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2016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여자연기상 부문에 김하늘(39)의 이름이 호명됐다. 드라마 〈공항 가는 길〉에서 워킹맘으로 살며 새로운 로맨스에 빠진 ‘수아’를 연기한 그녀는 ‘불륜’이라는 주제를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수상대에 오른 그녀는 해당 캐릭터를 선택하기까지 했던 배우로서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준 방송 관계자와 스태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돌이켜보면, ‘김하늘’ 하면 떠오르는 것은 ‘로맨스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였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부터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히트작들은 줄곧 멜로에 적절히 코미디를 곁들인 장르들이 많았다. 히트작들의 공통점을 또 한 가지 꼽아보자면 그녀가 맡은 캐릭터의 극중 직업이 ‘선생님’이라는 거였다. 살면서 사고 한번 내지 않을 것 같은 반듯함과 빈말은 죽어도 못할 것 같은 정직함이 김하늘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보면, 그녀에게 1월 4일 개봉한 영화 〈여교사〉의 ‘효주’는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수아보다 몇 배는 더 힘든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국민 선생님’이자 ‘멜로 퀸’으로 통하던 김하늘이 모멸감과 질투로 가득 찬 비정규직 선생님으로 분해 치정 멜로를 선보인다니 이만한 파격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영화 〈여교사〉의 개봉 이튿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김하늘과 마주했다. 인터뷰는 영화의 파격적인 엔딩 신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 영화 엔딩을 보고 너무 놀랐어요. 결국 효주가 자신에게 모멸감을 줬던 정규직 교사 혜영에게 복수하는 장면요.
너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냐고들 하시는데, 저는 효주가 혜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엔딩 장면을 촬영하면서 너무 통쾌했죠. 효주는 메마르고 앙상한데, 혜영은 어디서든 반짝반짝 빛나는 친구잖아요. 제가 만일 효주였다면 혜영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인데, 그 장면을 찍을 때 힘들진 않았나요.
유일하게 액션이 나오는 부분이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찍을 땐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혜영 역을 맡은 유인영 씨 손톱에 다리가 전부 긁혔더라고요(웃음). 액션을 하면서 표정 연기도 해야 해서 특히 공을 많이 들인 장면이에요.
▼ 힘들게 촬영한 영화를 완성작으로 만난 기분은 어땠나요.
영화 촬영은 재작년에 했어요. 저도 이번에야 완성작을 봤는데 예상치 못한 장면이 많더라고요. 제 연기지만 목소리의 떨림이나 숨소리, 눈동자의 움직임까지도 낯설게 느껴졌어요. 특히 제자인 재하가 “나는 당신을 좋아한 게 아니다. 너란 사람 되게 싫어” 하고 말하는 장면부터 동료 교사인 혜영에게 달려가 다급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에 비친 효주의 불안한 표정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새삼 ‘그때 내가 정말 작품에 많이 몰입했었구나’ 싶었어요.
▼ 화장도 거의 안 하고 화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더라고요.
처음 스타일 시안을 정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너무 ‘초췌한 거지’처럼 나오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요(웃음). 그런데 감독님은 제가 무슨 옷을 입고 와도 예쁘다고만 해주시더라고요. 적당히 타협점을 찾아서 디자인이 심플하고 톤은 다운된 의상들로 콘셉트를 정했죠. 완성작을 보고 나니 욕심 부리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제가 예뻐 보이려고 화장을 더 진하게 했다든지, 조금이라도 멋을 부렸다면 후회했을 것 같아요.
▼ 전작인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수아 역시 비슷한 캐릭터였죠.
〈여교사〉의 효주에 비하면 〈공항 가는 길〉의 수아는 행복한 편이죠. 효주는 겉으로는 자존감이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안은 한없이 꼬여 있어요. 삶 자체가 불쌍하죠. 지금껏 만난 캐릭터 중 가장 안타깝고 연민이 드는 인물이에요.
▼ 영화 속에 그려지는 효주의 감정은 ‘질투’ ‘모멸감’과 같은 것들이에요. 배우 김하늘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 있나요.
