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에서 태어나 대학 연극 동아리에서 처음 연기를 접한 그가 본격적으로 배우를 꿈꾼 건 직장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결국 퇴사를 결심하고 극단에 들어갔으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대사가 거의 없는 단역만 맡았고, 연기를 못해서 할머니 역할을 전담해야 했던 시절도 길었다. KBS 예능 프로그램 ‘스펀지’에 재연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표준어가 익숙하지 않아 사투리 연기를 해야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 30분씩 서울말 연습을 하고, 작은 역할도 정성을 다해 쌓아 올렸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빛을 발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주연을 맡았고, 현실과 환상을 오가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성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많은 이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을 비롯한 각종 영화제 신인 여우상을 휩쓴 그는 이후 드라마 ‘서른, 아홉’ ‘신성한, 이혼’ ‘경성크리처’ ‘나쁜엄마’ 등에서 신스틸러로 활약하며 대중이 신뢰하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지금껏 강말금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그의 이름처럼 맑고 선할 것이란 고정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폭싹 속았수다’에서 부산으로 몰래 신혼여행을 온 물정 모르는 애순(아이유)과 관식(박보검)에게 “부산 인심 쥑이지예?”라는 대사를 날리며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제대로 알려주는 여관집 주인 역을 거쳐, 영화 ‘로비’에서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한다. 배우 하정우가 ‘롤러코스터’와 ‘허삼관’에 이어 세 번째로 메가폰을 잡은 ‘로비’는 스타트업 대표 창욱(하정우)이 4조 원짜리 국책사업을 따내기 위해 골프 로비를 벌이는 와중에 벌어지는 대환장 파티를 담은 B급 블랙 코미디. 강말금은 업체 선정에 관한 실권을 쥔 조향숙 국토부 장관 역을 맡아 닳고 닳은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창욱의 라이벌 회사 광우(박병은)가 이끄는 팀의 접대를 받으며 이혼 조정 중인 남편이자 또 다른 실세 최 실장(김의성)과 기싸움을 한다. 영화 ‘로비’는 하정우 작품 특유의 말맛에 하정우, 강말금, 김의성, 박해수, 이동휘, 차주영, 최시원 등 대세 배우들이 이름을 걸고 작정하고 펼치는 연기 배틀이 관전 포인트다. ‘로비’ 개봉을 앞두고 만난 강말금은 부산 억양이 남아 있는 나긋한 말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한편의 모노드라마 같기도 한 그의 스토리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하정우 감독, 모니터 너머로 따뜻한 사랑 전해져”
극 중 조 장관 캐릭터가 실제 있을 법한 인물처럼 보이는데, 참고한 모델이 있는지.특정한 한 사람을 참고했다기보다는, 다양한 정치인들을 참고했다. 감독님이 “우아하게, 고급스럽게”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정작 대사는 굉장히 강하고 거칠었다(웃음). “내가 조향숙이야, 조향숙이”라는 대사는 영화 ‘범죄와의 전쟁’ 속 최민식 선배님 대사를 빌려 표현한 거다.
하정우 감독이 강말금 배우에게 이 역할을 맡긴 이유가 뭘까.
감독님을 처음 만난 건 청룡영화제에서였다. 수상 소감으로 “누군가의 꿈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문장으로 요악하면 이런데, 실제로는 되게 복잡하게 얘기했었다. 그런데 하정우 감독님이 그걸 대번에 알아듣고, 배우라는 직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졌다고 했다. 시상식 때 내가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우아했고, 기품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마 그때 조 장관을 맡겨도 되겠다, 생각하신 것 같다. 감독님이 시나리오 작업도 직접 하셨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로비’의 한 줄을 떠올렸을 테고, 그런 작품의 얼굴로 연기할 수 있어 행복했다.
하정우 감독이 연기에 대해 따로 당부한 부분도 있나.
나는 좀 느린 사람이라서, 말은 상황에 따라 느려도 리액션 포인트가 좀 빠르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리딩 현장에서 감독님이 요즘 유머를 보여주면서 “이런 속도로 연기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내가 가지지 않은 부분이라서 많은 참고가 됐고, 공부도 됐다.
