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는 충무로에서 김혜수(47)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통한다. 40대 후반에도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어서다. 남성 위주의 캐릭터와 스토리가 주도하는 국내 극장가에서 ‘차이나타운’(2015)과 ‘굿바이 싱글’ (2016)로 여배우 주연작의 흥행력을 입증한 그가 또다시 여성 캐릭터가 중심인 누아르 영화 ‘미옥’으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미옥’은 범죄 조직을 재계 유력 기업으로 키워낸 언더보스 나현정이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자 마지막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을 그린다. 나현정 캐릭터를 위해 데뷔 후 처음으로 액션 연기에 도전한 김혜수를 개봉 이틀 전인 11월 7일 만났다. 은발의 쇼트커트였던 나현정의 헤어스타일은 어느새 밝은 와인색 단발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요.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각자가 지키고자 하는 소중함의 가치가 충돌하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특히 나현정이 모든 걸 버리고 떠나고 싶어 하는, 평범한 생활을 욕망하는 사람이란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여성성과 남성성이 모두 느껴지는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었어요. 누구의 아이디어인가요.
나현정은 강남에서 엄청나게 큰 뷰티 살롱을 운영하지만 실은 조직 보스의 여자이자 조직에서 아주 음험한 일을 하는 인물이에요. 감춰진 면을 분장으로 어떻게 살릴지 관계자들과 논의하다가 투 블록 쇼트커트를 제안했죠. 헤어 컬러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놓고 고민하다가 은발로 결정했고요.
촬영 당시 탈색을 자주 해 화상을 입었다고 들었어요.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 탈색을 자주 할 수밖에 없었어요. 분장으로 커버가 안 돼서요. 특히 오른쪽 머리가 워낙 짧아 탈색 약이 머리와 얼굴의 경계선을 타고 흐르면서 저온 화상을 입었죠. 그 정도는 약과예요. 현장에선 더 힘든 일도 많거든요. 다행히도 헤어 담당하는 분이 신경을 써주셔서 모발이 많이 손상되지 않았어요. 탈색을 자주 하면 머리카락이 녹을 수도 있거든요.
액션 신이 많았는데 대역을 거의 안 썼다고 들었어요.
드라마 ‘시그널’(2016)에도 범인을 검거하는 장면이 있지만, 액션 연기를 본격적으로 한 건 처음이에요. 촬영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됐는데 제 대역을 하시는 분이 정말 많은 조언을 해주셨어요. 경미한 부상은 있었지만 큰 사고 없이 잘 끝나 다행이에요.
어릴 때 태권도를 배운 건 도움이 됐나요.
싸움과 무술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하하. 저는 격투가 아닌 품새 시범단이었거든요.
태권도는 몇 단인가요.
3단요. 배울 때 1단까지 땄고 이후에 2, 3단을 땄어요.
영화의 또 다른 줄기는 사랑이었어요. 실제로는 어떤 남성상을 좋아하나요.
정해진 스타일이 없어요. 만나봐야 알아요. 제가 사귄 사람들은 공통점이 없어요. 동성 친구들도요. 스타일이나 취미가 비슷하거나 겹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이 달라요. 정서적으로 교집합이 있긴 해요. 다 따뜻해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이죠. 이성 같은 경우는 어떤 끌림에 대한 정답이 없더라고요. 전혀 생각지 않은 지점에서 끌릴 때도 있고요.
나현정처럼 평범한 삶을 갈구할 때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일하지 않을 때는 평범해요. 연예인이어서 사생활에 제한이 있다고 생각진 않아요. 제가 나현정에게 끌린 건 직업적인 연장선상에 있어서이기도 해요. 나현정이 모든 걸 버리고 끝내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건 정말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 하는 일에 회의가 오고 의구심이 들어서일 거예요. 저 역시 위치에 비해 역량이 부족하지 않은가 싶어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거든요. 지금 당장이 일을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요. 물론 늘 용기를 내니까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겠지만요.
필모그래피를 보면 도전을 즐긴다는 느낌을 받아요. 작품을고르는 기준이 있나요.
