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키스 앤 메이크업’은 한때는 잘살았지만 사업 실패로 빚만 남은 부부가 위장이혼을 한 후 벌어지는 해프닝을 희극적으로 담아낸 시트콤 뮤지컬이다. 이 뮤지컬의 제작자인 박해미(46)· 황민(37) 부부는 이 작품에 자신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고 한다. 그래서 관객 중 일부는 ‘극 내용 자체가 이들 부부에게 있었던 일은 아닐지’ 혼란스러워 한다.
“사실 10년 전부터 우리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고는 생각했어요. 방송에 나가 우리 얘기를 하면 다들 즐거워하시더라고요.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아서 실제 무대에서 보여줄 기회가 있었으면 했죠. 하지만 그 땐 능력이 부족했어요. 10년 동안 다양한 무대에 서며 많은 걸 보고 듣고 하면서 관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됐고 창작을 위한 자질, 그리고 제작 여건 등이 충족됐어요. 그런데 당초 생각했던 ‘샘과 햄’(황민씨의 외국이름이 샘, 박해미의 애칭은 ‘해미’를 줄인 햄이다)의 이야기를 그리자니 젊은 시절 얘기라 제가 출연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현재 이야기를 다룬거죠.”
“세상 모든 부부의 결혼생활 여과없이 보여주고 싶어”
시나리오 작업 과정도 흥미롭다. 박해미·황민 부부와 작가, 연출자가 한데 모여 시나리오를 구상했는데 이때 수도 없이 싸웠다는 것이 황씨의 설명이다.
“작가가 여성이다 보니 아무래도 스토리가 여자 입장으로 치우치는 것 같았어요. 남자의 입장도 대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의견을 내다가 ‘이건 아니다’, ‘뭐가 아니냐’ 하면서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았죠. 그래도 그 덕분에 좋은 대사들이 나왔어요. 작가가 미혼이라 처음엔 아름답게만 쓰려고 했는데 저희가 싸우는 모습을 본의 아니게 보여주게 되면서 바뀌었죠. 저희도 한창 싸우다가도 ‘작가님! 방금 제가 한 말은 좋은 것 같으니 대사로 써주세요’라고 한 적도 많아요(웃음).”
부부가 꼽은 인상 깊은 대사도 있다. 황씨는 “대본 중에 ‘그 껌이 그 껌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이성이나 결국은 비슷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결혼생활 또한 단물이 빠지고 나야 풍선을 불 수 있는 껌처럼 그저 좋기만 한 시간이 지난 후 한 단계 더 발전한 부부관계가 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박해미는 관객이 많이 공감하는 부분이라며 노래 한 구절을 읊었다.
“‘정말 무슨 말인지 몰라? 미치지 않은 내가 미친 거야… 싸우는 것도 지겨워 봄은 겨울처럼 메마르고 사랑에 미쳤던 난 사랑에 다치고 다치고 다치고/ 꽃은 눈물처럼 낙엽지고 영원을 믿었던 난 이렇게 변하고 변하고 변하고/ 헤어지자 헤어지자 수백 번 말해도 헤어질 수 없는 그런 사이.”
이렇게 17년 결혼생활을 해온 부부가 공감하는 작품을 직접 연기하는 배우로서, 또 프로듀서로서 바라보는 느낌은 어떨까. 작품 자체가 희극적이고 해학적이라서 실제 남편과 싸우는 것처럼 감정이입이 되지는 않는다는 박해미는 “극중 남편 대사 중 딱 한번 ‘미안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남자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참 안하고 산다는 생각을 했다’는 남자 관객 분들이 있다. 우리 남편은 그 장면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씨는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는, 솔직히 ‘아 여자는 저런 마음이었구나. 남자가 저러면 안 되는데’라기보다는 ‘여자가 왜 저러나’ 싶어요. 남자 역할에만 감정이입이 돼서요. 사실 작품 속 남자는 사업도 실패하고 가족을 힘들게 하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다만 ‘옛날에는 몸매가 예뻤다’며 와이프를 비꼴 때면 꼭 저를 보는 것 같아서 웃겨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 좋아”
치열하게 싸우고, 변해버린 부부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키스 앤 메이크업’. ‘화해하다, 용서하다’라는 뜻을 지닌 제목처럼 뮤지컬도 두 사람의 화해를 향해 극이 전개된다. 하지만 박해미·황민 부부에게는 화해할 틈이 없다. 그 이유에 대해 박해미는 “우리 회사 분이 이 작품을 보고 ‘나는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안된다. 그저 한 사람이 양보하면 되는데’라고 하시는 걸 보며 우리는 양보를 안 해주는 부부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황씨 역시 “우리는 한 사람이 져주면 ‘져줬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하지만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하고 싶은 말 마음에 담아두는 것보다 나은 듯하다”고 밝혔다.