그걸 안 느껴보고 산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도 종종 그런 감정이 들 때가 있어요. 다른 배우의 작품을 보며 ‘아, 저 배역이 내겐 왜 오지 않았을까’ ‘내가 아직 너무 닫혀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다른 여자 연예인의 드레스며 립스틱 색깔이 궁금해질 때도 있죠. 다만 지금은 많이 성숙했고,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알아요. 단순히 열등감이나 질투로 남겨두지 않고 긍정적으로 트레이닝하는 방법을 깨우친 거죠. 배우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 것 같아요. 그게 작품 안에서 빛나는 배우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 혹시 주변에 혜영과 같은 사람이 있나요. 질투 날 정도로 반짝거려서 남에게 자격지심을 안겨주는 사람.
분명 있었을 거예요. 나쁜 의도는 없는데 곁에 두고 보면 얄미운 그런 친구. 그런데 기억이 안 나요. 아마 자연스럽게 그런 친구들을 멀리해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어쩌면 현실에선 제가 누군가에게 혜영과 같은 존재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 효주 역을 처음 제안받았을 땐 어땠나요.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생각은 했지만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 하고 많이 망설였어요. 무엇보다 ‘대체 감독님은 왜 내게 이 시나리오를 주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컸죠. 감독님을 만나자마자 “효주를 보고 왜 저를 떠올리셨어요?” 하고 물었죠. 감독님 말이, 예전에 제가 게스트로 출연했던 SBS 〈힐링캠프〉에서 저의 새로운 모습을 보셨대요. 그러면서 그 느낌을 끄집어내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남들은 발견하지 못한 제 모습을 봐주셨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 선생님 역할만 여섯 번째라면서요. 이쯤 하면 ‘국민 선생님’인데, 제자를 두고 치정극을 벌인다는 설정이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영화 제목도 〈여교사〉인 데다 교사와 학생이 사랑을 나누는 신도 등장하긴 하죠. 하지만 전 스승과 제자의 사랑보다는 효주라는 인물의 감정 선에 더 초점을 맞추고 연기하려고 했어요. 효주는 가진 것도 없고, 친구도 없어요. 남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탐탁지 않은 한심한 백수죠. 기댈 곳이 아무 곳도 없는 셈이에요. 결국 재하에게 욕구가 분출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 감독과 생각이 다를 땐 그 간극을 어떻게 메웠나요.
감독님이 열린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어요. 효주의 감정을 이해하고 연기하는 건 어디까지나 배우의 몫이잖아요. 저는 효주가 재하에게 서서히 빠져 들어가는 느낌으로 연기했는데, 감독님은 재하에게 어느 순간 푹 빠진 효주를 생각하셨더라고요. 촬영 중간 중간 효주의 감정 변화와 관련해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합의점을 찾아나갔죠.
▼ 캐릭터에 푹 빠지면 캐릭터의 감정이 배우에게 전이되기도 하잖아요.
맞아요.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캐릭터가 당한 일이 꼭 제가 실제로 당한 일처럼 느껴지곤 하죠. 대부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만 맡아왔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아서 연기하면서 참 새롭게 다가왔어요. 예전엔 극 중 캐릭터의 감정이 촬영 전후까지도 지속됐는데 이번 영화를 찍을 땐 다행히 비교적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우울해지지 않도록 스태프들이 ‘예쁘다’ ‘멋지다’는 식으로 늘 칭찬을 해주기도 했고, 아무래도 제가 결혼(2016년 3월)을 앞두고 있던 때라 더 그러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촬영장에 갔다가 돌아오면 금방 씻어낼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모니터링을 하거나 영화 스틸 장면을 보면 여전히 가슴은 아파요.
▼ 남편은 이번 작품을 보고 뭐라고 하던가요.
VIP 시사회 때 초대했는데 영화를 보고는 정말 대단하다고 했어요. 사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너무 재미있다며 남편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여교사〉의 스토리를 이야기해줬어요. “신선하다” “재밌다” 하면서 맞장구는 쳐줬는데, 사실 남편은 일반인이라 제 연기나 시나리오와 관련해 크게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진 않더라고요. 신이 나서 스토리를 설명하는 제 모습을 재밌어하더라고요(웃음).
▼ 남편을 만나고 나서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진 느낌이에요.
그동안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사실 여배우에게 로맨틱 코미디보다 좋은 장르는 없죠.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일 수 있고, 흥행 성공 확률도 높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배우로서 연기의 폭을 넓히고 싶은 욕심이 큰 것 같아요. 흥행이나 관심도 측면에서는 떨어질 수 있지만 그게 제가 오래 연기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배우 김하늘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라면 제 선택에 박수 쳐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 그렇게 도전한 작품 〈공항 가는 길〉로 수상까지 했어요.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 어떻게 자축했나요.
