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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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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이 필요한 순간, 이서진

EDITOR-FASHION 최은초롱 기자 EDITOR-FEATURE 이나래

2018. 10. 25

나영석 PD가 던져주는 얼토당토않은 과제들을 척척 해결하는 이서진. 점점 난도가 높아지는 인생의 과제들도 자신만의 지혜와 속도로 풀어내고 있었다.



브라운 슈트 로드앤테일러.

브라운 슈트 로드앤테일러.

짐꾼으로 유럽 여행을 떠나는가 싶더니(‘꽃보다 할배’), 시골집 아궁이 앞에서 끼니를 걱정하고(‘삼시세끼’), 어엿한 식당을 차려 장사 수완을 발휘하기도(‘윤식당’) 했다. 지난 수년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기로 이서진(47)을 따를 사람이 없다. 한시도 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던 그가 돌연 한 칸짜리 영화 세트장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궁금해졌다. 수백 킬로미터를 하루 밤낮에 넘나들던 이가 문득 공간을 옮긴 이유가 말이다. 10월 31일 개봉하는 영화 ‘완벽한 타인’의 홍보를 위해 시간을 쪼개 쓰던 그에게 프러포즈를 건넸고, 꼭 1년 만에 조우할 수 있었다. 지난해 이어 올해 85주년까지 2년 연속 ‘여성동아’ 창간 기념호의 커버맨이 되어준 그를 표지 촬영 현장에서 만났다. 

촬영을 위해 모인 수많은 스태프의 눈이 막 카메라 앞에 선 이서진에게 모였다. 셔터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다양한 포즈가 물 흐르듯 펼쳐졌다. 별다른 디렉션이 필요 없을 만큼 숙련된 피사체의 몸짓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포토그래퍼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이후에 발견됐다. 카메라가 켜졌을 때 나타났던 오라가 자연스럽게 풀어져 흩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슬그머니 감춰지는 에너지의 정체는 바로, 그가 발휘하는 집중력이었다. 

“세트장이나 촬영장은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라 좋아요. 영화 ‘완벽한 타인’의 경우에도 식탁 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은 터라, 한 달 가까이 세트장에서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거든요. 오늘 촬영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예능 촬영이랑 비교하긴 어려워요. 여행 프로그램의 경우 시간을 잘게 쪼개 써야 하고 이동도 많죠. 수십 명의 스태프가 함께 움직이려면 정신없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바쁘게 움직여야 시청자들께 보여드릴 수 있는 장면이 많아져요. 어느 쪽을 더 선호한다기보다는 각각의 장점을 즐기는 편이에요.” 

이처럼 모범 답안 같은 대답이 또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가 과거에 가졌던 ‘도회적이고 스마트한 이미지’나, 지금 가지고 있는 ‘겉으로는 툴툴대지만 속정 깊은 이미지’ 모두에 공통적으로 적당히 바람직한 원칙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그는 꽤 모범생에 가깝다. 연장자를 깍듯하게 모시고 나영석 PD가 던지는 얼토당토않은 과제를 기를 쓰고 풀어내고, 후배들이 부딪힌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 말이다. 그런데 동년배 사이에서는 어떨까? 



