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백년간 지구상에서 전쟁이 없었던 것은 단 14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항상 전쟁이 나고 피를 흘리는 일이 반복됐고, 그때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죠. 전쟁이 날 때마다 제일 불쌍한 건 여자들과 아이들이에요.”
지난 2007년 콩고에 다녀온 후, 김혜자는 연기자로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다우트’로 오랜만에 연극무대 나들이를 한 것으로 시작, 원빈과 함께 영화 ‘마더’를 찍었으며 KBS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로 안방극장을 누볐다. 지난 3월 초, 드디어 잠시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기자 그녀는 ‘우리 아이들을 보러가야 한다’며 짐을 쌌다.
영화 ‘마더’ 촬영 마치자마자 1년 반 만에 아프리카 다시 찾아
김혜자의 이번 행선지는 20여 년간 내전을 치러온 수단 남부의 난민 캠프. 3월9일, 디자이너 이광희씨와 함께 그녀는 서울을 떠났다. 3월15일까지 6박7일 일정이었지만 실제 아프리카 땅에서 굶주리고 아픈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이틀에서 사흘 남짓에 불과했다. 아프리카가 보통 사람들에겐 평생 한 번 가보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머나먼 땅인 탓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긴 여정을 떠나는 데 잠시의 주저함도 없었다.
“우리 아이들을 1년 반이나 못 보고 일만 하고 살았어요. 잠시 숨 돌릴 여유가 생겼는데 지금 안 가면 또 오래도록 못 가볼 것 같아서 지금 가자고 했지요.”
지난 93년 월드비전 홍보대사로 에티오피아 땅을 처음 밟은 후 16년간 그녀는 적어도 한 해에 한 번, 또 많을 때는 서너번 씩 기아선상에 놓인 어린아이들을 찾아 아프리카로, 동남아로 힘든 여정에 오르곤 했다.
1941년생이니 올해 68세, 아프리카로의 힘든 여정을 감당하기엔 버거운 나이다. “기자들이 연기자의 나이를 밝히는 것은 시청자에게 선입관을 주기 때문에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불평하는 그녀지만 굳이 나이를 언급하는 실례를 범하는 것은 그녀가 보낸 6박7일의 봉사활동 일정이 가히 살인적인 스케줄로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까지의 비행은 그렇다 쳐도 수단 안에서의 이동 일정은 군대 행군표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의 첫 행선지는 톤즈 지역에 있는 다르푸르와 칼루룸 귀향 난민촌. 나이로비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일행은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수단의 룸벡 공항으로 이동했다. 룸벡 공항에서 귀향 난민촌이 있는 톤즈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기만 되면 통행이 마비되는 비포장도로를 3~4시간 이상 달려야 한다. 그곳에서 하루 봉사 후, 다시 3시간을 달려 월드비전이 지원하는 보건소가 있는 티엣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일정은 이 과정이 거슬러 반복됐다. 장시간의 비행과 차량 이동으로 인한 피로와 허리 통증 때문에 그녀도, 이광희씨도 모두 진통제를 먹으며 버텨야 했다고 한다.
“지난 93년 ‘사랑이 뭐길래’를 끝내고 처음 에티오피아를 갔을 때만 해도, 그냥 공짜로 아프리카 보내준다고 하기에 갔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세상에 무슨 이런 생지옥이 있나 싶은 풍경이 펼쳐지는 거예요. 그냥 가는 데마다 울었어요. 다시는 안 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에티오피아에 갔다온 사연을 어디선가 읽고 공장에서 미싱일을 하신다는 여공분이 돈 8만원을 보내왔어요. 원래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모은 돈인데,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그때는 그 아가씨가 오히려 밉더라고요. 이제 꼼짝없이 다시 가야겠구나 싶어서.”
“이 고통을 끝낼 방법은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고 믿어”
한번 시작하자 도저히 모른 척 할 수 없어서 한 번 더, 그렇게 이어진 여정이 벌써 수십 차례다. 전쟁이 있는 모든 땅이 그렇지만, 그녀는 아프리카를 찾을 때마다 기아와 병마에 힘없이 죽어가는 어린 생명들에 대한 연민으로 밤잠을 설쳐야 했다.
“수단 남부는 기독교도가 많고 북부가 이슬람교도가 많대요. 우리는 남부로 갔어요. 처음 아프리카 갈 때는 내가 가는 곳에 대해 조사도 하고, 공부도 하고 갔는데 이제는 그런 거 안 해서 잘 몰라요. 아프리카 지도 펴놓고 한번 보세요. 그림 연습하듯 아무렇게나 국경선을 그려놔서 가는 곳마다 싸워요. 아프리카는 시에라리온을 가도, 케냐를 가도 어디를 가도 똑같아요. 얼마나 비참한 삶이 펼쳐지는지 몰라요.”
수단의 내전 상황이나 말라리아 피해에 대해 묻자 그녀는 그렇게 소탈하게 대답했다. 처음 3년은 가는 곳마다 울고 다녔고, 그리고 한동안은 이 비극을 어떻게 해야 끝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찾아낸 해답은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하는 수밖에 없다”는 진리였다.