이전에도 드라마로 몇 번 상을 받긴 했는데 이번엔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어요. 남편이 있으면서도 또 다른 사랑을 하는 수아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걱정이 컸거든요. 비록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많은 분들의 응원 댓글을 보면서 힘을 얻었던 것 같아요. 특히나 ‘망 봐주는 커플’이라는 댓글이 가장 인상적이었죠(웃음). 이번에 상을 받으면서는 스스로를 격려하기보다 시청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장 전하고 싶었어요.
▼ 연예계에 데뷔한 지 20년이 넘었어요. 20년 전의 김하늘과 지금의 김하늘은 어떤 점이 가장 다른가요.
어머! 정말 그 정도 됐네요(웃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안이 많이 단단해졌어요. 그때는 연기가 뭔지, 내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조차도 몰랐어요. 내 안에 이는 감정의 본질이 뭔지도 몰랐죠. 그런데 지금은 ‘배우 김하늘’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 또 ‘인간 김하늘’을 찾은 기분이 들어요.
▼ 〈여교사〉가 생각보다 저조한 스코어를 기록하고 있어요. 아쉬움은 없나요.
시청률이나 관객수에 연연하지 않겠다곤 하지만, 안타깝긴 하죠. ‘문제작’ ‘파격’이라는 수식어로 영화의 본질이 가려지는 것 같아 아쉬워요. 제게 〈여교사〉의 효주는 정말 ‘아픈 손가락’이에요. 그런데 전 그 친구를 만나서 참 좋았어요. 누가 뭐래도 배우 김하늘에게는 파격적인 작품이자, 파격적인 캐릭터니까요.
▼ 신혼의 달콤함 때문에 로코에는 눈이 안 가는 것 아닐까요.
글쎄요. 원래 제 성향이 밝은 편이라 신혼 생활 자체가 로맨틱코미디인 건 맞죠(웃음).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어요. 로코물이 들어오긴 하는데 요즘은 또 다른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낯선 제 모습이 저도 무척 기다려지거든요. 아, 그렇다고 로코를 전혀 안 하겠단 의미는 아니니 오해 말아주세요(웃음).
“현실이 로코”라는 배우 김하늘의 팔레트엔 이제 여러 빛깔의 물감들이 추가됐다. 그녀가 그려낼 다음 그림이 궁금한 이유다.
사진제공 외유내강
디자인 최정미
돌이켜보면, ‘김하늘’ 하면 떠오르는 것은 ‘로맨스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였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부터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히트작들은 줄곧 멜로에 적절히 코미디를 곁들인 장르들이 많았다. 히트작들의 공통점을 또 한 가지 꼽아보자면 그녀가 맡은 캐릭터의 극중 직업이 ‘선생님’이라는 거였다. 살면서 사고 한번 내지 않을 것 같은 반듯함과 빈말은 죽어도 못할 것 같은 정직함이 김하늘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보면, 그녀에게 1월 4일 개봉한 영화 〈여교사〉의 ‘효주’는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수아보다 몇 배는 더 힘든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국민 선생님’이자 ‘멜로 퀸’으로 통하던 김하늘이 모멸감과 질투로 가득 찬 비정규직 선생님으로 분해 치정 멜로를 선보인다니 이만한 파격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영화 〈여교사〉의 개봉 이튿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김하늘과 마주했다. 인터뷰는 영화의 파격적인 엔딩 신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 영화 엔딩을 보고 너무 놀랐어요. 결국 효주가 자신에게 모멸감을 줬던 정규직 교사 혜영에게 복수하는 장면요.
너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냐고들 하시는데, 저는 효주가 혜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엔딩 장면을 촬영하면서 너무 통쾌했죠. 효주는 메마르고 앙상한데, 혜영은 어디서든 반짝반짝 빛나는 친구잖아요. 제가 만일 효주였다면 혜영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인데, 그 장면을 찍을 때 힘들진 않았나요.
유일하게 액션이 나오는 부분이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찍을 땐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혜영 역을 맡은 유인영 씨 손톱에 다리가 전부 긁혔더라고요(웃음). 액션을 하면서 표정 연기도 해야 해서 특히 공을 많이 들인 장면이에요.
▼ 힘들게 촬영한 영화를 완성작으로 만난 기분은 어땠나요.
