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식객’에서 오봉주는 ‘운암정’의 대령숙수인 아버지 앞에서는 믿음직스럽고 착한 아들이지만 라이벌인 성찬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비겁한 일도 서슴지 않는 야심가다. 또한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부드럽고 다정하지만 자신의 행동대장 격인 부하직원 앞에서는 이기적이고 냉철한 모습으로 변한다.
지난 8월 초 드라마 ‘식객’ 촬영장에서 만난 권오중(37)은 오봉주의 그런 야누스적인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더위에 지친 동료배우와 촬영 스태프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다가도 카메라 앞에 서면 표정이 금세 서늘하게 바뀌었다.
“제가 야망이 크지 않아서인지 처음엔 봉주의 복합적인 감정을 소화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드라마가 중반부에 접어든 뒤에야 운암정 후계자가 되기 위해 인생의 전부를 걸었다가 결국 성찬이에게 모든 걸 빼앗기게 된 봉주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죠. 주변사람들을 믿지 못해 모든 일을 혼자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봉주가 쓸쓸해 보여요.”
그는 “비록 악역이지만 봉주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어 기쁘다”면서 “1년 가까이 촬영하면서 모든 에너지가 몸 밖으로 빠져나갔지만 촬영장에 오면 늘 신나고 설렌다”고 말했다.
악역 연기를 하며 느낀 고민이 없었냐고 묻자 그는 “주연을 맡은 김래원에 대한 부러움 때문인지 감정이입이 잘된다. 나 역시 항상 성찬에게 밀리는 봉주처럼 주연을 맡지 못하는 2인자 배우”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래원이는 대사를 감칠맛나게 하고 감수성도 풍부한, 타고난 연기자예요. 후배지만 배울 점이 많죠. 그에 비해 저는 별다른 재능 없이 아등바등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그래서 성찬이를 보는 봉주의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식객’ 출연하면서 한동안 빠져 있던 슬럼프에서 벗어나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연기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데뷔 14년째인 중견 탤런트지만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순 없다’로 인기를 얻은 뒤 코믹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진지한 자세로 정극 연기를 해도 그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그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동안 몇몇 작품에서 주연배우로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포기하거나 일부러 비중이 크지 않은 배역을 골라 했다고 한다. 지난해 말 개봉한 동명영화 ‘식객’에서 ‘오봉주’ 역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고.
“이번 드라마에서 연출을 맡고 있는 최종수 감독님이 오봉주 역에 저를 추천했을 때 제작진의 반대가 컸다고 하더라고요. 그동안 코믹하거나 비중이 작은 역할만 해왔으니까요. 섭섭하지 않았어요. 저도 제작진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감독님께 ‘나는 주연을 맡을 그릇이 못 된다’며 다른 배우를 소개해줬어요.”
하지만 그는 최종수 PD의 끈질긴 권유에 용기를 냈고, “오봉주는 어떤 상황에도 의연하고 멋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최 PD의 주문에 따라 유명 호텔의 주방을 찾아다니며 수석요리사들의 자세를 눈여겨봤다고 한다. 동대문 시장에서 칼과 도마를 구입해 부지런히 칼질을 연습했고 동료배우 김래원·원기준과 함께 요리학원에 다녔다고. 또한 정확한 발음을 위해 매일 아침 볼펜을 물고 신문을 한 시간씩 소리내 읽고, 영어와 불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장면을 위해 원어민 교사의 발음을 녹음해 틈나는 대로 듣고 외웠다고 한다.
권오중은 극중에서는 냉정한 인물을 연기하지만 실제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집에 전화를 걸고 아이와 자주 놀아주는 자상한 아빠라고 한다.
가족의 응원도 그가 연기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지난 96년 여섯 살 연상의 아내 엄윤경씨와 결혼해 초등학교 3학년생인 아들을 두고 있는 그는 “이번 드라마를 통해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들은 제가 TV에 나오는 걸 무척 좋아해서 빠뜨리지 않고 드라마를 봐요. 촬영 스케줄이 빠듯해 자주 못 놀아주는 게 미안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걸 보니 마음이 뿌듯해요.”
