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에는 사업 수완 좋은 이들이 꽤 많다. 손지창(42)도 빼놓을 수 없다. 2004년 연기활동을 중단하고 이벤트 사업에 뛰어든 그는 어느덧 24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어엿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올해 회사의 목표 매출액이 80억~100억원 정도라고 하니, 그저 명맥만 이어가는 사업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벤트 회사가 안착기에 접어들자 얼마 전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빵집 ‘베이커(Vaker) 107’을 개업한 것.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있음에도 인근 주민들에 의해 ‘손지창이 운영하는 빵집’으로 금세 소문이 퍼졌다. 실제로 손지창은 새벽 5시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가게가 문을 닫는 저녁 8시까지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기자가 매장을 방문했을 때도 손지창은 주황색 앞치마를 두르고 빵을 사러 온 손님들을 일일이 응대했다. 그중에는 손지창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함께 찍자고 부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한 손에 영수증을 들고 통장 내역을 살피는 모습에서 사업가의 포스가 느껴졌다. 그가 신사업으로 빵집을 택한 건 수익 창출만이 목표가 아닌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워낙 빵을 좋아해서 3년 전 처남에게 제과제빵 자격증을 따놓으라고 했더니 6개월 만에 따더라고요. 그 말에 책임도 져야 해서 2년 동안 준비해 6월 초 오픈했어요. 그보다 40대가 되니까 사업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바뀌더라고요. 돈도 중요하지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빵을 만들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믿고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들기로 결심했죠. 요즘 뉴스 보면 음식으로 장난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내 아이한테 먹이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못할 거예요.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다고 생각했던 터라 원료에 많은 공을 들여요. 빵에 들어가는 우유는 한 목장에서만 짠 유기농 우유를, 달걀은 천안에 있는 작은 양계장에서 생산한 유기농 달걀을 사용해요. 팥도 중국산이 아닌 충남 당진에서 농사지은 것으로 매일 아침 직접 매장에서 소를 만들죠. 재료만큼은 정말 자신 있어요.”
아이들에게 자신 있게 먹일 수 있는 빵만 만든다
좋은 빵을 만들기 위해 그는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다녔다. 소시지 빵에 넣을 소시지를 찾기 위해 음식박람회에 참석해 하루 종일 소시지를 맛보기도 했다. 밀가루도 빵의 종류에 따라 프랑스산, 이태리산, 캐나다산을 골고루 사용하고, 녹차빵에 들어가는 녹차가루는 국내산에 비해 색과 향이 강한 일본산 말차를 수입해 쓰고 있다. 재료의 품질을 몇 번이고 강조하는 손지창은 “우유 목장이나 양계장 등 재료를 공급받는 업체는 조만간 불시에 점검을 해서 다시 한 번 품질을 확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베이커 107에서 빵을 만드는 셰프는 그의 처남을 포함해 총 4명. 이들은 가게 오픈 전 일본 오사카로 2박3일 연수를 떠나 그곳에서 맛있고 질 좋은 빵을 직접 시식해보며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 역시 얼마 전 아내 오연수(41)와 일본 도쿄로 빵 시식 투어를 다녀왔다고. 요즘도 하루에 몇 번씩 아이들과 함께 매장을 들르는 오연수는 빵 이름을 짓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매장 인테리어가 모던해서 빵 이름은 재미있는 걸로 지었어요. 드라마나 노래 제목을 패러디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아내가 그때부터 속사포로 빵 이름을 읊더라고요(웃음). ‘한지붕 네모닝’ ‘코코넛 속에 비친 살구’ ‘더 블루’ ‘더킹 소시지’ ‘올리브의 유혹’ 등의 빵은 그렇게 탄생했어요.”