“화살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화살을 누가 쐈는지 따질 필요가 없어요. 중요한 건 어린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야 한다는 거예요. 어른이 돼서 인생이 살아보니 별 게 없구나,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일단 어른이 될 때까지는 살아야죠. 아무 죄없는 그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죽어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매번 그랬지만, 익숙해질 때도 됐을 법하건만 수단에서 그녀는 또 한 번 울었다. 이제 갓 두 살이 됐다는 어린아이가 삼촌의 품에 안겨 이동진료소로 왔을 때였다. 엄마는 그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아빠는 전쟁으로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는 혼수상태로 삼촌 품에 안겨 진료소 흙바닥에 눕혀졌다. 그녀는 새끼손가락에 물을 묻혀 목도 제 힘으로 가누지 못하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이의 입술을 축여주었다. 진료소라고 하지만 의료진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영양식과 항생제 두 종류뿐. 오랜 경험상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또 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의 설탕 기운이라도 맛보라고 막대사탕을 담근 물을 조금씩 조금씩 아이의 입술에 묻히는 일뿐이었다.
그 이상 그녀가 그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봉사라지만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어떤 때 너무나 버거운 책임이 되곤 한다. 죽음을 앞둔 아이 앞에서 돌아서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도 봉사활동에 나선 사람의 숙명이다.
“오래전 케냐 투루카나에 갔을 때 에꾸아무란 여자아이를 만났어요. 가시나무만 있는 황량한 사막지역이라 걷다 보면 두꺼운 신발창을 뚫고 날카로운 가시가 박히는 곳이었죠. 에꾸아무는 그곳 유목민의 딸이었는데 맨발로 다녔어요. 일곱 살 먹은 어린 여자아이가 짚으로 엮어놓은 집에서 아픈 동생을 홀로 돌보고 있는 걸 보고 왈칵 눈물이 솟았어요. 어떻게 저렇게 가엾고 예쁠까? 그러나 도와줄 방법이 없었어요. 한곳에 붙박이로 사는 사람들이 아닌지라 결연을 맺을 방법이 없었고, 그냥 돌아서야 했지요. 그때 무슨 미련한 미련이 남아서 그랬던지 그 아이에게 헛된 약속을 하고 말았지요. 꼭 돌아올게. 꼭 돌아와서 도와주마라고.”
아주 오랜 세월 그 약속은 그녀의 목구멍에 박힌 가시가 돼, 밥을 삼킬 때마다 아프리카의 황량한 초원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를 괴롭혔다. 폐부를 찔러오는 헛된 약속에 대한 자책은 그로부터 6년이 흘러, 그 아이가 열세 살이 됐을 때야 풀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해외봉사의 경험을 담아 지난 2004년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를 출간한 뒤의 일이었다. 다시 아프리카 케냐를 찾았을 때, 동행한 방송 PD가 그 책에 실린 에꾸아무의 사진을 들고 수소문한 끝에 찾아낸 것.
“세상에 그 아이가 저를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왜 이제야 왔냐고 몸을 비틀면서 울어요, 그 아이가.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한 약속을 기억하고.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싶어 미안하기도 하고, 다시 만나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안도도 되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학교를 보내주마 하고 이야기했는데 안 된대요. 엄마하고 자기가 일해야 동생들 학교를 보낼 수 있다고. 그래서 그럼 너희 동생들도 다 내가 학교에 보내주마 약속했죠.”
에꾸아무는 엄마, 동생 둘과 살고 있었다. 엄마와 그녀가 돈을 벌고, 어린 동생만 학교에 다니는 형편이었다. 홀로 학교에 다니는 동생은 누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누나에게 전해주기 위해 누나 종아리에다 가시 같은 걸로 빼곡히 무언가를 적어놓았다. 알파벳이며 숫자며, 초등학교 시절 누구나 배웠음직한 것들을. 그때까지 그녀는 1백명의 아이와 결연을 맺고 있었고, 행여나 더 미래를 기약할 수 없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 그 이상의 결연은 맺지 않기로 결심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에꾸아무와 그녀의 동생 둘과 다시 결연을 맺어 현재 그녀는 1백3명의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월드비전의 해외 아동 후원금은 원래 2만원이지만 환율 인상 등을 고려해 이달부터 3만원이 됐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1백3명을 후원하는 김혜자는 3백9만원씩을 매달 기부하고 있는 것이다.
“3만원, 누군가에게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도 큰돈일 수 있겠지만 그 3만원이면 아프리카의 한 가족이 굶지 않을 수 있어요. 굶주림을 숙명처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아요. 이번 수단에서도 그런 아이들을 수없이 마주쳤죠. 엄마, 아빠는 죽고 할머니가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사는 집이었는데, 그중 막내는 아직 젖먹이인지라 할머니가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리고 있었어요. 하루 옥수수빵 하나 먹기 힘든 형편인데도 젖먹이 굶기지 않으려고 어디선가 젖동냥을 하고, 또 플라스틱 통에다 염소젖을 받아다 먹이기도 하고 정말 눈물겹게 살더라고요.”