‘로비’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고 들었다. 배우들 팀워크도 좋아 보이는데, 비결이 있나.
감독님이 배우들의 캐릭터를 세심하게 살려주셨다. 포스터만 봐도, 한 명씩 얼굴을 다 넣을 정도로 캐릭터를 향한 애정이 크다. 사실 편집됐지만 캐디들의 에필로그도 있었다. 모든 것을 고려한 편집이라는 게 느껴졌다. 첫 촬영을 할 때 연기 잘하는 감독님이기 때문에 모니터에서 나의 무엇을 볼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본인이 연기를 잘하면 못하는 사람은 눈에 얼마나 띄겠나. 그런데 한순간도 평가받고 있다고 느끼게 한 적이 없다. 배우가 컨디션에 따라 잘되는 날이 있고 아닌 날이 있다는 걸 잘 알고 계신다. 악으로, 깡으로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자꾸 감독님을 찬양하게 되는데(웃음), 배우의 에너지를 끌어올려 주는 분이다. 현장은 워낙 변수가 많은데, 감독님은 유연하게 늘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상대방에게 영감을 준다. 그 힘의 근원이 뭘까를 생각해봤는데 ‘사랑’인 것 같다. 모니터를 볼 때도 눈빛이 따뜻한 게 느껴진다.
감독 말고 배우 하정우에 대한 평가도 궁금한데.
나는 연기할 때 계산이 잘 안 되는 편이다. 순간에 집중해서 하는 스타일인데, 하정우 배우님은 템포와 톤이 일정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작품을 볼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균형감 있게 연기할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된다.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최시원은 현장에서 너무 웃기더라. 어떻게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 망가진 연기를 잘하는지. 약간 승부욕을 불러일으키더라. 차주영은 사람이 참 다정하다. 박병은 배우는 나서는 스타일은 아닌데 리액션으로 계속 웃기는 스타일이다. 촬영장은 거의 전쟁이다. 김의성 선배님, 이동휘 배우 모두 다 너무 재치 있다.

연이은 빌런 연기, 처음이라 더 신나
‘폭싹 속았수다’에서 맡은 여관집 주인 역할도 강렬했다.대본을 보자마자 ‘이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 그런 분이 계셨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기도 하는. 내가 아무리 오버하거나 날뛰어도 그 실존 인물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연기했다. 그동안 주인공의 조력자 역할을 주로 맡았고 그걸로 사랑도 많이 받아 좋았지만, 빌런 역할은 처음이다. 안 해봤던 거라 더 신나게 연기했다.
부산이 고향인데, ‘폭싹 속았수다’와 ‘로비’에서 마침 모두 부산 사투리로 연기를 한다.
서울말보다 부산 사투리가 편하다. 사투리에는 정서가 들어가 있고, 실제 정치인 중에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그래서 ‘로비’에서도 사투리를 쓰는 장관으로 설정하자고 제안했는데 감독님이 흔쾌히 받아주셨다.
극 중 골프 스윙이 제대로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작품을 위해 골프 연습은 얼마나 했나.
처음엔 완전 초보였다. 대본에 “내가 라베 81이야”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처음엔 ‘라베’(라이프 베스트 스코어)가 뭔지도 몰랐다. 사실 캐릭터 자체가 골프를 못 쳐도 본인이 잘 친다고 우기면 되는 인물이라 연습을 이렇게나 많이 안 해도 됐는데, 평소 휘두르는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다 보니 따라가려 남들보다 더 많이 연습했던 것 같다. 원하는 시간에 골프장에 가서 연습할 수 있도록 해주셨는데, 오른쪽 팔꿈치가 아파서 중간에 멈췄다. 그래도 촬영할 땐 최대한 멋있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5년 전 배우 김신록 씨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서울말 배우기’와 ‘꽃밭 가꾸기’를 한다고 했는데, 지금도 계속하고 있나.