연극에는 아들의 모습도 보인다. 극중 부부가 싸우고 있을 때 다른 배우가 중재를 하며 “뽀뽀하세요! 아니면 나한테 뽀뽀하든가”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건 바로 박해미·황민 부부가 싸울 때 아들의 화해유도법이라고 한다. 하지만 되도록 부부는 아들 앞에선 싸우지 않으려고 한다. 어느 순간 부모가 싸우는 것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아이를 본 후부터다. 그때부터 부부는 조금 답답하더라도 아이 앞에선 문자로 싸운다. 그런데 황씨의 ‘친구 같은 아빠 되기’ 프로젝트가 부부싸움에 한몫한다. “단 하나뿐인 우리 사랑의 결실 앞에서 부모로서 권위를 보이기보다는 친구가 되고 싶다”는 지론을 가진 황씨 덕분에 아들의 친구들 역시 그를 삼촌이나 형처럼 대하며, 아들도 격의 없이 부모에게 “햄” “샘”이라고 부를 정도인데 그 때문에 박해미는 황씨와 더욱 다툴 수밖에 없다고 한다.
“부자가 친하고 격이 없는 건 좋은데 제가 악역이 돼야 해요. 적어도 씻기·이닦기 등 꼭 해야 할 하루 일과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편은 시키질 않아요. 오히려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주의죠. 제가 아들에게 ‘오늘은 책 좀 읽어야지’ 하면 남편이 ‘에이, 다음에 하게 해’라고 해요. 그 하루하루가 쌓여 결국 1년이거든요. 습관이 중요하고 기본이 있으면서 자유분방한 게 좋은 거죠. 그건 방임하고는 다른데 남편은 아이를 너무 감싸고 돌아요.”
또 한 가지 부부의 치열한 싸움의 원인은 바로 집안일 분담이다. 황씨가 도와주지 않는 건 아니지만 밤새 촬영한 후라도 집에 들어가면 걸레질 한번 해야 속이 시원하다는 박해미로서는 성에 차지 않는 것. 게다가 아들마저 “어느날 집안일 하자는 아내를 뒤로하고 친구들과 모임에 가버린 남편이 미워 119에 하소연하는 내용의 실화를 봤다”며 박해미에게 “엄마가 아빠한테 왜 화내는지 알겠어요”라고 하기도 했다고. 그러자 황씨의 항변이 이어졌다.
“저 잘 도와줘요. 아내가 기계치인 탓에 세탁기 버튼도 몰라서 제가 빨래도 하고 청소도 잘해요. 하지만 누가 하라고 시키는 건 싫어요. 주말에 청소해야겠다 싶어 청소기를 집어들다가도 아내가 방에서 ‘샘~ 청소해’라고 하면 하기 싫어져요. 그럴 땐 어떤 광고에서처럼 청소기 돌리라면 빙빙 돌리고, 빨래 개달라고 하면 강아지에게 빨래를 던져주고 싶어진다니까요(웃음).”
이렇듯 매일이 다툼의 연속이지만 박해미 가족은 똘똘 뭉쳐 있다. 여행은 무조건 가족끼리, 잠을 잘 때도 세 식구가 한 방에서 자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또한 황씨는 “아내가 출연한 드라마를 돌아보면 ‘하늘이시여’에서의 모습과 비슷한데 나는 그런 점이 매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늘이시여’ 때 뻔뻔하고 악독한 역으로 나왔잖아요. 저한테도 그래요. 방송에선 늘 에너지가 넘치는 반면 집에선 축 늘어진 개구리처럼 누워만 있으면서 저한테 이것저것 시키죠. 제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들라치면 방 안쪽에서 ‘샘~~ 물 한 잔만’이래요(웃음). ‘다 함께 차차차’에서 착하기만 한 모습은 전혀 아니죠. 하지만 전 그런 아내가 좋아요. 물론 TV보다 무대에서의 아내가 더 멋지고요. 아내가 한창 다작을 할 때엔 어느 날은 ‘맘마미아’의 도나와 집에 가고, 어느 날은 ‘카르멘’의 카르멘과 함께 잠들고…. 그런 점이 정말 매력이죠.”
“1백세가 돼도 투닥투닥 싸우며 살 것 같아요”
박해미·황민 부부의 주변인들은 모두 그들을 천생연분이라 생각한다. 본인들도 “다시 태어나도 선택할 내 사람”이라고 서로를 생각한다. 그래서 둘이 함께 상상하는 10년 후는 조금 더 여유로울 뿐 지금과 별로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제가 하루 스케줄을 끝내고 집에서 개구리처럼 누워 있는 건 에너지를 충전기 위해서예요. 제가 젊은 나이도 아니고, 10년 후쯤엔 템포가 느린 삶을 살고 싶어요. 여유롭게 강아지도 키우고 상추씨도 뿌리고,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요. 아직은 지렁이가 무섭지만 꼭 지렁이와 친한 삶을 살려고요.”
“안 그래도 공기 좋은 곳에 땅을 1백 평 샀어요. 그런데 아마 그때도 제가 밭을 일구고, 아내는 뒤에서 이것저것 감독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아들이 그림을 그려왔는데 아들과 전 열심히 밭을 갈고 있고, 아내는 뒤에서 물을 뿌리고 있는 그림이었어요. 아들도 어떨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거죠(웃음). 전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치열하게 싸우고 부딪치며 살았으면 해요. 얼마 전에 TV에서 78세 할아버지가 집에 못 들어가서 119에 신고한 내용이 방송됐어요. 알고 보니 할머니가 저녁 7시 반인데 밤늦게 돌아다닌다며 문을 잠그신 거였어요. 그걸 보는데 얼마나 웃긴지, 우리 와이프도 변함없이 늘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면 좋겠어요. 나이가 80세가되든 100세가 되든 ‘샘!’하고 부르며 투닥투닥 싸우면서 살아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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