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건너편 멋스러운 검정 양산을 쓴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기자의 기억 속에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탤런트 허진(60)이었다. 수수하지만 깔끔하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나온 그는 사진 촬영을 위해 20년 전 미국 뉴욕에서 산 앤티크 양산을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며 멋쩍어했다. 요즘 그의 형편이 어떤지를 이미 알고 있는 기자에게 그는 “사실 이런 거 쓰고 다니면 사람들이 흉볼까봐 못 써요” 하면서 웃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70·80년대 브라운관을 누비며 많은 인기를 모았던 허진.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는 2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현재 그는 서울 평창동 12평 원룸에 살고 있다. 지난해 초 경기도 파주에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가족 한 명 없이 혈혈단신이기에 지금의 집도 좁진 않다고 한다. 집을 줄인 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다. 수입이 없으니 생계를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 세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단돈 천원이 없어 며칠 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했을 정도로 그동안 생활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을 안 하기 시작하고 2년 정도는 그런 대로 버텼어요. 큰돈은 아니지만 그동안 연기하면서 벌어놓은 돈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돈 까먹는 건 시간문제더라고요. 들어오는 건 없고 나가는 것만 있으니 막막했죠. 집도 팔고 차도 팔고, 나중엔 보석이며 옷, 신발, 가방들도 다 팔았어요. 옷장에 아직 몇 개는 남아 있어요. 1천8백만원 주고 산 밍크코트가 있는데, 너무 오래되서 팔리지도 않을 것 같아요.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는 교회 대신 전당포로 향하는 제 자신이 너무 처량해서 길에서 펑펑 울었어요.”
철없던 시절, 방송국에서 퇴출당한 뒤 궁핍한 삶 시작
젊은 시절 남다른 패션감각을 지닌 그는 동료 연예인 사이에서도 옷 잘 입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여자 후배들 중 몇몇은 그가 입었던 옷을 사러 오기도 했을 정도. 어느 날 방 한가득 걸려 있는 옷을 둘러본 한 후배가 “언니가 입고 다니는 옷은 다 예쁜데, 여기 있는 옷은 다 별로네”라고 말하자 그가 “옷은 매치가 중요하다”며 충고를 해준 적도 있다고 한다. 타고난 감각은 억지로 감출 수 없지만 요즘 그는 자신의 형편을 따져 옷차림도 일부러 수수하게 하고 다닌다.
“옛날에는 수입품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비싸 보이는 건 아예 구경도 안 해요. 얼마 전에도 8만원짜리 스카프가 너무 마음에 들어 샀다가, 다음 날 바로 물렀어요. 제 형편에 안 맞고 죄를 짓는 거 같아서요. 어쩔 때는 겉모습만 너무 근사해 보일까봐 일부러 언밸런스하게 옷을 맞춰 입기도 해요. 지난 부활절 때 모처럼 고급정장을 꺼내 입고 성당에 갔더니 사람들이 다 놀라더라고요.”
오랜 시간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다시 연기를 할 수 없었다. 연기복귀에 대한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를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이유를 묻자 그는 “방송국 윗선과 심하게 다툰 것이 시발점이 되긴 했지만, 혼자 잘난 줄만 알고 오만방자했던 내 탓”이라고 말했다.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촬영장에서도 아무에게나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는 그는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은 행동이었다”며 후회했다.
전남 영광이 고향인 그는 어린 시절 거울 보며 연기하는 걸 좋아했고, 글짓기·웅변·무용대회 등에 나가면 꼭 상을 탔을 정도로 예능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에 다니던 중 MBC 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연기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정말 톱스타라도 된 줄 알았어요. 저를 위해 일해주는 사람들인데도 함부로 대하고, 저한테 맞춰주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죠. 그런 행동들이 쌓여서 골이 깊어졌고, 당시만 해도 방송계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한 번 눈 밖에 나면 돌아오기 쉽지 않았어요. 누군가 저를 도와주고 싶어 연락을 해와도 중간에 일이 막힌 경우도 허다했고요. 그래도 미련하게 지금까지 오직 방송국에서 연락해오기를 기다렸어요.”
방송 관계자를 직접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상황은 더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사소한 의견 충돌에서 비롯된 일인 만큼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 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도리어 큰 소리가 오간 것. 처음 몇 번은 오기에라도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상대방보다 더 큰 소리로 싸웠는데, 결국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오해를 만들고 말았다.