도전은 두렵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늘 공존해요. 하지만 새로움만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고르진 않아요. 최근 작품들이 나름 변화의 폭이 크다 보니까 그런 인상을 받으신 것 같아요.
극 중 인물처럼 목숨 걸고 지키고 싶은 것이 있나요.
세계 평화? 하하하. 실제 일상이 극단적이지 않아서 목숨 거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지키고 싶은 건 많죠. 신의와 양심, 약속 등도 중요하지만 특히 제 순도는 지키고 싶어요. 경험치와 순도는 다른 거거든요. 순도는 지키려는 의도가 있어야 지켜지는 것 같아요. 늘 노력해요. 굉장히 중요해요.
배우로서의 순도인가요.
배우로서는 물론이고 인간으로 서도요. 웃자고 하는 얘긴데, 촬영할 때 제 컨디션이나 외형, 체중을 유지하는 거 정말 힘들어요. 하하하.
‘건강미인’이라는 말을 30년 가까이 듣고 있어요.
제가 어릴 때 ‘건강미인’이 된 건, 다른 배우들에 비해 체격이 장군감이어서예요. 그걸 좋게 표현해주신 거죠. 실제로 건강하긴 해요. 정신도 건강한 편이고요. 근데 미인인지는 모르겠어요. 하하.
항상 당당한 매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뭘까요.
가장 중요한 건 마인드 같아요. 모든 건 마인드의 영향을 받으니까요. 그렇다고 제 마인드가 아주 훌륭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부족한 게 너무 많죠. 건강 미인이라고 하지만,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액면 그대로의 김혜수는 그런 이미지에서 약간씩 비껴가는 게 있어요. 저는 이 일을 오래 했으니까 제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관심이 없더라도 알잖아요. 그렇게 오래 본 사람에 대한 동질감, 여전히 남들보다 느린 부분도 있고 성장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건강한 모습, 그리고 제가 가진 소신을 좋게 평가해주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스스로 빠르거나 느리다고 생각하는 면은 뭔가요.
고등학생 때 ‘사모곡’이라는 드라마에 아역이 아닌 성인 역할로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러고 나서 사춘기가 그냥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20대에 사춘기가 와서 굉장히 오래갔어요. 이미 남들은 다 겪어서 다른 단계에 있을 때요. 그리고 너무 개인적인 얘기긴 하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한 이후에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다 보니 배우로서의 자아도 뒤늦게 잡혔어요.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겪어야 하는 감정들도 저는 들쭉날쭉했어요. 어떤 감정은 제 또래보다 앞서 경험하고, 또 일반적으로 겪어야 하는 감정은 그냥 지나 가버린 경우도 있고요. 제대로 차곡차곡 쌓여야 보편적인 것들이 갖춰지는데, 제 안에는 불균형한 것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떤 건 조숙하지만 어떤 건 굉장히 뒤처져 있고, 미흡하고 미숙한 것들이 많았죠.
혼란스러웠겠네요.
아주 어릴 땐 혼란스러운 것도 몰랐어요. 혼란이라는 걸 느낄 정서 상태도 안 돼 있었던 거죠. 아이니까, 단순하니까. 그러다가 크게 왔죠.
사춘기에 정신적 성장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준 작품은요.
한 작품으로는 설명이 안 돼요. 기간 자체가 길어서요. 저한테 영향을 준 작품도 있고, 사람도 있고, 말도 있어요. 결정적인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이 영향을 끼친 것같아요. 작품을 같이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영향을 줬을 수도 있고요.
영화나 드라마를 매개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배우는 점도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많죠. 작품을 통해 매번 낯선 인생을 간접 경험하면서 당장은 아니더라도 뒤늦게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있어요. 캐릭터를 표현 하면서 제 편협함을 객관적으로 보게 될 때도있고요. 그런 게 쌓이다 보면 사고의 폭이 넓어져 작품을 할때도 제 역할만이 아니라 전체 그림을 인지하게 되더라고요.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은 뭔가요.
