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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actress

엄지원 기묘한 배우

EDITOR 김지영 기자

2019. 03. 14

배우 엄지원의 몸에는 한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다. 천생 여자일 것만 같은 느낌인데 선머슴처럼 털털하게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여왕의 보석도 시골 아낙의 슬리퍼도 신체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극한직업’의 흥행 돌풍이 극장가를 휩쓰는 가운데 2월 13일 또 한 편의 코미디 영화가 개봉됐다.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좀비 영화의 공식을 깬 ‘기묘한 가족’이다. 망해버린 주유소를 재건하기 위해 좀비의 피를 판매하는 가족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배우들은 재기 발랄한 연기로 스토리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관객을 쥐락펴락한다. 그중에서도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독보적인 존재는 바로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무표정으로 초지일관하는 배우 엄지원(42)이다. 

그녀는 뽀글이 파마에 몸뻬 차림으로 촌티를 팍팍 내는 만삭의 주유소 집 큰며느리 남주로 출연해 왕년에 놀아본 언니에게서나 나올 법한 포스로 관객의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그런데 개봉 직전 기자와 마주한 그녀는 영화 속 센 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수줍은 소녀 같았다. 현재 방영 중인 MBC 드라마 ‘봄이 오나 봄’에서 그녀가 맡은, 방송국 앵커와 몸이 바뀐 은퇴한 톱 배우 ‘이봄’ 캐릭터와도 결이 달랐다.

이민재 감독이 처음부터 엄지원 씨를 큰며느리 역으로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더군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의아했어요. 저의 어떤 점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신 걸까 싶어서요(웃음). 그러다가 이 작품에서 제가 좋아하는 영화 ‘조용한 가족’과 흡사한 유머 코드가 느껴졌어요. 가족 중 남자는 시끄럽고 여자는 시크하게 표현돼 있는 점도 흥미로웠고요. 출연 결정을 하고 난 뒤로는 남주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 역시 즐거움의 연속이었죠.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은요. 


남주는 연기로 존재감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아니어서 외모에 더 큰 비중을 뒀어요. 익숙한 느낌이 아닌 ‘저 사람이 엄지원이었나’ 싶을 정도로 다른 결을 살리고 싶었어요. 



영화 속 비주얼은 만족스러운가요. 

정말 야심 차게 준비한 비주얼인데 제가 기대한 만큼의 큰 변화가 없어 보여서 좀 실망했어요. 전문가들과 함께 의상 및 헤어 시안을 공유하면서 콘셉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었거든요. 리얼리티를 살리려고 프린트 패턴 치마를 입을 때도 시골 장터에서 산 아우터와 조끼를 매치했어요. 제 딴엔 특이한 디자인을 고른 줄 알았는데 그 동네에선 흔한 스타일이었어요. 무뚝뚝하고 시크한 여자지만 귀여운 느낌을 주려고 목에 스카프를 매기도 했고요. 특히 신경 쓴 부분이 헤어예요. 온갖 가발을 다 써봤죠. 

가발이었군요. 정말 자연스럽던데요. 

두상에 맞게 제작돼서 그럴 거예요. 매니저와 함께 배우들에게 수소문해서 찾아낸 서울 여의도의 한 가발 명가에서 만들었죠. 거기서 수많은 가발을 써본 끝에 영감을 받아 컬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남주의 연애 시절이나 학창 시절 같은 과거 회상 신이 들어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반응이 많아요. 남주는 왠지 날라리 학생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하지 않은 건 일종의 전략이에요. 이번 작품이 잘돼서 2탄을 찍게 되면 그때 전사를 넣기로 했어요. 대신 배우들끼리 전사를 만들었는데 재미있었어요. ‘남주는 학교 다닐 때 욕의 달인이었을 거다. 남학생들도 벌벌 기는 센 언니였을 거다. 작은 마을이니까 민걸이(김남길)랑 남주랑 동창이었는데 남주가 민걸이 형인 준걸이(정재영)에게 꽂혀 같이 살게 됐고, 그런 둘을 보기 싫어 민걸이가 서울로 갔을 거다’라고요. 하하하. 

