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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지킴이 이희운 목사

“현대판 노예로 고통 받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 글·정미화 ■ 사진·성경훈

입력 2002.10.09 13:30:00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찾은 이 땅에서 멸시와 냉대 속에 신음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우리 사회의 인권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그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
전주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 소장 이희운 목사가 그 주인공. 산업재해를 당해 목숨을 잃은 몰도바 출신 노동자 2인을 위해 현지에 추모복지관을 짓고 싶다는 이목사의 조용한 바람을 들어본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지킴이 이희운 목사
외국인 노동자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 동남아 등지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가난한 외국인’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들은 대개 우리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종사하면서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보수를 받으며 하루 평균 12시간 이상 일을 한다. 상당수가 불법체류자인 탓에 임금을 떼이고 업주로부터 구타를 당하거나 산업재해를 입어도 제대로 호소할 곳조차 없는 것이 이들의 고단한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후미진 인권 소외지대에서 고통 받는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전주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 소장 이희운 목사(40·나실교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96년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의 문을 연 이후 한결같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낯선 이국 땅에서 외롭고 힘들어 찾아올 때마다 기대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현장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한마디로 사람대접을 못 받죠. 비좁은 숙소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살면서 외출조차 통제를 받습니다. 업주나 간부직원들에게 폭언이나 구타를 당하는 일도 잦습니다. 특히 그들이 불법체류자일 경우 상황은 이보다 훨씬 열악하지요.”
이목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심각한 인권현실을 전하며 그렇게 고생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되겠냐고 반문했다.
“우리도 불과 20∼30년 전까지 부모 형제들이 미국, 독일, 중동 등 먼 이국 땅에서 천대와 멸시 속에 고생하며 일했던 과거가 있습니다. 이제 좀 잘살게 되었다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짓밟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목사가 최근 우리나라 산업현장에서 희생된 외국인 노동자의 고국에 추모복지센터를 짓는 일을 추진하는 것도 그러한 자성에서 비롯했다. 지난 2000년 12월 전북 김제의 한 중소기업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몰도바(흑해 인근의 구 러시아권 국가) 출신 노동자 2명이 희생된 것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립식 숙소에서 잠자던 드미트리(당시 30)는 현장에서 숨지고 동료 에밀(46)은 수차례의 수술을 받으며 1년 동안 치료하다 고국으로 돌아갔으나 후유증으로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숨지고 말았다. 또 함께 잠자던 다른 동료 몰도바인 세르게이(34)와 바실리(45)도 팔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러시아 브로커의 꾐에 빠져 2천달러의 사채를 써서 관광비자를 발급받아 한국에 온 그들이 이 공장에 취직한 지 두 달 만에 당한 사고였다.
하지만 불법체류자였던 이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화재로 업체가 부도나면서 사장이 잠적하는 바람에 최소한의 치료비조차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드미트리의 유해는 숨진 지 6개월 만에 가까스로 고국에 보내졌지만 화상을 입은 나머지 사람들은 의지할 곳 없는 먼 타국에서 치료비조차 없어 발을 굴렀다. 여권마저 타버린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딱한 처지의 몰도바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이 이 목사가 운영하는 전주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다.
센터에서는 이들의 산재보험 처리 수속을 도와 마음 편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입원치료가 끝난 후에는 갈 곳 없는 이들이 센터에서 생활하며 통원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또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해 비행기삯 모금운동을 벌이고 중국에 있는 몰도바 대사관을 통해서 여행증명서를 다시 발급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마침내 지난 8월18일 세르게이와 바실리는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사람들을 보내면서 마음이 아프더군요. 2년 가까이 낯선 한국 땅에서 멸시와 냉대 속에 고생만 하다 몸과 마음에 상처만 안고 돌아가니 말입니다. 그들은 돌아갔지만 아직도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추모복지센터는 두 몰도바인의 넋을 기리고 사죄하는 의미로 그들의 고국에 건립할 예정이다. 이목사가 바라는 밑그림은 이렇다. 숨진 드미트리와 에밀의 추모비를 세우고, 이곳에서 다양한 사회복지 서비스 프로그램을 제공, 현지 주민들이 혜택을 받게 하자는 것이다. 또 다양한 구직활동 정보를 제공할 참인데, 이는 브로커들을 통해 빚어지는 인력 송출 비리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에서는 추모복지관 건립에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자금 3천여만원을 길거리 모금, 추모 콘서트 등 모금운동을 통해 마련할 예정이다. 이 목사는 “내국인들이 외면하는 3D업종의 노동을 대신해주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기에 우리 중소기업, 나아가 우리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추모복지관 건립에 동참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이목사의 애정 어린 관심은 “위아래 차별 없이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길”이라는 오랜 신념에서 비롯됐다. 전북대 불어불문학과 재학시절부터 독실한 기독교도로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에 투신했던 이목사는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장로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서울에 가니 농촌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도시에서 다시 하층 노동자로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함께해야 할 사람들이 그들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그 이후 그는 노동하는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고 있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노동현장에 ‘위장취업’해 공장과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산업선교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 시절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다가 가마에 치어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하고 빌딩 공사장에서는 벽돌을 나르다 3층에서 추락할 위기도 겪었다.
