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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용감한 여자들

‘여성 탐정’으로 활약하는 고은옥·송혜란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최문갑 기자

2002. 11. 21

“007 첩보영화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 우리에게 일어나죠” 다리 안쪽으로 총을 숨긴 늘씬한 미녀. 잠복 끝에 범인을 잡아낸다. 마치 추리소설에나 등장할 것 같은 ‘여자 탐정’이 우리 주변에도 등장했다. 이른바 ‘민간조사요원(Private Investigator)’으로 활약하는 고은옥·송혜란씨가 그들. 보험사기, 사이버 범죄, 스토킹 등 결코 만만치 않은 사안을 척척 해결하는 이들의 활약상을 들어본다.

‘여성 탐정’으로 활약하는 고은옥·송혜란
중장년 세대라면 어린 시절 TV로 방영됐던 외화 <미녀 삼총사>를 기억할 것이다. 얼마 전 극장판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던 <미녀 삼총사>는 미모와 무술 실력을 갖춘 세명의 여성들이 의뢰인의 난국을 헤쳐나가는 신나는 활극.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이 영화처럼 여성 탐정이 활동하는 시대가 열렸다.
그 신호탄을 쏘아올린 이들은 지난 9월 초, 민간조사요원 양성기관인 한국PI협회의 정규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정식 민간조사요원이 된 여성들이다. 지난해 이미 자격을 취득해 ‘국내 여성 탐정 1호’가 된 고은옥씨(26)를 비롯해 이번에는 윤혜진(25)·송혜란씨(27)가 ‘여성탐정’대열에 합류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1백20명의 민간조사요원이 활동하고 있는데, 여성 조사원들의 숫자도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 특히 고씨는 지난달 여성부 주최로 열린 ‘2002 신여성 직업 페스티벌’에 참여, 특강을 했을 만큼 이 분야에서는 ‘유명인물’이다.
먼저 이들에 대한 소개를 하기 전에 ‘명칭’부터 짚고 넘어가자. 앞에서 ‘탐정’이란 말을 썼지만, 이 말은 바른 말이 아니다. 한국PI협회 유우종 회장의 말에 따르면 “이는 일제의 잔재가 남은 표현”으로 법적으로도 맞는 말이 아니라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정식명칭은 민간조사요원(PI)이다.
보험사기, 스토킹, 사이버 범죄 등의 해결사로 활약
민간조사요원들은 어떤 일을 할까. 국내에서는 아직 법적으로 이들의 수사권이나 체포권이 인정되지 않는 한계가 있지만 각종 보험사기, 사이버 범죄, 기업 스파이, 스토커로 인한 피해, 미아찾기 등에 이르기까지 민간인들의 온갖 고충을 풀어주는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미행법, 지문감식, 법의학, 도청, 사격, 범죄심리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이론교육은 물론 실탄 사격훈련까지 받으면서 8개월 이상 교육을 받습니다. 그후 특별검정시험을 통과해야만 민간조사요원이 될 수 있죠.”
고은옥씨의 말이다. 고씨는 민간조사요원이 되기 전 고등학교 시절부터 6년 동안 경호원으로 활약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 고르바초프와 톰 크루즈 등 유명인사의 경호를 담당했을 만큼 베테랑이다. 170cm의 키에 모델 뺨치는 미모의 소유자지만, 매서운 눈매며 ‘각’이 잡힌 자세는 범접지 못할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그뿐인가. 강인한 체력을 위해 1주일에 사나흘씩은 하루 10km씩 달리고 태권도와 합기도 같은 무술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이 손 좀 보세요. 완전히 남자 손이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태권도를 배웠어요. 고등학교 때 꿈은 여경이나 여군이 되는 거였고요. 그런데 경찰간부후보나 ROTC로는 여성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생각이 바뀌었지요. 그런 남성 위주의 시스템이라면 들어가지 않겠다 결심하고, 고 3때 경호업무로 진로를 바꿨어요. 그때부터 활동을 했는데, 경호 업무만으로는 한계를 느껴 외국유학을 준비하던 중 한국PI협회를 알게 되었죠.”
아직까지 현장에 투입된 경험은 없지만, 민간조사요원 육성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송혜란씨 역시 ‘여군 지망생’이었다는 점은 고씨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20대 초반에 여군을 지원했는데 부모님의 만류로 꿈을 포기해야 했죠. 그러던 중 올초에 민간조사요원 모집공고를 보고 부모님을 설득, 꿈을 이뤘어요. 어렸을 적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쪽 일이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아요. 친구들은 ‘결혼은 안하고 웬 짓이냐’고 만류하기도 했지만, 사업을 하는 남자친구는 제 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어요. 요즘은 제가 하는 일이 좋아 보이는지 하던 일을 접고 이쪽 분야사업을 준비중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민간조사요원 일이 매력있고 보람있다”고 입을 모은다. “혹시 여성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겪거나 힘에 부치는 경우는 없느냐”는 질문에도 “그런 건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여성 탐정’으로 활약하는 고은옥·송혜란