그가 처음 사업에 손을 댄 건 2000년. 당시 붐이었던 벤처기업의 간접홍보를 전문으로 하는 PPL(Product Placement) 대행업을 시작해 나이키, 모토로라, 코카콜라와 같은 다국적 기업들과 스타 마케팅을 시도했다. 하지만 2003년 같이 일하던 직원들이 한꺼번에 떠나면서 사업은큰 시련을 맞기도 했다. 손지창은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 에베레스트산을 넘어서 이후에 만난 설악산, 지리산 정도는 산도 아니더라”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그 일로 회사가 폐업 지경에 이르자 그는 결국 사업과 연예활동 중 하나만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나니 마음을 다잡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요. 이대로 그만둘까 고민도 했지만 그동안 뒤에서 사업한다고 비아냥대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니까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서 이대로 사업을 그만둘 수 없었어요. 마침 그때 둘째가 태어났는데 아내는 계속 연기를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앞으로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제가 직접 스케줄을 조절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손지창은 ‘엄마의 마음으로 아빠가 만든 빵’이란 슬로건을 걸고 유기농 빵집을 개업했다.
연기는 내 길 아니다 판단하고 사업에 매진
사업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그는 2004년 방송활동을 접었다. 우연히 알게 된 한 직원과 허름한 사무실을 얻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당시 연봉 2천5백만원을 받고 일을 시작한 직원은 현재는 연봉 1억원이 넘는 이사로 재직 중이다. 손지창은 “그 친구를 통해 대기업들이 문화 마케팅 차원에서 추진하던 고객 프로모션 등을 맡으며 내공을 쌓았다”고 말했다. 이후 회사는 기업 포상관광과 미팅, 기업회의 등으로 마이스(MICE) 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2006년에는 제약회사인 바이엘 차이나가 제주도에서 1천6백 명 규모의 포상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할 기획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과감히 도전해 큰 성과를 이뤄냈다. 그 행사를 시작으로 현재는 융합관광 외에 포스코, 롯데카드, NH카드 등 기업회의와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마이스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 베이커리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본 사업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손지창은 이른 새벽 매장에 나와 문닫는 시간까지 손님을 맞이한다.
“사업을 하면서 ‘내려놓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 손안의 모래를 움켜잡으면 잡을수록 밖으로 빠져나가듯이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놓아버려야 다 내 것이 되더라고요.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저한테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속으로 저 인간을 어떻게 혼내줄까 하고 적개심에 불탔는데, 이제는 ‘나도 혹시 예전에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고 반성하게 되죠. 그러니까 제 마음도 훨씬 편안해지더라고요. 사업을 통해 연기만 할 때와는 또 다른 인생을 많이 배웠어요.”
처음 그가 방송 일을 그만두고 사업에 매진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 오연수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큰 부와 명예를 안겨다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도 큰 삶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손지창은 “우리나라에 이순재 선생님처럼 평생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가족이 있는 상황에서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연기자로 활동하는 내내 많은 회의감에 휩싸였었다고 고백한다.
“돈이 필요해서 아르바이트로 CF 모델을 했고, 어쩌다 보니 연기도 하게 됐어요.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카메라 앞에 섰고 늘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죠. 언젠가 한 감독님이 ‘너는 가슴으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머리로 연기한다’며 윽박지르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분 말씀이 맞았어요. 가슴으로 하는 연기가 뭔지 배워봤어야 말이죠(웃음). 심지어 데뷔 초에는 촬영장에서 쓰는 용어도 몰라서 눈치로 대충 때웠어요. 창피하니까 물어보지도 못하겠더라고요. 또 제가 유난히 무서운 감독님들과 일을 많이 했어요. 어떤 분은 현장에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A4용지에 제 대사를 새로 다 다시 쓰고는 5분 안에 외우라고 하기도 했어요. 그러면 표정 연기는 신경도 못쓰고 오로지 머릿속에는 ‘대사 틀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밖에 없었죠. 공채 출신이 아닌 것에 대한 핍박도 많이 받아서 사실 연기 생활을 그만하기로 했을 때 마음이 무척 홀가분했어요(웃음).”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다짐대로 그는 비교적 많은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보낸다. 오연수가 작품에 들어갔을 때는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3학년인 두 아들의 등교 준비도 그가 직접 챙긴다.