실제 성격은 어떤가요. 그동안 했던 역할 중 닮은 캐릭터가 있나요. 

진짜 닮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연기한 역할은 모두 제 안의 어떤 모습을 꺼내 구현한 인물이지만 저랑 꼭 닮은 캐릭터는 아직 못 만났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조용조용한 성격이고 사람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 ‘집순이’예요. 영화를 충북 보은군에서 3개월간 먹고 자며 찍었는데 촬영이 없을 때도 저는 주로 숙소를 지켰어요. 다른 배우들은 장터에 자주 나가 엄청 인기를 끌었고요. 

이수경(주유소 집 막내 해걸 역) 씨와 몰래 치킨 시켜 먹고 인증샷 찍다 딱 걸렸다면서요. 

아, 제가 그랬나요. 모든 걸 같이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하하. 

남주는 돈만 생기면 금고에 넣는 생활력의 끝판왕이에요. 본인은 어떤가요. 

살기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돈에 집착하진 않아요. 열심히 연기해서 번 돈을 쓰고 남으면 금고 말고 은행에 넣죠(웃음). 남주도 돈에 집착하기보단 대박이(배속 아가의 태명)를 잘 키우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경제권을 틀어쥐고 있는 거예요. 머니가 파워니까 ‘다 내 밑으로 드루와’ 하는 식으로요(웃음). 

임신부 역할은 영화 ‘소원’에 이어 두 번째예요. 아기 낳는 장면이 스치듯 지나가 아쉽지 않았나요. 

그게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어요. 엉뚱한 가족들이 겪는 해프닝을 그린 영화여서 저도 상투적인 모성애로 흐르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그 장면에서 역시 감정을 덜어내려고 애썼어요. 남주의 쿨한 온도가 지켜질 수 있게요. 

좀비 떼를 보고 놀라서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어요. 

좀비 분장을 한 사람들이 밀고 들어왔는데 그 모습이 너무 진짜 같아 화들짝 놀랐어요. 수경이와 황급히 도망치다 그만 손가락이 낀 채로 주유소 문을 닫고 말았죠. 계속 아파서 나중에 병원 가보니 골절됐다고 하더라고요. 그 장면에서의 수경이랑 제 얼굴이 정말 못생겼어요. 부상 덕분에 살아 있는 표정이 나온 셈이죠(웃음). 

이번 작품의 영향으로 ‘봄이 오나 봄’에 출연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건 아니에요. 영화 ‘미씽: 사라진 여자’(2016)에서 감정 소모를 많이 했어요. 다른 톤의 연기를 통해 배우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때 ‘기묘한 가족’의 출연 제의가 들어왔어요. 예전에 ‘박수건달’(2013)이라는 코미디 영화를 재미있게 찍은 기억이 있어 그런 기대감에서 출연했죠. 그리고 ‘봄이 오나 봄’은 ‘기묘한 가족’과는 상관없이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하면 좋겠다 싶어 선택한 작품이에요. 영화 개봉 시기가 드라마 방영 기간과 이렇게 겹칠 줄은 몰랐어요.

엄지원은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를 지낸 엄이웅 한도엔지니어링 회장의 둘째 딸로 197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대 1학년 때 서울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찍힌 사진이 패션 잡지에 실리면서 연예계와 인연을 맺게 됐다. 배우로 데뷔한 건 1998년 KBS 시트콤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의 단역을 맡으면서다. 이후 TV와 스크린에서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영화 ‘소원’ ‘미씽: 사라진 여자’ 등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과 올해의 영화인상 연기상 등을 수상하는 기쁨도 맛봤다. 2014년에는 ‘오기사’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에세이 작가이자 건축가인 오영욱 오기사디자인 대표와 웨딩마치를 울렸다.