영화 촬영은 재작년에 했어요. 저도 이번에야 완성작을 봤는데 예상치 못한 장면이 많더라고요. 제 연기지만 목소리의 떨림이나 숨소리, 눈동자의 움직임까지도 낯설게 느껴졌어요. 특히 제자인 재하가 “나는 당신을 좋아한 게 아니다. 너란 사람 되게 싫어” 하고 말하는 장면부터 동료 교사인 혜영에게 달려가 다급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에 비친 효주의 불안한 표정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새삼 ‘그때 내가 정말 작품에 많이 몰입했었구나’ 싶었어요.
▼ 화장도 거의 안 하고 화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더라고요.
처음 스타일 시안을 정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너무 ‘초췌한 거지’처럼 나오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요(웃음). 그런데 감독님은 제가 무슨 옷을 입고 와도 예쁘다고만 해주시더라고요. 적당히 타협점을 찾아서 디자인이 심플하고 톤은 다운된 의상들로 콘셉트를 정했죠. 완성작을 보고 나니 욕심 부리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제가 예뻐 보이려고 화장을 더 진하게 했다든지, 조금이라도 멋을 부렸다면 후회했을 것 같아요.
▼ 전작인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수아 역시 비슷한 캐릭터였죠.
〈여교사〉의 효주에 비하면 〈공항 가는 길〉의 수아는 행복한 편이죠. 효주는 겉으로는 자존감이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안은 한없이 꼬여 있어요. 삶 자체가 불쌍하죠. 지금껏 만난 캐릭터 중 가장 안타깝고 연민이 드는 인물이에요.
▼ 영화 속에 그려지는 효주의 감정은 ‘질투’ ‘모멸감’과 같은 것들이에요. 배우 김하늘도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 있나요.
그걸 안 느껴보고 산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도 종종 그런 감정이 들 때가 있어요. 다른 배우의 작품을 보며 ‘아, 저 배역이 내겐 왜 오지 않았을까’ ‘내가 아직 너무 닫혀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다른 여자 연예인의 드레스며 립스틱 색깔이 궁금해질 때도 있죠. 다만 지금은 많이 성숙했고,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알아요. 단순히 열등감이나 질투로 남겨두지 않고 긍정적으로 트레이닝하는 방법을 깨우친 거죠. 배우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 것 같아요. 그게 작품 안에서 빛나는 배우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 혹시 주변에 혜영과 같은 사람이 있나요. 질투 날 정도로 반짝거려서 남에게 자격지심을 안겨주는 사람.
분명 있었을 거예요. 나쁜 의도는 없는데 곁에 두고 보면 얄미운 그런 친구. 그런데 기억이 안 나요. 아마 자연스럽게 그런 친구들을 멀리해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어쩌면 현실에선 제가 누군가에게 혜영과 같은 존재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 효주 역을 처음 제안받았을 땐 어땠나요.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생각은 했지만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 하고 많이 망설였어요. 무엇보다 ‘대체 감독님은 왜 내게 이 시나리오를 주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컸죠. 감독님을 만나자마자 “효주를 보고 왜 저를 떠올리셨어요?” 하고 물었죠. 감독님 말이, 예전에 제가 게스트로 출연했던 SBS 〈힐링캠프〉에서 저의 새로운 모습을 보셨대요. 그러면서 그 느낌을 끄집어내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남들은 발견하지 못한 제 모습을 봐주셨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 선생님 역할만 여섯 번째라면서요. 이쯤 하면 ‘국민 선생님’인데, 제자를 두고 치정극을 벌인다는 설정이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영화 제목도 〈여교사〉인 데다 교사와 학생이 사랑을 나누는 신도 등장하긴 하죠. 하지만 전 스승과 제자의 사랑보다는 효주라는 인물의 감정 선에 더 초점을 맞추고 연기하려고 했어요. 효주는 가진 것도 없고, 친구도 없어요. 남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탐탁지 않은 한심한 백수죠. 기댈 곳이 아무 곳도 없는 셈이에요. 결국 재하에게 욕구가 분출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 감독과 생각이 다를 땐 그 간극을 어떻게 메웠나요.
감독님이 열린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어요. 효주의 감정을 이해하고 연기하는 건 어디까지나 배우의 몫이잖아요. 저는 효주가 재하에게 서서히 빠져 들어가는 느낌으로 연기했는데, 감독님은 재하에게 어느 순간 푹 빠진 효주를 생각하셨더라고요. 촬영 중간 중간 효주의 감정 변화와 관련해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합의점을 찾아나갔죠.