마침 이때 오연수가 큰아들과 함께 매장을 방문했다. 맨 얼굴에 뿔테 안경을 걸친 오연수는 수수하면서도 세련미를 풍겼고, 키가 이미 아빠 만한 아들은 엄마를 쏙 빼닮은 훈남이었다. 스스럼없이 아빠와 포옹을 나누는 모습에서 다정한 부자지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손지창은 일일 농구 코치로 큰아들 학교를 방문해 아들의 기를 세워주기도 했다. 1994년 장동건, 심은하와 함께 출연한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서 선수 못지않은 실력을 뽐낸 그는 현재 연예인 농구단을 이끌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다.
“큰아이가 캐나다 국제학교에 다니는데 얼마 전 국제학교끼리 농구대회가 열렸어요. 아이 학교에는 농구장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불리할 것 같더라고요. 안타까운 마음에 아이한테 ‘선생님께 아빠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번 농구를 가르쳐주고 싶어 한다고 전하라’고 했죠. 그랬더니 외국인 선생님이 ‘너희 아빠가 농구선수니?’하고 묻더래요(웃음). 결국 선생님께 이런 저런 상황을 얘기한 뒤 학교를 찾아가서 아이들이 운동하는 걸 봐줬는데 다음날 선생님이 전화를 해서 대회 당일 코치를 해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흔쾌히 그러기로 하고 대회에 나갔는데 결국 우리 아이들이 준우승을 했어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무척 기뻤죠(웃음).”
두 아들 등교 준비시키는 자상한 아빠
7월 초에 있을 학부모 동반 여수 엑스포 견학도 그가 책임지고 예약을 완료했다. 처음에는 행사장 티켓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숙박도 예약이 불가능한 상태라 포기했는데 이벤트 전문가인 그가 나서서 여러 인맥을 동원해 가능한 길을 찾았다고 한다. 이처럼 아이의 학교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손지창은 “내 인생의 일 순위는 가족이다. 아무리 큰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가족이 잘못되면 아무 소용없지 않겠냐”고 말했다. 올해 결혼한 지 14년 된 손지창은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부싸움을 종종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사리판단이 생기고부터는 큰 소리를 못 내겠더라고요. 간혹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생기면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보다 말로 풀려고 해요. 며칠 전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앞뒤 상황을 조목조목 따지며 한 번 크게 훈계를 했어요. 이제 아이들이 머리가 굵어지니까 슬슬 엄마를 무시하려고 하는 게 문제였어요. 큰아이한테 ‘너의 이런 행동 때문에 엄마가 화가 나고, 그 여파가 아빠나 동생에게도 온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으면 좋겠다’고 설명을 했죠. 결국 큰 아이가 잘못했다고 빌고, 둘째는 잘못이 없는데도 형 따라 같이 울더라고요(웃음).”
손지창은 아내의 연기 활동을 적극 지지한다. 소속사 없이 활동하는 아내를 위해 드라마나 CF 계약 관련 일도 그가 도맡아 처리한다. 그는 오연수를 아내이기 이전에 연기자로서 존경하는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작품에 들어가면 병적으로 연기에 집착해요.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잠자다가도 잠꼬대로 대사를 읊어요(웃음). 아내는 저와 달리 정말 가슴으로 연기하는 것 같아요. 하하. 그렇기 때문에 연기에 대해서는 제가 일절 관여할 게 없고, 대신 인간적인 도리에 대해 자주 얘기를 하죠. 출연료를 많이 받는 만큼 함께 일하는 스태프에게 밥도 좋은 걸로 사주고, 후배나 선배들을 항상 배려하라고 얘기해요. 저도 연기활동 할 때는 후배와 선배들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조금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은 다 자신에게 돌아오게 돼 있더라고요.”
그는 당분간 베이커리 사업에 집중할 생각이다. 또한 향후 수익금을 어려운 이웃과 함께 쓰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상호인 ‘베이커 107’에는 10년 안에 107개의 프랜차이즈를 유치해 빵으로 사랑을 나누겠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에 베이커리 사업으로 생긴 수익금의 10%를 기부해 돈이 없어서 해외봉사를 망설이고 있는 교인들에게 사용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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