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이는 영어 천재가 아니에요. 오히려 둔재에 가깝지요. 제가 ‘영어공부 좀 해라’ 하면 ‘엄마는 미국 사람보고 우리나라 말을 배우라고 하지, 왜 나보고 배우라고 해’ 하고 반문했을 정도죠. 영어공부를 너무 싫어했거든요. 그런 아이가 저와 함께 영어를 공부하면서부터 영어를 좋아하게 됐죠.”
최근 ‘엄마의 365일 영어 한 마디’(넥서스)를 펴낸 중앙일보 신예리 기자(37). 그는 인터뷰에 앞서 자신의 책에는 영어 영재를 위한 공부법이 아니라 영어를 너무 싫어하던 아이가 엄마와 함께 공부하면서 영어에 재미를 느끼고 자신감을 갖게 된 과정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제 딸이지만 좀 특이한 편이에요. 학원에 다니는 것도, 학습지 공부를 하는 것도 한두 달 이상 해본 적이 없어요. 학원에서 억지로 시켜서 하는 공부는 맞지 않는다면서요.”
서울대 영어영문과를 졸업, 번역서를 내기도 했고 토익에서 9백90점 만점을 받았던 신예리씨는 “차라리 중국어를 하면 했지, 영어는 하기 싫다”고 말하는 딸이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고 한다.
“어떻게 할까 고심하던 중에 순서가 뒤바뀌었음을 깨달았어요. 무작정 영어공부를 강요할 게 아니라, 실제로 왜 영어가 필요한지 느끼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신예리씨는 지현이(14)가 6학년이던 2004년 여름방학 때 보름간의 휴가를 받아 딸을 데리고 미국여행을 떠났다.
신예리씨의 작전은 효과가 있었다. 지현이는 상점에서 물건을 사거나 길을 물을 때 영어를 못해 무척 답답해했다. 친척집에 가서도 하이, 굿모닝 같은 기본적인 인사도 쑥스러워서 하지 못하는 아이는 한국말 대신 영어를 쓰는 또래 친척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딸이 ‘엄마는 영어를 잘 해서 좋겠다’면서 ‘나중에 미국에 또 놀러 가려면 영어를 하긴 해야겠더라’ 했어요. 내심 작전이 성공했구나 싶어 ‘그럼 너 영어학원 다녀볼래?’ 하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지현이는 그 후, 6학년 2학기부터 학원에 다녔다. 6개월 이상 다닌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딸이 하루에 두 시간씩 영어학원에 다니자 신예리씨도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곧 그의 생각이 잘못됐음이 드러났다.
“6학년 겨울방학에 중학생이 될 것에 대비해 학원 반 배치 시험을 쳤는데 영어성적이 엉망으로 나왔어요. 충격이었죠”.
성적이 믿어지지 않아 “얘가 이런 아이가 아닌데요?” 하며 항의를 했다. 하지만 학원에서는 “아이의 수준을 높여오지 않으면 엄마가 원하는 반에 입학시킬 수 없다”며 “성적을 인정할 수 없다면 엄마가 직접 가르치라”고 했다.
답답한 그는 지현이에게 학원에서 뭘 배웠는지 물었고, “배운 게 없다”는 답을 들어야 했다. 학원에 다닌다고 무조건 실력이 늘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신예리씨는 그때부터 지현이의 영어교육을 직접 맡았다.
집안 곳곳에 영어문장 붙여두고 모녀가 함께 외워
서점을 뒤져 영어초급 문법책과 듣기 책을 사고 주니어 영자신문을 구독했다. 말하기는 EBS ‘서바이벌 잉글리시’를 교재로 사용했다.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공부를 해보고 안되는 부분을 엄마에게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확인했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80점대의 성적이 나왔어요. 기대에 못 미쳤죠. 하지만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됐으니 욕심을 거두기로 했어요. 대신 하루 10분씩 지현이와 함께 영어를 공부했죠.”
매일 저녁 모녀가 함께 기초생활문장을 외웠다. 신예리씨는 지현이에게 문법을 외우게 하기보다는 문장을 통해 문법 감각을 익히도록 했다. 그리고 그날 공부한 문장은 포스트잇에 써서 화장실 문과 식탁 위, 현관 거울, 냉장고, 컴퓨터 등 붙일 수 있는 모든 곳에 붙였다.
“영어 단어나 표현을 암기할 때는 반복학습이 중요해요.”
메모지가 눈에 띌 때마다 지현이에게 큰 소리로 읽어보게 했고 충분히 외운 후엔 새것으로 교체했다. 신예리씨는 포스트잇을 붙이기에 최적의 장소로 화장실을 추천했다.