전반적으로 뭔가 정해놓질 않아요. 어릴 땐 좌우명이 있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누가 물어보면 ‘아, 이런 것도 생각해서 만들어야 하는구나’ 싶었거든요. 정직하게는, 제가 의도하고 계획한 대로 살아내는 게 아니었던 거죠. 저는 스스로 노력해서 얻고 싶은 게 아닐 땐 오픈 마인드를 가져요. 그러면 부지불식간에 얻게 되는 게 많더라고요. 많은 노력을 해도 요만큼밖에 못 느꼈다가 정말 예상치 않은 데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거든요.
살다 보면 힘들 때 꺼내서 곱씹어보게 되는 말이 있지 않나요.
그런 건 있어요. 이를테면 ‘내 인생에 굉장한 영향을 끼친 말’ 같은 거요. 예전에는 매니저가 아니라 기사 아저씨, 엄마와 함께 다녔는데, 그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서운 사람이 엄마였어요. 대학생들이 연애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제 첫사랑과 몰래 만났는데, 상대가 약속 장소에 늦게 왔어요. “밥 먹었니?”라고 묻기에 “혼자서 밥을 어떻게 먹어?” 그랬죠. 그 사람은 기억을 못 할 수도 있지만, 그때 그가 이렇게 답했어요. “혼자 밥을 못 먹으면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해!”라고요. 그게 별 뜻 없이 한 말일지도 몰라요. 근데 그 말이 제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모토가 됐어요. 직업상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주변에 참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할 수 있는 건 혼자서 해내자는 주의예요.
작품에 임할 때 감독이 요구하는 대로 하는 스타일인가요. 아니면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는 스타일인가요.
그때그때 다른 것 같아요. 일단 감독의 디렉팅을 다 받아요. 제가 전체 상황을 다 이해하고 있더라도 저는 일부이기 때문에, 디렉터의 의견을 설령 제가 못 해내더라도 받아들이긴 해요. 제가 피력할 만한 의견이 있으면 말씀드리고요.
최근 ‘촬영 현장 성추행’ 논란이 있었어요. ‘연기인가, 성추행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 입장이세요.
제가 그 현장에 있지 않아서 섣불리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당사자들이 가장 명확하게 알 거예요.
그런 일이 최근 많아졌어요.
예전에도 많이 있었을 거예요. 다만 최근에 드러나 그렇게 느끼시는 걸 거예요.
요즘 영화계에 여성 원 톱 배우가 없다고들 하는데, 동감하나요.
상업 영화들의 시나리오를 보면 여배우가 할 만한 캐릭터가 많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규모가 작은 작품들을 통해 끊임없는 시도가이뤄지고 있고요. 개중엔 작품의 완성도가 좋았던 영화도 있고,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도 있었어요. 이건 단지 작가에게 “여자 이야기를 써주세요”라고 요구하는 데서 그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여성의 캐릭터를 영화에서 어떻게 다루느냐, 얼마나 존재 가치가 있고 필요한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여성 원 톱이건 투 톱이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캐릭터여야 해요. 이런 고민과 개선 노력이 쌓이다 보면 다른 기대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성 캐릭터는 할 게 많다고 하지만 너무 반복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효과적으로, 질적으로 다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기자가 장수할 수 있는 건 작품을 통해 질리지 않는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32년 차 배우 김혜수도 그런 평가를 받는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세월이 흘러도 지금의 향기를 오롯이 간직하기를 바라며 그에게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을 묻자, “정직한것,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이 들어서 좋아지는 점이 분명히 있죠. 나이 들어서 절대가질 수 없는 것도 분명 있고요. 더 이상 누릴 수 없고 가질 수없는 것들을 아쉬워하거나 바라지 않아요. 나이 드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지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지도 않고요. 나이 듦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맞설 필요 없고, 역행할 필요 없는 자연의 순리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나이 드는 게 마냥 좋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배우로서 나이 들어 폭이 넓어지는 것도 있고, 좁아지는 것도 있죠.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적으로 나아지는 부분도 있지만 제한되는 부분도 있듯이요. 어떤 때는거울 앞의 제 모습이 보기 싫을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세월과 더불어 뭔가 알아가는 것이 눈물 나도록 감사할 때도 있어요.”