드라마보다는 영화에서, 멜로보다는 스릴러 장르에서 연기가 더 돋보인다는 평이 있어요.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뭔가요. 

스릴러를 원래 좋아해요. 스릴러물의 캐릭터들은 연기하기에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장르를 가리진 않아요.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예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것으로 작업을 함께하는 사람들, 나중에 볼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는 것 같아요. 

결혼하고 나서 배우로서 달라진 게 있다면요. 

맡은 배역의 캐릭터를 저 자신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에서 그 인물을 바라보는 지점이라든지,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좀 더 성숙해진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들이 자연인 엄지원도 더욱 성숙해지도록 좋은 자극을 주죠. 

본인이 지향하는 삶으로 인도해주는 나침반 같은 좌우명은요. 

(곰곰이 생각하더니) 모든 사람은 죽음에 이르고, 그 끝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오늘을 잘 살아내려고 해요.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후회 없이 살자’고 되뇌면서요. 

이번 작품을 찍으면서 ‘왜 그랬지?’ 하는 아쉬움이나 후회가 든 적이 없나요. 

‘쫑비(좀비의 극 중 애칭)’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의기투합한 기념으로 주유소 가족이 다 같이 거실에 모여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이 있어요. 당시가 한겨울이라 무척 추웠는데 세트 바닥에 보일러가 깔려 있었어요. 영화 ‘고령화 가족’ 세트 바닥에 보일러를 깔았더니 배우들 연기가 달라지더라는 얘기를 공효진 씨에게 듣고 전했더니 고맙게도 세트를 지으면서 참고했더라고요. 문제는 보일러를 켜는 스위치와 온도 조절기가 무거운 냉장고 뒤에 있어서 무용지물이었다는 거예요. 딱 한 번 보일러를 튼 적이 있는데 발전 장치에 과부하가 걸려 ‘셧 다운’ 되더군요. 그렇게 슬프고 안타까운 상황에서 가족 만찬 장면을 찍었는데 바닥이 얼음장 같은데도 배우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애드리브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정말 훈훈하고 재미있었어요. 남주는 무뚝뚝하고 시크한 인물이라서 감정을 절제해야 했는데 그 신에서만큼은 저도 웃기고 싶은 열망이 불끈 솟더라고요. 그냥 애드리브를 할 걸 그랬어요. 

제작진의 배려에 감동하려고 했는데 반전이 있었군요(웃음). 지방이나 해외에서 촬영할 때는 집을 오래 비울 수밖에 없을 텐데 남편은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편인가요. 

그럼요. 일이니까요. 그게 제 직업이고요. 

배우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21년째로 접어들었어요. 배우 엄지원에게 대중이 갖는 기대감이 부담이 되거나 버겁지는 않나요. 


연기를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선배님들의 말씀을 어릴 땐 흘려들었는데 그 얘기가 맞더라고요. 머릿속에 그리던 연기를 제 표현이 못 따라가는 느낌이어서 저를 지켜보는 대중의 관심과 기대가 부담이 되기보단 송구한 마음이 커요. 연기는 자기를 깨부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자기를 깨서 그 안에 숨어 있는 다른 것을 찾아 끄집어내는 과정의 연속이랄까요. 원래 제 성격은 터프하거나 와일드하지 않아요. ‘기묘한 가족’을 10년 전에 하라고 했으면 못 했을 거예요.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해서요. 저 스스로 포장하고 싶은 면을 허물고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한 덕분에 지금까지 이 일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를 돌아보면 아직 트레이닝이 덜 되고 더 깨야 할 것들이 있더라고요. 앞으로 제 자신을 얼마나 더 깊이 깨고, 어떤 새로운 면을 끄집어낼 수 있을지가 저 스스로도 기대됩니다. 하하하.

디자인 김영화 사진제공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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