93년 10월 전주에 나실교회를 개척한 이후에도 이목사는 일반 신도들보다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선교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IMF로 실업자와 노숙자들이 늘어나면서부터 전주근로자선교상담소와 노숙자 희망의 쉼터를 개설해 노동자들의 삶에 더욱 깊이 파고 들었다. 밤낮없이 뛰며 노동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의 자활을 도왔다.
“전과자, 광주 진압군 출신, 알코올 중독자 등 몸과 마음이 폐허가 되어서 쉼터를 찾아온 노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단순 노동자로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 떠돌다, 거기에서마저도 밀려난 사람들이지요.”
이목사의 쉼터에 모인 노숙자들은 신앙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고, 가족과 일을 찾아 자활의 길을 가고 있다. 더러는 아직도 노숙자 신세로 쉼터를 들락거리는 이들도있지만 벌써 5백여명이 자활의 길을 걸었다. 이처럼 사회의 그늘진 곳에 늘 관심을 쏟아온 이목사였기에 외국인 노동자 문제 역시 자연스럽게 아우르게 됐다. 그들이야말로 노동현장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과 인간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자 이웃이라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이목사가 개설한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자상한 조언자이자 믿음직한 해결사 노릇을 해왔다. 임금체불, 산업재해, 구타, 성폭력, 출입국 문제 등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함께 해법을 고민하고 때로는 현장으로 달려가 함께 싸웠다. 선교센터의 헌신적인 상담활동이 알려지면서 요사이는 전북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전남과 인천 등지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상담을 의뢰해올 정도다.
이곳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에서는 상담활동뿐만 아니라 이국 땅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다양한 문화프로그램도 제공하고 있다. 체육대회, 여행, 공연 관람 기회를 마련해 한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마땅히 쉴 장소가 없는 이들을 위해 상담센터 안에 차를 마시고 어울릴 수 있는 카페도 운영하고 있다. 해마다 추석에는 갈 곳 없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체육대회도 연다. 올해가 다섯번째 대회로 축구, 농구, 장기자랑 등 오락프로그램과 함께 송편을 나누며 고향에 가지 못해 외로운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최근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는 전국적으로 네트워크를 꾸려 외국인산업연수생제도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산업연수생 제도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외출통제와 감금, 그리고 폭행과 성폭력, 성희롱 등 끝없는 문제점을 드러내는 현대판 노예제도”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으로 “불법 체류자들을 양산하는 이 제도를 하루 빨리 폐지하고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가치를 인정하는 노동허가제와 같은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는 전주근로자선교상담소. 인근에 새 사무실을 마련해 분가한 외국인노동자선교센터가 얼마 전까지 함께 있던 곳이다. 허름한 건물 2층에 세 들어 있는 상담소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복도를 두고 작은 방 4개가 양쪽으로 붙어 있다. 일반 노동자들의 노동문제 상담을 위한 ‘희망의 전화’와 노숙자를 위한 ‘희망의 쉼터’ 그리고 생명농업학교, 지역공동체화폐 전주품앗이 사무실 등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공간이다.
안쪽에 있는 방 한켠에 단정하게 마련된 예배실이 아니면 이 목사가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 ‘나실교회’ 담임목사라는 사실은 잊기 십상이다.
“아주 작은 교회지요. 일반 신도는 15∼20명에 불과합니다. 노숙자 쉼터에 계시는 분들까지 합하면 30여명 정도가 예배에 참석합니다. 교인들 심방 한번 제대로 가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죠.”
신도를 늘려 교세를 키우는 것보다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하는 삶이 먼저라는 이목사다. 그의 활동은 노동자 문제에서 환경, 생명운동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새만금 사업 반대 운동, 수돗물 불소화 반대 운동, 급식조례운동, 우리쌀 지키기 운동 등 그가 관여하고 있는 사회운동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 10여년 동안 고정적인 월급 한푼 없이 살아온 이 목사의 개인적인 삶은 고달픔 그 자체였다. 공과금도 제때 못내 집에는 전기와 가스가 끊기기 일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목사가 신념대로 살 수 있는 것은 그런 생활을 묵묵히 견디면서 오히려 이목사를 격려하고 일을 나누는 부인 황은영씨(38)와 세 딸 청아(13), 청로(10), 드보라(5)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재학 시절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부인 황씨는 그에게 둘도 없는 동지이자 든든한 후원자다.
또 오랜 방황을 끝내고 자활의 길을 찾은 노숙자들의 환한 웃음과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며 감사의 말을 잊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 세르게이와 바실리와 같은 이들, 그리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스스로 청한 그의 몸짓에 귀 기울여주는 이들이 있어 이목사는 또 힘을 얻는다.

여성동아 2002년 10월 4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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