그는 영화만 편식하는 배우는 아니다. ‘시그널’ 이후 들어온 많은 드라마 대본도 영화와 같은 선상에 놓고 검토하는데 아직 출연이 확정된 작품은 없다. 안방극장의 관객들이 궁금해하는 드라마 복귀 시점은 그가 “많이 용기를 낼 수 있는 작품을 만났을 때”다.
designer 김영화
사진제공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 강영호 작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요.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각자가 지키고자 하는 소중함의 가치가 충돌하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특히 나현정이 모든 걸 버리고 떠나고 싶어 하는, 평범한 생활을 욕망하는 사람이란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여성성과 남성성이 모두 느껴지는 헤어스타일이 인상적이었어요. 누구의 아이디어인가요.
나현정은 강남에서 엄청나게 큰 뷰티 살롱을 운영하지만 실은 조직 보스의 여자이자 조직에서 아주 음험한 일을 하는 인물이에요. 감춰진 면을 분장으로 어떻게 살릴지 관계자들과 논의하다가 투 블록 쇼트커트를 제안했죠. 헤어 컬러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놓고 고민하다가 은발로 결정했고요.
촬영 당시 탈색을 자주 해 화상을 입었다고 들었어요.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 탈색을 자주 할 수밖에 없었어요. 분장으로 커버가 안 돼서요. 특히 오른쪽 머리가 워낙 짧아 탈색 약이 머리와 얼굴의 경계선을 타고 흐르면서 저온 화상을 입었죠. 그 정도는 약과예요. 현장에선 더 힘든 일도 많거든요. 다행히도 헤어 담당하는 분이 신경을 써주셔서 모발이 많이 손상되지 않았어요. 탈색을 자주 하면 머리카락이 녹을 수도 있거든요.
액션 신이 많았는데 대역을 거의 안 썼다고 들었어요.
드라마 ‘시그널’(2016)에도 범인을 검거하는 장면이 있지만, 액션 연기를 본격적으로 한 건 처음이에요. 촬영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됐는데 제 대역을 하시는 분이 정말 많은 조언을 해주셨어요. 경미한 부상은 있었지만 큰 사고 없이 잘 끝나 다행이에요.
어릴 때 태권도를 배운 건 도움이 됐나요.
싸움과 무술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하하. 저는 격투가 아닌 품새 시범단이었거든요.
태권도는 몇 단인가요.
3단요. 배울 때 1단까지 땄고 이후에 2, 3단을 땄어요.
영화의 또 다른 줄기는 사랑이었어요. 실제로는 어떤 남성상을 좋아하나요.
정해진 스타일이 없어요. 만나봐야 알아요. 제가 사귄 사람들은 공통점이 없어요. 동성 친구들도요. 스타일이나 취미가 비슷하거나 겹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이 달라요. 정서적으로 교집합이 있긴 해요. 다 따뜻해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이죠. 이성 같은 경우는 어떤 끌림에 대한 정답이 없더라고요. 전혀 생각지 않은 지점에서 끌릴 때도 있고요.
나현정처럼 평범한 삶을 갈구할 때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일하지 않을 때는 평범해요. 연예인이어서 사생활에 제한이 있다고 생각진 않아요. 제가 나현정에게 끌린 건 직업적인 연장선상에 있어서이기도 해요. 나현정이 모든 걸 버리고 끝내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건 정말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 하는 일에 회의가 오고 의구심이 들어서일 거예요. 저 역시 위치에 비해 역량이 부족하지 않은가 싶어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거든요. 지금 당장이 일을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고요. 물론 늘 용기를 내니까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겠지만요.
필모그래피를 보면 도전을 즐긴다는 느낌을 받아요. 작품을고르는 기준이 있나요.
도전은 두렵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늘 공존해요. 하지만 새로움만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고르진 않아요. 최근 작품들이 나름 변화의 폭이 크다 보니까 그런 인상을 받으신 것 같아요.
극 중 인물처럼 목숨 걸고 지키고 싶은 것이 있나요.
세계 평화? 하하하. 실제 일상이 극단적이지 않아서 목숨 거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지키고 싶은 건 많죠. 신의와 양심, 약속 등도 중요하지만 특히 제 순도는 지키고 싶어요. 경험치와 순도는 다른 거거든요. 순도는 지키려는 의도가 있어야 지켜지는 것 같아요. 늘 노력해요. 굉장히 중요해요.