“사실 저 역시 학교 다닐 때부터 화장실 문이나 변기 옆 벽에 영어단어를 적어서 붙여놓곤 했어요. 짧은 시간이지만 가장 집중이 잘되는 때거든요(웃음).”
처음엔 엄마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면서 큰 소리로 ‘I didn’t mean it.(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Excellent!(훌륭해!)’ 하는 식으로 붙여놓은 영어문장을 읽었다. 그 후에는 애써 잔소리하지 않아도 지현이가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됐다고. 지현이도 이 비법을 통해 단어 암기가 수월해졌다고 한다.
신예리씨는 딱히 영어공부 시간을 정해놓고 가르치진 않았다고 한다. 짬짬이, 틈날 때마다 함께 공부를 했다는 것.
한 예로 TV 드라마에서 “네가 surgeon이 뭔지나 알아?”라는 대사가 나오면 신예리씨 역시 딸에게 확인을 했다고 한다. “너는 surgeon이 뭔지 아니?”
아이가 “외과의사”라고 답하면 그는 또 거기서 더 나아가 심화학습을 진행했다. “그럼 내과의사는?” “physician!” “치과의사는?” “dentist!” “병원은?” “hospital!” “응급상황은?” “emergency!”
그뿐 아니다. 레스토랑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도 영어공부를 한다고 한다. 메뉴판을 조금만 눈여겨보면 ‘허니 머스터드 드레싱을 얹은 치킨샐러드’와 ‘프렌치프라이를 곁들인 햄버거 스테이크’ 등과 같이 영어단어를 익힐 기회는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교육을 위해서는 영어사전이 필요하다. 종이사전이나 전자사전도 좋고 인터넷을 이용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야후나 네이버 같은 포털 사이트마다 사전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컴퓨터에 즐겨찾기해놓으면 편하다고 조언한다.
‘프렌즈’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외화 보며 엄마도 영어 실력 키우면 좋아
그렇다면 엄마의 발음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신예리씨는 무조건 원어민이 말하는 걸 많이 보고 들으라고 권한다. 자꾸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발음을 따라 하게 된다는 것. TV에서 영어회화 방송을 보거나, 뉴스를 듣는 것도 좋지만 엄마들에겐 그보다 “케이블TV에서 하는 재밌는 드라마나 토크쇼를 꾸준히 시청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한 예로 ‘프렌즈’나 ‘섹스 앤 더 시티’ 또는 ‘오프라 윈프리 쇼’ 같은 프로그램은 지루하지 않기 때문에 재미있게 볼 수 있다고.
“저는 요즘 주말마다 온스타일에서 하는 ‘길모어 걸스’라는 드라마를 즐겨 봐요. 처음엔 주인공들의 말이 하도 빨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더니, 자주 보니 아는 영어 표현들이 하나 둘씩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책에서 공부했던 표현이 실제로 드라마 주인공 입에서 나올 때 느끼는 쾌감이 쏠쏠해요.”
드라마 시청은 발음이 좋아지는 것 못지않게 생생한 구어체 표현을 익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신씨 역시 TV 드라마를 보면서 ‘Beats me.(뭔지 전혀 모르겠어)’ ‘I don’t get it.(이해가 안 가)’ ‘you’re the one.(너는 내 반쪽이야)’ 등의 영어 표현들을 배웠다고 한다. 지현이와는 성인용 드라마 대신 도널드 트럼프가 진행했던 서바이벌 프로인 ‘어프렌티스’ 같은 프로그램을 즐겨 보며 ‘you’re fired!(자넨 해고야!)’ ‘Let them in.(그들을 들여보내)’같이 매회 반복되는 영어 표현들을 외웠다고.
엄마와 공부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부할 수 있어 좋았다는 지현이.
신예리씨는 “이런 말은 영어로 뭐라고 하나”식의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영어 실력도 늘기 때문이다.
“지현이는 뜬금없는 질문을 많이 해요. 아는 건 곧장 대답해주지만, 모르는 건 사전을 찾거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답을 얻지요.”
지현이는 이제 영어에 확실히 흥미를 붙인 상태다. 1학기말 영어시험부터 1백점을 받기 시작했다고.
“(엄마에게 배우면) 영어 못한다고 눈치 볼 일도 없고, 모르는 것을 물어볼 때도 창피하지 않으니까 좋아요. 또 밥 먹다가도, TV 보다가도, 잠자기 전에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편하게 공부할 수 있어 좋고요.”
엄마와 함께 공부하면서 영어가 좋아졌다는 지현이는 현재 중2가 됐다. 장래 외교관이 되는 게 꿈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그들 모녀에게 ‘파이팅’을 외친다.
|
||||||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