이광희씨 제안으로 망고나무 심기 프로젝트 시작해
이번에 방문한 수단 남부지역도 결연이 안되는 지역이긴 마찬가지였다. 살릴 수 없다면 돌아서야 하지만, 이 아이들은 살릴 수 있다고 믿었고 그녀와 이광희씨는 새끼를 밴 암 염소를 사서 이 가족에게 선물했다.
최근 김혜자는 KBS 연기대상, 백상연기대상 등 큰 상을 무려 두 개나 받았다. 그리고 시상식장에서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모두 디자이너 이광희씨의 작품이었다고. 그 인연으로 친해져 아프리카 봉사활동까지 따라나섰다는 이광희씨는 비참한 풍경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지금 당장 먹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이런 가난과 결핍 속에서도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연 지역은 아니지만 무리하게 부탁을 해서 여아, 남아 두 아이에게 대학까지 학비를 지원해주기로 했어요. 남은 분들이 그 수고를 지게 되겠지요.”
어려운 일정을 자청해서 따라나선 길. 김혜자가 감성적인 어머니라면 자신은 이지적인 아버지의 몫을 하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이 가난을 이길 수 있는지를 고민했고, 그 결과 생각한 것이 ‘희망의 망고나무를 심어요 운동’이라고. 지금 망고나무 묘목을 심으면 7년 후에는 열매가 열려 자양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귀중한 식량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처음 따라나선 길이라 그녀의 고통은 김혜자의 그것보다 더욱 컸음직하다. 흙벽으로 만든 허름한 집에서 엉켜 자야 하고, 수면에 달라붙은 모기떼와 벌떼를 쫓아내며 드럼통에 받아놓은 물로 씻어야 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며칠 간의 봉사 활동을 마친 그녀는 완전히 녹초가 돼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귀국 다음날, 김혜자에게 전화를 걸어 통곡을 했다고 한다.
“어떤 흑인여자가 자꾸 꿈에 나와요. 거기 가보면 사람 얼굴이 흙같아요. 못 먹어서 흙처럼 퍼석퍼석해진 얼굴색으로 한 여자가 혓바닥에 손가락을 대요. 먹을 걸 달라고,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다고 내 앞에 얼굴을 드미는 데 도무지, 도무지….”
감정이 북받치는지 이광희씨가 말을 잇지 못하자 김혜자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가서 보고 느꼈으니 이광희씨가 앞으로 큰 일을 해줄 거라고 믿어요. 제가 갑부라면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하고 말하는 사람들 다 데려다가 보여주고 싶어요. 그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를. 저도 갔다와서 꿈을 꿨어요. 붉고 싱싱한 장미 여러 송이가 뱅글뱅글 돌다가 아이들 얼굴이 됐어요. 한 명 한 명, 얼마나 예쁘고 소중하고 맑은지 보고 있는 것만으도 기뻤어요. 장미보다 더 예쁘구나. 그 아이들의 밝고 맑은 웃음을 꿈속에서 보면서, 저도 모르게 울었나 봐요. 낮잠에서 깨보니 눈물이 흘러서….”
그녀는 봉사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라도, 항상 사랑받는 연기자가 되리라 다짐한다고 한다. 사랑을 받아야 더 많은 아이를 도울 수 있고, 그것이 자신의 해야 할 몫이라고. 죽는 그날까지 연기자로서, 또 아이들의 후원자로서 살아가겠다고.
- 월드비전 후원문의 02-2078-7000, 후원신청 02-784-2004
나는 에꾸아무를 다 허물어져가는 헝겊과 지푸라기로 된 삼각형 모양의 움막안에서 만났습니다. 에꾸아무는 나를 보자 마치 친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잘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습니다. 내가 “너 뭣 좀 먹었니?” 하고 묻자, 그 아이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저께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이 아프다는 얘기를 하며 에꾸아무의 눈이 젖어듭니다. 이 예쁜 아이가 울고 있습니다.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에꾸아무가…. 나는 에꾸아무 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 엄마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에꾸아무 엄마가 사금을 캐서 버는 돈은 하루에 5실링에서 10실링 사이입니다. 5실링이면 이곳에서 물 한잔 값입니다. 아빠는 두 해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마는 칭얼거리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자장가 비슷한 노래를 불러줄 뿐, 에꾸아무는 오늘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잠을 청합니다. 어떻게 하면 허기진 배 부분을 없앨까 애를 쓰듯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서.
에꾸아무. 나는 이 아이를 서울로 데려가고 싶습니다. 데리고 가서 깨끗이 씻기고, 밥 먹이고 예쁜 옷 입혀서 학교 보내고, 손잡고 데리고 다니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 소녀를 데려가면 서울 가서 한 열흘은 행복할 거예요. 하지만 이곳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고, 동생이 보고 싶어, 에꾸아무는 곧 불행해질 겁니다.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에꾸아무야, 넌 왜 여기서 태어났니? 왜 하필 아프리카 땅에서 태어났니?
헤르만 헤세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헤세는 에꾸아무를 모르니까 그런 시를 썼겠지요. 이 모든 것이 드라마라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연속극이 아닌 단 한편으로 끝나는 단막극이라면. -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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