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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네 자매의 황혼 여행

스페인 여행한 이어령 전 장관 부인 강인숙 영인 문학관 관장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김성남 기자

2002. 11. 21

“칠순 전후 할머니 넷이 스페인 여행하며 겪은 웃지 못할 해프닝, 되찾은 자매애” 위로는 일흔다섯에서 아래로는 예순여섯살까지의 ‘할머니’들이 스페인을 주유했다. 이제는 강단에서 은퇴한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의 자매들이 그 주인공. 어려서 따로 친구가 필요 없을 정도로 고만고만하게 함께 자란 자매들이 만년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겪은 에피소드, 그리고 따뜻한 자매애.

스페인 여행한 이어령 전 장관 부인 강인숙 영인 문학관 관장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70·전 건국대 국문과 교수)이 자매들과 함께 스페인을 여행하고 돌아와 엮은 <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98년 강단 은퇴 후 남편 이어령 전 장관(70·현 중앙일보 고문)과 자신의 이름 한자씩을 따 지은 ‘영인문학관’을 개관, ‘문인 시각전’ ‘육필 원고전’ 등을 기획하며 국내에서는 생소한 ‘문학관’이라는 개념을 정착시켜왔다. 문학 연구자로서 남편과 자신이 평생 동안 수집해온 자료들이 소실되는 게 안타까워, 자료들을 정리·전시하는 일에 만년을 바치겠다던 그는 그런 활동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최근 자신의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을 집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낸 것이 바로 이 여행기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태어나서 처음 만났던 사람들, 유년의 살붙이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나이가 들고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방금 뭐했는지도 까먹는데, 유년 시절의 기억들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선명해져서 다시 유년 속에서 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먼저 3년 전 자매들과 함께 떠났던 스페인 여행기를 쓰게 된 거죠.”
생애를 통해 그가 경험한 가장 불가해한 인간상은 ‘타고난 에피큐리안(쾌락주의자)’이었던 그의 아버지다. 재력가였고, 또 자신이 이룩한 부만큼 쾌락에 젖어 살았던 부친은 그의 자로는 재어지지 않는 애증의 인물이다. 때문에 그런 아버지를 언젠가는 분석해보겠노라 그는 막연하게 생각해왔고, 만년의 여가가 그 막연한 계획의 발심으로 이어졌다.
아버지를 향한 여정은,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자매들과의 여행기’라는 형태로 그 첫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사실 이 자매들의 여행은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평생 강단에 서느라 봄, 가을 풍광 좋은 계절에 떠나는 여행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은퇴후 첫 계획이 제철 여행이었다. 그러나 동갑내기 남편 이어령 고문이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다시 강단에 서게 되면서 오래 마음속에 묵혀두었던 제철 여행 계획이 무산된 것.
핸드백 강탈 등의 해프닝 속에서 노년에 다시 눈뜬 뜨거운 자매애
99년 가을, 낙심한 그의 푸념에 노년의 자매들이 “그럼, 우리끼리 한번 떠나보자”고 뭉치면서 여행은 시작됐다. 정신대에 끌려갈까봐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에게 여학교 4학년 때 시집가버린 큰언니 경숙(75), 어수룩한 동생의 등록금을 뺏어 주근깨를 빼고 온 깍쟁이 작은언니 갑숙(72), 그리고 평생 온갖 병을 주렁주렁 달고 살아온 막둥이 여동생 현숙(66)까지, 스무살 남짓 될 무렵부터 각각 서로의 인생길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온 자매들은 스페인 여행에 의기투합했다. 강관장을 제외한 다른 자매들은 모두 미국에 흩어져 살던 터라 만년의 자매들끼리의 여행 계획은 모두를 흥분케 했다.
“당시 세살이던 손녀 지인이는 아주 신이 나면 ‘우와따따 뿌뻬이!’라는 국적불명의 감탄사를 외치는 버릇이 있었어요.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하자 네 노파가 ‘우와따따 뿌뻬이!’라고 합창을 하게 되더라고요. 우리 자매가 함께 여행하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우리는 집만 나서면 수학여행간 여학생들처럼 신이 나고 즐거워지는 타입이라서 여행 내내 ‘우와따따 뿌뻬이!’를 합창했어요(웃음).”