“굳이 나서는 스타일은 아니고, 한발 뒤로 물러서 있는 스타일이랄까요. 이번 영화 ‘완벽한 타인’ 촬영 현장에 비슷한 또래가 많았어요. 유해진·염정아· 김지수 씨 모두 한두 살 차이고, 조진웅 씨는 서너 살 차이였어요. 또래가 모이니 즐겁더라고요. 매일 저녁을 함께 먹었어요. 배우들 간의 호흡이 중요한 영화라 대화를 많이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게다가 촬영을 전라도 광주에서 했거든요. 맛있는 음식점이 워낙 많아서 저녁 식사 장소를 정하는 게 제 역할이었어요. 귀찮은 건 괜찮지만 늘어지는 건 딱 질색이거든요. 빨리빨리 결정이 이뤄지는 게 좋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서진은 솔루션을 찾는 사람, 즉 해결사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영석 PD를 출제자의 자리에, 이서진은 응시자의 자리에 놓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들은 점점 난도를 높여가며 챌린지를 벌이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PD와 배우라기보다는 친한 형과 동생 사이가 되어 만나면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메울 뿐이라지만, 원래 페르소나라는 것이 감독의 또 다른 자아이니 굳이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좋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나영석 PD도 그렇고 이번에 ‘완벽한 타인’을 함께한 이재규 감독도 마찬가지죠. 만나서 별다른 얘기를 하지도 않아요. 일상이나 근황 같은 대화만 잔뜩 주고받죠. 오래된 인연이 가진 힘일 수도 있어요. 이재규 감독은 2003년 드라마 ‘다모’를 함께한 후 그 인연으로 꾸준히 만나왔거든요. 영화 얘기를 한다고 만나서 시나리오를 주고는 정작 배역은 안 알려주고 헤어졌어요. 그다음 날 전화로 듣긴 했지만(웃음). 그래도 이 사람이 제안을 했을 때는 나한테 어울릴 만한 역할일 거란 신뢰가 있는 거죠.” 

이런 절대적인 신뢰가 아니고서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이서진을 움직이기란 쉽지 않다. 데뷔 20년을 앞둔 지금, 영화와 드라마를 합쳐 열일곱 편의 필모그래피를 기록하고 있는 그는 스스로를 저속 운행 중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할지 선택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마음에 꼭 들어서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솟아야 움직이는 스타일이거든요. 책임감도 큰 영향을 끼쳐요. 지금의 제게는 주어진 역할이 있거든요. 주인공으로 저를 캐스팅할 때, 감독이나 영화 관계자들이 제게 기대하는 몫이랄까요? 그런 면에서는 나이 드는 게 기대되기도 해요. 꼭 주인공이 아니어도 된다면, 좀 더 자유롭게 배역을 선택하고 과감하게 연기할 수 있겠죠. 분량은 적어져도 작품 수는 늘어나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요?” 

‘꽃보다 할배’가 그에게 미친 영향인 걸까. 그는 ‘좀 더 나이가 들면’이라는 가정법을 자주 썼다. 시간을 묶어두고 싶어하는 많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잖아요. 이번에 ‘꽃보다 할배 리턴즈’를 하면서 생각이 많이 변한 걸 느꼈어요. 예전에는 백일섭 선생님이 힘들어하시면, 마음은 안타깝지만 촬영 일정부터 걱정됐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모든 사람이 똑같이 움직일 수는 없더라고요. 내가 건강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건강할 수도 없고, 모두가 천편일률적인 속도에 맞춰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속도가 빠른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고, 건강한 사람도 있고 아픈 사람도 있고, 부지런히 달리는 사람도 있고 느긋하게 걷는 사람도 있고. 그 모두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게 결국 발전된 사회잖아요.” 

촬영장에서 함께한 반나절 동안 그는 우리에게 그간 알려진 여러 가지 모습을 두루 보여주었다. 처음 만난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젠틀맨이었고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온 편한 스태프에게는 적당히 장난스러운 형 또는 오빠로 변신했다. 셔터가 터지는 순간에는 매력적인 미소를, 답변이 필요한 순간에는 잘 고른 단어를 건네주는 그에게서 프로페셔널의 향기가 짙게 느껴졌다. 하지만 인터뷰를 마친 지금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은 그가 인터뷰 동안 되풀이해 말했던 ‘좀 더 나이가 든’ 이서진의 모습이다. 완벽하게 달리기 위해 속력을 조절해온 그가 이제까지 도전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코스에 접어드는 순간이 되면, 안정적이었던 그의 주행이 폭발적으로 변모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날을 위해 이토록 바쁘게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세계의 토대를 닦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김영준 디자인 김영화 영상 김아라 PD 제품협찬 로드앤테일러 헤어 성효진(수퍼센스에이) 
메이크업 조해영(에이바이봄) 의상 스타일리스트 권혜미 셋트 스타일리스트 최새롬 어시스트 이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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