“집에서 키우던 화초를 보면서 불현듯 인생을 깨달은 적이 있어요. 잎이 크고 푸른 나무였는데, 봄이 되니까 잔가지에서 여린 새잎이 돋더라고요.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큰 이파리에 가려져 있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여린 잎들은 점점 자라고, 큰 잎들은 알아서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거예요. 사람도 그래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끝까지 나무에 붙어 있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건 옳지 못한 거예요. 연기자로 잘나가던 시절, 제 생각을 굽힐 줄도 알고, 한발 물러설 줄도 알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어머니 돌아가신 뒤 자살 충동 느껴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자 연기가 아닌 다른 일에 도전해보기도 했다. 집에서 자그맣게 홈인테리어 사업을 하기도 하고, 지인의 소개로 카페를 맡아 운영하기도 한 것. 하지만 둘 다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카페는 저녁에 술도 팔아야 한다는 점이 부담스러워 두 달 만에 그만뒀다고 한다. 그는 “연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고 말했다.
힘든 나날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는 지난 99년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절망이 절정에 달했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 어머니 병 수발도 그가 직접 했다. 요즘도 그는 아침저녁으로 어머니 사진을 보며 인사를 올리고, 속상할 때 사진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는다고 한다.
“이제 그만 엄마를 떠나보내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어떻게 엄마를 잊어요. 아마 죽는 날까지 엄마를 잊지 못할 거예요. 어머니는 6·25전쟁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몸으로 여섯 남매를 키우셨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저를 ‘공주마마님’ ‘아가야’하고 부르셨죠. 그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걸 잃은 기분이었어요. 더 이상 살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적도 있다. 강가에서 한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서서히 강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 허진은 “그냥 이렇게 자연스럽게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가 죽으면 엄마를 볼 수 있겠지’ 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카메라 앞에 섰을 때가 가장 행복했기에 다시 연기자로 돌아가고 싶다는 허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어머니 장례식 때 크게 다퉜던 큰언니와 연락이 끊겨 생사도 모른 채 10년이 흘렀고, 셋째 언니 역시 현재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워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래도 큰언니는 죽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화 한 통 없을 리 없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동안 언니를 찾으려고 수소문해봤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러다 며칠 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언니 이름으로 조회되는 세 명 중 한 명이 2004년에 사망한 걸로 나오더라고요. 아직 정확하게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언니가 아닐까 싶어요. 만약 아니라면 제발 목소리라도 들려주면 좋겠어요.”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한 그는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가족이 아무도 없다는 게 너무 외롭다”며 눈물지었다. 젊은 시절 한 번의 짧은 결혼생활을 끝내고 지금껏 싱글로 지내고 있는 그는 어머니를 떠내보내고 외로움을 달래려 재혼을 생각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을 만났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진 못한 것.
“보석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거죠. 흠 많은 나를 분에 넘치게 사랑해준 사람인데, 저는 순진한 남자의 마음을 이용해 거짓말이나 하고…, 참 나빴어요. 제가 거짓말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매번 속아주고, 속아주고 했던 남자예요. 결국 사랑을 잃고 나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는 젊은 시절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랑도 해봤다.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에게 뭇매도 맞았고, 그 역시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때는 사랑인 줄 알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달았다고 한다. 현재 그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 결혼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끼리 애써 맞춰가려고 하는 과정이 싫고 두렵다”고 말했다.
결혼보다 연기자로서 홀로서고 싶은 마음
“젊어서 (결혼생활에) 실패하는 건 몰라도 나이 들어서 실패하면 꼴이 우스워질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리라는 보장도 없고. 이제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일을 갖는 거예요. 조그만 가게라도 얻어서 제가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소품도 팔고, 차도 팔고 하는 일요.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서 헤어나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그는 연기활동에 대한 의지도 조심스레 내비쳤다. 카메라 앞에 섰을 때가 가장 행복했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또한 연기이기 때문이다. 요즘 그가 즐겨 보는 드라마는 ‘제빵왕 김탁구’와 ‘자이언트’. 전인화의 악독한 연기를 보면서 과거 TV 속 자신을 보는 듯해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연기를 못 하게 되자 처음에는 TV 보는 것 자체가 지옥이었어요. 특히 드라마를 볼 때면 ‘나도 저렇게 연기해야 하는데’ 하는 조바심에 드라마 속 주인공을 질투하기까지 했죠. 탐탁지 않은 배우가 나오면 화면을 다른 데로 ‘획’ 돌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역시 시간이 지나니까 덤덤해지더라고요. 요즘도 드라마보다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예능프로그램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화제가 되고 있는 작품들은 꼭 찾아서 봐요. 그래야 요즘 드라마는 어떤지 알 수 있으니까요.”
“배역을 떠나 연기자란 타이틀을 되찾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간절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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