배우로서의 순도인가요.
배우로서는 물론이고 인간으로 서도요. 웃자고 하는 얘긴데, 촬영할 때 제 컨디션이나 외형, 체중을 유지하는 거 정말 힘들어요. 하하하.
‘건강미인’이라는 말을 30년 가까이 듣고 있어요.
제가 어릴 때 ‘건강미인’이 된 건, 다른 배우들에 비해 체격이 장군감이어서예요. 그걸 좋게 표현해주신 거죠. 실제로 건강하긴 해요. 정신도 건강한 편이고요. 근데 미인인지는 모르겠어요. 하하.
항상 당당한 매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뭘까요.
가장 중요한 건 마인드 같아요. 모든 건 마인드의 영향을 받으니까요. 그렇다고 제 마인드가 아주 훌륭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부족한 게 너무 많죠. 건강 미인이라고 하지만,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액면 그대로의 김혜수는 그런 이미지에서 약간씩 비껴가는 게 있어요. 저는 이 일을 오래 했으니까 제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관심이 없더라도 알잖아요. 그렇게 오래 본 사람에 대한 동질감, 여전히 남들보다 느린 부분도 있고 성장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건강한 모습, 그리고 제가 가진 소신을 좋게 평가해주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스스로 빠르거나 느리다고 생각하는 면은 뭔가요.
고등학생 때 ‘사모곡’이라는 드라마에 아역이 아닌 성인 역할로 출연한 적이 있어요. 그러고 나서 사춘기가 그냥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20대에 사춘기가 와서 굉장히 오래갔어요. 이미 남들은 다 겪어서 다른 단계에 있을 때요. 그리고 너무 개인적인 얘기긴 하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한 이후에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다 보니 배우로서의 자아도 뒤늦게 잡혔어요.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겪어야 하는 감정들도 저는 들쭉날쭉했어요. 어떤 감정은 제 또래보다 앞서 경험하고, 또 일반적으로 겪어야 하는 감정은 그냥 지나 가버린 경우도 있고요. 제대로 차곡차곡 쌓여야 보편적인 것들이 갖춰지는데, 제 안에는 불균형한 것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떤 건 조숙하지만 어떤 건 굉장히 뒤처져 있고, 미흡하고 미숙한 것들이 많았죠.
혼란스러웠겠네요.
아주 어릴 땐 혼란스러운 것도 몰랐어요. 혼란이라는 걸 느낄 정서 상태도 안 돼 있었던 거죠. 아이니까, 단순하니까. 그러다가 크게 왔죠.
사춘기에 정신적 성장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준 작품은요.
한 작품으로는 설명이 안 돼요. 기간 자체가 길어서요. 저한테 영향을 준 작품도 있고, 사람도 있고, 말도 있어요. 결정적인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이 영향을 끼친 것같아요. 작품을 같이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영향을 줬을 수도 있고요.
영화나 드라마를 매개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배우는 점도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많죠. 작품을 통해 매번 낯선 인생을 간접 경험하면서 당장은 아니더라도 뒤늦게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있어요. 캐릭터를 표현 하면서 제 편협함을 객관적으로 보게 될 때도있고요. 그런 게 쌓이다 보면 사고의 폭이 넓어져 작품을 할때도 제 역할만이 아니라 전체 그림을 인지하게 되더라고요.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은 뭔가요.
전반적으로 뭔가 정해놓질 않아요. 어릴 땐 좌우명이 있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누가 물어보면 ‘아, 이런 것도 생각해서 만들어야 하는구나’ 싶었거든요. 정직하게는, 제가 의도하고 계획한 대로 살아내는 게 아니었던 거죠. 저는 스스로 노력해서 얻고 싶은 게 아닐 땐 오픈 마인드를 가져요. 그러면 부지불식간에 얻게 되는 게 많더라고요. 많은 노력을 해도 요만큼밖에 못 느꼈다가 정말 예상치 않은 데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거든요.