▼ 캐릭터에 푹 빠지면 캐릭터의 감정이 배우에게 전이되기도 하잖아요.
맞아요.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캐릭터가 당한 일이 꼭 제가 실제로 당한 일처럼 느껴지곤 하죠. 대부분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캐릭터만 맡아왔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아서 연기하면서 참 새롭게 다가왔어요. 예전엔 극 중 캐릭터의 감정이 촬영 전후까지도 지속됐는데 이번 영화를 찍을 땐 다행히 비교적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우울해지지 않도록 스태프들이 ‘예쁘다’ ‘멋지다’는 식으로 늘 칭찬을 해주기도 했고, 아무래도 제가 결혼(2016년 3월)을 앞두고 있던 때라 더 그러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촬영장에 갔다가 돌아오면 금방 씻어낼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모니터링을 하거나 영화 스틸 장면을 보면 여전히 가슴은 아파요.
▼ 남편은 이번 작품을 보고 뭐라고 하던가요.
VIP 시사회 때 초대했는데 영화를 보고는 정말 대단하다고 했어요. 사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너무 재미있다며 남편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여교사〉의 스토리를 이야기해줬어요. “신선하다” “재밌다” 하면서 맞장구는 쳐줬는데, 사실 남편은 일반인이라 제 연기나 시나리오와 관련해 크게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진 않더라고요. 신이 나서 스토리를 설명하는 제 모습을 재밌어하더라고요(웃음).
▼ 남편을 만나고 나서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진 느낌이에요.
그동안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사실 여배우에게 로맨틱 코미디보다 좋은 장르는 없죠.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일 수 있고, 흥행 성공 확률도 높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배우로서 연기의 폭을 넓히고 싶은 욕심이 큰 것 같아요. 흥행이나 관심도 측면에서는 떨어질 수 있지만 그게 제가 오래 연기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배우 김하늘을 좋아해주시는 분들이라면 제 선택에 박수 쳐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 그렇게 도전한 작품 〈공항 가는 길〉로 수상까지 했어요.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 어떻게 자축했나요.
이전에도 드라마로 몇 번 상을 받긴 했는데 이번엔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어요. 남편이 있으면서도 또 다른 사랑을 하는 수아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걱정이 컸거든요. 비록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많은 분들의 응원 댓글을 보면서 힘을 얻었던 것 같아요. 특히나 ‘망 봐주는 커플’이라는 댓글이 가장 인상적이었죠(웃음). 이번에 상을 받으면서는 스스로를 격려하기보다 시청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장 전하고 싶었어요.
▼ 연예계에 데뷔한 지 20년이 넘었어요. 20년 전의 김하늘과 지금의 김하늘은 어떤 점이 가장 다른가요.
어머! 정말 그 정도 됐네요(웃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안이 많이 단단해졌어요. 그때는 연기가 뭔지, 내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조차도 몰랐어요. 내 안에 이는 감정의 본질이 뭔지도 몰랐죠. 그런데 지금은 ‘배우 김하늘’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 또 ‘인간 김하늘’을 찾은 기분이 들어요.
▼ 〈여교사〉가 생각보다 저조한 스코어를 기록하고 있어요. 아쉬움은 없나요.
시청률이나 관객수에 연연하지 않겠다곤 하지만, 안타깝긴 하죠. ‘문제작’ ‘파격’이라는 수식어로 영화의 본질이 가려지는 것 같아 아쉬워요. 제게 〈여교사〉의 효주는 정말 ‘아픈 손가락’이에요. 그런데 전 그 친구를 만나서 참 좋았어요. 누가 뭐래도 배우 김하늘에게는 파격적인 작품이자, 파격적인 캐릭터니까요.
▼ 신혼의 달콤함 때문에 로코에는 눈이 안 가는 것 아닐까요.
글쎄요. 원래 제 성향이 밝은 편이라 신혼 생활 자체가 로맨틱코미디인 건 맞죠(웃음).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어요. 로코물이 들어오긴 하는데 요즘은 또 다른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낯선 제 모습이 저도 무척 기다려지거든요. 아, 그렇다고 로코를 전혀 안 하겠단 의미는 아니니 오해 말아주세요(웃음).
“현실이 로코”라는 배우 김하늘의 팔레트엔 이제 여러 빛깔의 물감들이 추가됐다. 그녀가 그려낼 다음 그림이 궁금한 이유다.
사진제공 외유내강
디자인 최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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