서울말 배우기는 3년 동안 하루 30분씩 했다. 오래 공을 들여야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 지금도 표준어 연기는 어렵다. 요즘은 매일 한다기보다는 촬영 전에 연습하면 글을 말로 변환할 때 도움이 된다. ‘나쁜 엄마’ 때는 충청도 사투리로 연기했다. 충청도 사람이 나오는 유튜브를 따라 하기도 했었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 꽃밭 가꾸기는 예전엔 살던 동네에선 가능했는데, 지금 사는 곳은 밭을 만들 수 없어서 화분 정도만 키우고 있다.
강말금이란 이름은 원래 친구의 필명이었다고.
나는 20대가 가장 암울했다. 돌이켜보면 진단을 받진 않았지만 우울증도 있었던 것 같다. 본명으로 배우를 시작하기엔 너무 약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름에 받침이 있으면 누군가 받쳐주는 사람이 생긴다’는 미신 같은 속설도 있었고, 촌스러운 이름으로 이미지를 밀어보자는 생각도 들어 친구가 더 이상 쓰지 않는 필명으로 극단에 들어갔다. 처음엔 좀 민망했는데, 그 이름으로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고 심지어 ‘금말’이라고 바꿔서도 부르더라. 처음엔 초라했던 이 이름이 10년 만에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을 줄은 몰랐다.

“연기 못해 할머니 배역만 맡기도… 느리지만 포기하진 않아”
다른 일을 하다가 배우로 전업했는데, 처음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나.대학 동아리 ‘극예술연구회’에서 연극을 하며 처음 연기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때 맡았던 역할이 가엾은 소년이었는데, 그 인물을 연기하면서 마음이 너무 아프고 한편 행복했다. 이후 현실적인 이유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게 됐다. 오지혜 선배님이 마지막 장면에서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르는데, 그걸 보면서 너무 부러웠고 ‘나도 저런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그런 사실조차 잊고 지내다가 2019년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부산국제영화제에 갔을 때 ‘아, 그때 그랬었지’ 하면서 기억이 났다.
배우로서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흠이 많은 배우다. 그런데 ‘찬실이는 복도 많지’ 덕분에 단점도 예쁘게 봐주시는 행운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극단에 들어갔을 때는 대사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기를 너무 못했기 때문에 대사를 줄 수 없었던 거다. 그러다 한 5년 후부터 사투리 연기, 할머니 역할로 무대에 섰다. 원래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차주영 배우처럼 키가 크는 거’ 빼곤 조금씩 노력해서 바꿔가는 힘과 마음가짐이 생겼다(웃음).
배우로서 꾸준히 활동하게 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배우라는 직업은 실패 가능성도 있지만 되게 멋진 일이다. 정답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야 그 끝에 꽃이 피든 열매가 열리든 한다. 나는 재능이나 순발력은 없지만, 그나마 잘하는 건 해석 쪽이다. 좋은 텍스트를 받아서 나만의 해석으로 깊이를 더할 수 있다면, 그게 배우로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로 밥벌이를 하고 사랑도 받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 내가 연기로 돈을 벌지 못할 때도 어떤 분이 “너는 평생 살 동아줄을 쥐었구나”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0대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는데, 지금의 강말금이 20대의 강말금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때 떠나길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시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들었는데, 사표를 낼 용기가 없었다. 상사에게 솔직하게 털어놨더니 서울에 있는 자리를 추천해주셨다. 내가 떠난다고 했을 때 엄마가 너무 마음 아파하셨다. 근데 그 선택이 없었다면 배우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때의 나에게 “잘했어. 그때 떠났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다.
강말금 스스로의 말처럼 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성도를 높여가는 배우다.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마치 실재하는 인물처럼 다가온다. 영화든, 드라마든 그가 등장하는 순간 장면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건 단순히 연출의 힘이 아니라, 그가 쌓아온 내공과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늦게 핀 그가 누구보다 단단한 비결이자, ‘강말금이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작품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이유다.
#강말금 #하정우 #여성동아
사진제공 넷플릭스 쇼박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