각종 장비를 들어보이는 송혜란씨(위)와 멋진 사격자세를 취한 고은옥씨.(아래)

“물론 잠복이나 미행을 할 때는 체력이 필요해요. 따라서 체력관리는 필수죠. 사격 실습도 하고 있지만, 업무가 육체적인 부분보다는 조사, 분석과 같은 정신적 활동에 더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남성에 비해 불리한 점은 없어요. 도리어 여성이기 때문에 조사 대상에게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효과도 있고, 남성은 놓치기 쉬운 단서를 세밀하게 잡아내는 등 여성이 지닌 섬세한 면이 작업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요.”
고씨의 말이다.
이들은 신변의 위협이나 상해의 위험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가스총을 지니고 다닌다. 필요에 따라서는 고성능 마이크가 달린 만년필형 카메라나 카드형 카메라가 동원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영화 <007>의 첩보전이 무색할 정도. 스토킹 피해와 같은 일의 의뢰를 받으면, 조사대상의 주변을 탐문, 미행하는 것은 물론 피해 여성의 집에서 먹고 자는 합숙도 불사한다. 그뿐인가. 사안에 따라 이들의 활동 영역은 국내를 넘어선다. 사기를 치고 도망가거나 위조지폐와 관련된 경제사범이 해외로 도피한 경우 외국의 PI협회와 공조해 조사를 진행한다.
“사회 정의에 기여할 수 있고, 또 활동적으로 일하는 가운데 수익도 보장되기 때문에 전 이 직업을 불의를 참지 못하는 활달한 성격의 젊은 여성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어요. 다만 멋 모르고 ‘그저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금물입니다. 열성과 용기가 있는 여성의 도전이라면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싶지만요.”
고씨의 말에 송씨도 “교육받는 여성 중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전 그래서 일단 시작하기 전에 이 일이 자신에게 맞는지 세번 자문해보고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어요”라고 덧붙였다.
보람 있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황당’한 경우도 물론 있다. 초등학교 짝을 찾아서 결혼하고 싶다는 20대 여성의 의뢰도 있었고, 공장에서 근무하는 50대 아주머니는 누가 자신을 비방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닌다며 조사를 요구해오기도 했다. 때로 성심껏 조사를 해줬는데도 조사비를 떼먹고 도망간 경우도 있다.
“초창기에는 단순히 여성조사원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업무를 빙자해서 연락하는 짓궂은 남성 의뢰인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전화 통화를 해보면 장난인지 정말로 사건을 의뢰하려는 건지 알 수 있어요.”
민간조사요원이 되는 데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한다. 다만 전과 사실이 없어야 하고, 문신한 자는 제외된다. 또한 전직이 있을 경우 전직에서의 활동 내용도 꼼꼼히 따져본다고 한다. 활동 내용 중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부정한 행위가 있었는가 여부. 직업의 성격상 무엇보다 바른 인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직업은 법과 가까이 있는 직업이기 때문에 바른 소명감과 투철한 직업의식이 가장 중요하지요. 우리의 활동은 변호사법에 저촉받기 때문에, 수임료를 챙긴다거나 뒷거래를 하는 일이 발생하면 곤란합니다. 따라서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직업관의 소유자가 적임자입니다”라고 유회장은 강조한다.
“그야말로 영화나 각종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걸 보면 놀라실 거예요.”
민간조사 분야 중에서도 앞으로 비중이 더욱 커질 것은 ‘사이버 범죄’. 개인 아이디의 도용부터 심각한 기업 스파이 활동에 이르기까지 사이버 범죄 민간조사요원의 수요는 날로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현재도 사이버수사대의 인력이 부족해 한국PI협회로 조사의뢰가 이관되어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남자도 하기 힘든 민간조사요원의 세계로 뛰어든 용감한 여전사들. “민간조사요원으로서 한몫을 제대로 해내기까지 계속 노력하겠다”고 당차게 다짐을 밝히는 그들을 보니 ‘강한 여자가 아름답다’는 말이 실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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