여럿이 함께 떠나는 여행은 힘들고 부산한 실랑이의 연속이다. 피를 나눈 형제, 칠순의 위아래로 걸쳐있는 할머니들이라 해도 그런 실랑이가 없을 수 없었다. 처음 여행사를 알아보고 예약을 맡았던 작은언니 갑숙씨가 비행기 이동거리를 길게 잡은 것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척추 디스크에 시달리던 강관장이 이를 알고 신경질을 부리자 언니는 칠순의 그에게 “쪼꼬만 계집애가 뭘 안다고 까부냐”며 면박을 줬다. 그렇게 그녀들은 자연스레 유년의 모습으로 돌아가 스페인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스페인 여행한 이어령 전 장관 부인 강인숙 영인 문학관 관장
그날부터 열흘간의 여행 내내 크고작은 해프닝들이 멈추지 않았다. 스페인 여행 첫날, 마드리드 왕궁을 구경하고 나와 차를 기다리던 강관장은 ‘백치기’에게 핸드백을 강탈당하고 만다. “내 핸드백은 커서 옷도 들어간다”며 자랑했는데, 그 가방을 백주대낮, 그것도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에서 순식간에 뺏겨버린 것이다. 더욱이 ‘백치기’가 가방을 확 잡아채면서 땅바닥에 내리꽂는 바람에 강관장은 팔에 금이 가는 부상까지 입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운동에 만능이었던 큰언니 경숙씨는 오토바이로 도주하는 백치기를 맞춘다고 냉큼 벽돌을 집어들었고, 호리호리한 작은언니 갑숙씨는 그 뒤를 좇는답시고 배낭까지 벗어던졌다. 바닥에 널부러졌다 일어선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오히려 웃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배낭 벗고 뛰어서 쟤들을 잡게?”
하지만 웃음도 잠시였다. 가지고 간 자매들의 비상금을 몽땅 그 가방에 넣어놨던 터라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돼버리고 만 것이다.
이미 숙박지며 식당 등의 예약과 지불을 끝내놓은 터라 다행이었지만, 스페인에서의 첫 일정은 그렇게 혼비백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여행중 가장 마음속에 남는 건 여행 내내 차에 머물렀던 막내 현숙씨의 일이다. 근육무기력증에 시달리는 현숙씨는 행여 다른 자매들의 관광까지 방해할까봐 잔류를 자청했다.
고성 구경에 나설 때도, 박물관 구경을 나설 때도 막내는 망원경을 흔들며 “나는 이걸로도 다 볼 수 있으니까 갔다와!” 하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오래 병마와 씨름해온 현숙씨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혼자 잘 놀았다.
“밤에 마요르 광장 구경을 나갔는데, 거리에서 펼쳐지는 플라멩고 춤이며, 그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취했어요. 신이 나서 시간 가는 줄 몰랐죠. 문득 시간을 깨닫고 부랴부랴 차로 되돌아가는데 어둠 속에 혼자 앉아있는 동생의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지고 묘한 죄책감 같은 게 들더라고요. 동생도 그 마음을 아는지, 잘 보고 왔냐며 오히려 더 밝게 우리를 맞아주고….”
1·4 후퇴 당시 함경남도가 고향인 그들은 설한을 뚫고 피난길에 나섰다. 그리고 참혹했던 피난민 시절, 현숙씨 바로 손아래 남동생은 폐렴으로 죽고 말았다. 죽음이 일상이 된 전란의 와중인지라 다른 누이들은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건만, 자신의 옆에서 갑자기 숨을 멈춰버린 남동생의 죽음에 놀란 현숙씨의 경기와 슬픔은 며칠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울고 또 울었다. 약도 없고, 병원도 없던 그 시절, 그는 그렇게 녹내장과 근육무기력증이라는 병마에 시달리게 되고 만 것이다.
“세월이 너무 금방 갔어. 언제 그랬나 싶어요. 벌써 한 세월이 다 간 거죠. 우리 자매들이 어릴 때 싸우면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무꼬리나 한 데서 썩지, 사람 새끼는 한 데서 썩는 게 아니라고. 여자 형제는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 그리워하며 살아야 할 관계임을 알고 계셨던 거죠.”
이북이 고향인 그들은 내년쯤 건강이 허락하면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지금은 중국땅이 된 장백현 자치구. 다음 여행지는 등화관제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낄낄대던 유년 시절의 동네라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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