혀 없었고 지금도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법학을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법여성학 강좌’ 개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학생들의 의지 때문이다. 이 서명운동에 1천3백여명의 법대 학생 중 8백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학생들 역시 여교수 채용과 법여성학 강좌 개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왔던 터였다.
“법대에 진학하는 여학생 수는 해마다 늘어나 2002년의 경우 전체 30% 정도를 여학생이 차지했어요. 법학에 관심을 갖고 진학하는 여학생 수는 많은데 여교수가 전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잖아요. 지금 계신 교수님들도 훌륭하고 개혁적인 분이 많지만 그래도 여학생 입장에서 볼 때 여자 교수님은 꼭 필요합니다.”
박정은씨와 법대 학생회가 여교수 채용을 필요로 하는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법대에 여학생보다 남학생이 많고, 또 교수도 모두 남성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남성 위주로 수업이 진행된다는 것. 수업시간에 농담 한마디를 던지더라도 여학생보다는 남학생을 의식한 농담이 대부분이다. 또 여학생들이 보기에 교수들이 남학생들만 제자로 여기는 것 같은 태도도 불만 사항 중 하나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질문을 하실 때 남학생들은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시는데, 여학생들에게는 그렇지 않아요. 그냥 “여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여학생 모두를 뭉뚱그려서 말씀하시죠. 우리도 하나의 인격체이고 법을 같이 공부하는 법학도인데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수업시간에조차 여학생들이 소외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박정은씨는 법대에 여교수가 채용되면 우선 여학생들에게 돌아올 혜택이 많다고 장담한다. 그중 여학생들의 진로상담을 해줄 수 있는 통로가 생긴다는 점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고 있다. 법학을 공부하고 있는 여학생들이 진로를 정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때,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또 법학을 계속 공부해 학계에 남을 학생들에게는 여교수가 하나의 ‘역할모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여학생들 중 상당수가 법학을 계속 공부한 뒤 학교에 남아 제자들을 가르치고 싶어해요, 그러나 그들의 눈에 비친 건 모두 남성 교수뿐이니 희망이 없는 거지요. 죽어라 공부해봤자 교수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 보다 힘들 거라는 생각에 시작도 안 해보고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법대에 여교수가 채용되면 그동안 여학생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왔던 장벽들이 하나 둘 허물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여성학 강좌 개설도 요구
물론 법대 학생회가 추진한 서명운동이 법대 학생들 모두에게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하는 이유 중 대부분은 ‘남성· 여성 교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능력이 우선이다.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을 교수로 채용해야지, 여교수가 없다고 능력 없는 여성을 교수로 채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은씨는 학생회의 서명활동에 더욱 큰 지원을 해줘야 할 여학생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서명용지를 멀리할 때는 실망감에 다리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몇몇 교수 역시 교수 채용에 적합한 ‘80년대 학번 중에는 여학생이 별로 없었고, 계속 법학을 공부한 능력 있는 여성이 별로 없다’는 이유를 들어 회의적인 반응을 내비치기도 했다.
“찾아보면 능력 있는 여성도 주변에 많이 있는데, 찾아보지도 않고 여성들 중 교수될 만한 인물이 없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저희 학생들은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과 출신 학교 위주로 교수를 뽑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정말 능력 있는 여성을 채용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박정은씨와 법대 학생회는 이번 활동은 학생들의 의지를 교수와 학교측에 알리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한다. 비록 당장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여교수 채용과 법여성학 강좌 개설은 이후에도 계속 밀고나갈 생각이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업 중 하나로 믿고 있다는 얘기다.
지금의 법학을 여성과 소외 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비판 법학인 법여성학 강좌 개설과, 50년간 남자교수에게만 열려 있을 뿐 여성들에게 굳게 닫혀 있었던 교수 채용에 대한 학생들의 작은 외침에 학교측의 속시원한 해답을 기대해본다.

여성동아 2002년 11월 4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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