살다 보면 힘들 때 꺼내서 곱씹어보게 되는 말이 있지 않나요.
그런 건 있어요. 이를테면 ‘내 인생에 굉장한 영향을 끼친 말’ 같은 거요. 예전에는 매니저가 아니라 기사 아저씨, 엄마와 함께 다녔는데, 그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서운 사람이 엄마였어요. 대학생들이 연애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제 첫사랑과 몰래 만났는데, 상대가 약속 장소에 늦게 왔어요. “밥 먹었니?”라고 묻기에 “혼자서 밥을 어떻게 먹어?” 그랬죠. 그 사람은 기억을 못 할 수도 있지만, 그때 그가 이렇게 답했어요. “혼자 밥을 못 먹으면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해!”라고요. 그게 별 뜻 없이 한 말일지도 몰라요. 근데 그 말이 제 인생에 굉장히 중요한 모토가 됐어요. 직업상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주변에 참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할 수 있는 건 혼자서 해내자는 주의예요.
작품에 임할 때 감독이 요구하는 대로 하는 스타일인가요. 아니면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는 스타일인가요.
그때그때 다른 것 같아요. 일단 감독의 디렉팅을 다 받아요. 제가 전체 상황을 다 이해하고 있더라도 저는 일부이기 때문에, 디렉터의 의견을 설령 제가 못 해내더라도 받아들이긴 해요. 제가 피력할 만한 의견이 있으면 말씀드리고요.
최근 ‘촬영 현장 성추행’ 논란이 있었어요. ‘연기인가, 성추행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어떤 입장이세요.
제가 그 현장에 있지 않아서 섣불리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당사자들이 가장 명확하게 알 거예요.
그런 일이 최근 많아졌어요.
예전에도 많이 있었을 거예요. 다만 최근에 드러나 그렇게 느끼시는 걸 거예요.
요즘 영화계에 여성 원 톱 배우가 없다고들 하는데, 동감하나요.
상업 영화들의 시나리오를 보면 여배우가 할 만한 캐릭터가 많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규모가 작은 작품들을 통해 끊임없는 시도가이뤄지고 있고요. 개중엔 작품의 완성도가 좋았던 영화도 있고,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도 있었어요. 이건 단지 작가에게 “여자 이야기를 써주세요”라고 요구하는 데서 그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여성의 캐릭터를 영화에서 어떻게 다루느냐, 얼마나 존재 가치가 있고 필요한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여성 원 톱이건 투 톱이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캐릭터여야 해요. 이런 고민과 개선 노력이 쌓이다 보면 다른 기대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성 캐릭터는 할 게 많다고 하지만 너무 반복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효과적으로, 질적으로 다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연기자가 장수할 수 있는 건 작품을 통해 질리지 않는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32년 차 배우 김혜수도 그런 평가를 받는이들 가운데 한 명이다. 세월이 흘러도 지금의 향기를 오롯이 간직하기를 바라며 그에게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을 묻자, “정직한것,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이 들어서 좋아지는 점이 분명히 있죠. 나이 들어서 절대가질 수 없는 것도 분명 있고요. 더 이상 누릴 수 없고 가질 수없는 것들을 아쉬워하거나 바라지 않아요. 나이 드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지도, 그 속에서 의미를 찾지도 않고요. 나이 듦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맞설 필요 없고, 역행할 필요 없는 자연의 순리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나이 드는 게 마냥 좋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배우로서 나이 들어 폭이 넓어지는 것도 있고, 좁아지는 것도 있죠.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적으로 나아지는 부분도 있지만 제한되는 부분도 있듯이요. 어떤 때는거울 앞의 제 모습이 보기 싫을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세월과 더불어 뭔가 알아가는 것이 눈물 나도록 감사할 때도 있어요.”
그는 영화만 편식하는 배우는 아니다. ‘시그널’ 이후 들어온 많은 드라마 대본도 영화와 같은 선상에 놓고 검토하는데 아직 출연이 확정된 작품은 없다. 안방극장의 관객들이 궁금해하는 드라마 복귀 시점은 그가 “많이 용기를 낼 수 있는 작품을 만났을 때”다.
designer 김영화
사진제공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 강영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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