그는 아이 건강을 위해 자전거를 함께 타고, 직접 식사를 준비하는 아빠라고 한다.
“더위 때문인지 요즘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아서 걱정이에요. 그래도 제가 음식을 해주면 투정부리지 않고 잘 먹어요. 아이가 밀가루와 고춧가루를 먹지 않아서 주로 두 가지 재료를 빼고 요리를 해주죠. 가장 자주 만드는 음식은 볶음밥인데, 빨리 할 수 있는데다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영양가가 높고 맛도 좋아 아이와 아내 모두 좋아해요.”
시간이 날 때마다 가족여행을 자주 간다는 그는 “이번 여름에는 촬영 때문에 꼼짝을 못했는데 얼마 전 장마와 대본 수정작업 덕분에 온 가족이 집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가 요리사 옷을 입고 요리해달라고 졸라서 제작팀으로부터 요리사 옷을 빌려 저는 봉주를, 아내는 성찬이를 맡아 드라마에서처럼 요리대결을 펼쳤어요(웃음). 아이가 드라마에 대해 궁금해하기에 촬영세트장에 한번 데려올까 생각도 했는데, 촬영하다 보면 아이를 잘 챙겨주지 못할 것 같아 포기하고 말았어요. 대신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밥은 먹었는지, 누구와 어디서 놀았는지 물어봐요. 그런데 그때마다 아이가 ‘아빠, (상대배우와) 뽀뽀는 하지 마!’라고 말하죠(웃음). 요즘 집안 분위기가 안 좋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아요.”
“결혼생활 13년째지만 권태기 느낀 적 없어요”
권오중은 결혼하면서 아내에게 가급적 여배우와 멜로 연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얼마 전 그 약속을 처음으로 어겼다고 한다.
“상대배우인 김소연씨와 키스신을 찍었거든요. 촬영 전 아내가 ‘혹시 키스하는 장면을 찍으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먼저 귀띔해달라’고 했는데 미처 말하지 못했어요. 주위사람들에게 제가 키스신 찍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아내는 그 뒤로 실의에 빠져 있고요(웃음).”
그는 “결혼 13년 차지만 권태기를 겪은 적이 없다”며 “아내의 내조가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하와이에서 아들과 함께 리마인드 웨딩화보를 촬영한 그는 “아이 낳고 살다 보면 연애할 때 감정이 잊히기 쉬운데, 우리 부부는 여전히 연애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며 부부애를 과시했다.
“아내가 여섯 살 위지만 결혼 후에는 오히려 제게 많은 부분을 의지해요. 결혼하고 나니 연상연하라는 사실은 잊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나이 차 때문에 생기는 갈등도 없어요.”
둘째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한때 입양을 고려했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둘째를 낳으려다가 아내가 노산이라 입양쪽으로 생각을 바꿨었어요. 그런데 ‘내 아이처럼 그 아이를 똑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더라고요. 아이를 키우면서 저도 모르게 편애를 해 아이에게 상처를 줄까봐 입양을 포기했죠. 그 대신 네 명의 해외 결식아동들과 자매결연을 맺어 후원해주고 있어요.”
그는 드라마 촬영으로 바쁜 와중에도 매주 토요일마다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2002년 ‘천사를 돕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해 6년째 장애인 목욕 봉사를 하고 있는 그는 얼마 전부터 무료 집수리 및 집짓기 자원봉사단체인 ‘러브하우스’에도 참여해 매주 독거노인이나 장애인들의 집을 직접 도배하고 있다. 2001년부터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그는 얼마 전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는 7년 전 아이가 희귀병 일종인 근육병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으면서부터 봉사활동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다행히 정밀진단 결과 아이는 정상 판정을 받았지만, 다른 근육병 환자와 그들 부모의 고통을 이해하게 됐다고.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해요. 몸은 고달프지만 보람 있어요. 제가 하는 일이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드라마가 끝나는 9월 희귀난치성 환우들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열 예정이다.
“국내뿐 아니라 아프리카·동남아 지역에 사는 난민에게 도움을 주는 단체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 세계적인 단체로 확대하는 게 꿈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죠. 이웃처럼 편안하고 친근한 배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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