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복이 세계인의 핫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그 인기 중심에는 걸 그룹 블랙핑크가 있다. 지난 6월 신곡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의 뮤직비디오 피날레 부분에서 현대화한 한복을 입고 등장했는데 3억 뷰가 넘는 대박을 터트렸다. 6월 26일에는 미국 NBC 방송 토크 프로그램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 같은 한복을 입고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SNS에서는 블랙핑크 개량한복을 따라 입은 해외 팬들의 커버 영상도 쏟아지는 중이다.
블랙핑크가 입은 한복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한복 네 벌 중 두 벌은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스타트업 기업 ‘단하주단’의 단하(30) 대표 작품이다. 언뜻 보기에는 크롭트 티에 핫팬츠, 시스루 재킷처럼 보이지만 모두 전통 복식에서 따온 의상들이다. 크롭트 티는 가슴 가리개, 시스루 재킷은 남성 한복인 도포나 철릭(조선시대 무신이 입던 공복으로 상·하의를 따로 구성해 허리에 연결시킨 포)의 변형이다.
단하 대표는 그가 선보이는 개성 넘치는 한복만큼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그는 2013년부터 3년간 제주도 카지노에서 딜러와 사무직으로 일했다. 평소 한복 사랑이 깊어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한복을 입고 다녔고, 한복에 대한 경험과 애정을 살려 직장에 다니면서도 온라인으로 한복 대여 사업을 시작했다고. 그러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2016년 퇴사를 했고, 본격적인 한복 사업에 나서며 2018년 자신의 브랜드 ‘단하’를 론칭했다. 한복에 관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2016년 3월부터 지금까지 한국궁중복식연구원에서 조경숙 명인에게 한복 디자인을 배우고 있으며, 2018년부터 성균관대 의상학과 복식사/복식미학 석·박사 통합과정에서 공부 중이다.
그의 옆에는 한복을 함께 입고 해외를 누비던 고등학교 동창 임우정 씨가 든든한 파트너로 있다. 현재 단하주단에서 단하 대표는 한복 디자인과 제작을 담당하고, 임 씨는 한복을 제외한 다른 디자인과 디지털 업무를 맡고 있다.
‘단하’라는 이름이 톡특해요.
한복을 시작하면서 조경숙 명인께 받은 이름이에요.‘비단 단(緞)’에 ‘여름 하(夏)’를 쓰는데, ‘여름 비단’이라는 뜻이랍니다. 여름 비단은 다루기 까다로운 소재예요. 제 성격이 워낙 급하니 ‘한복을 지을 때 꼼꼼하게 잘하라’는 의미로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블랙핑크는 단하의 어떤 한복을 입었나요.
그동안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방송이나 화보 촬영에서 종종 단하의 옷을 선보였어요. 블랙핑크 스타일리스트팀에게 뮤직비디오에 쓸 한복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무척 기뻤어요. 제니 씨와 로제 씨가 저희 옷을 입었어요. 지수 씨와 리사 씨의 의상은 블랙핑크 스타일리스트팀에서 자체 제작한 거고요.
제니 씨는 분홍 봉황문 두루마기 재킷, 로제 씨는 봉황문 크롭트 톱에 짧은 검정 철릭을 입었어요. 다만 무대에서 춤추는 상황을 고려해 블랙핑크 스타일리스트팀에서 디자인을 약간 수정했고요. 총 길이 74cm인 두루마기는 하단을 잘라 짧은 재킷이 됐고, 남은 천은 아래에 둘러 치마처럼 표현했어요. 철릭도 길이를 수정하고 자수 색실을 붙여 장식했죠.
블랙핑크 의상이 다소 파격적이라 ‘한복이 맞나’라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개량한복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전통 복식 형태를 그대로 살려서 만들었어요. 제니 씨가 입은 한복은 남자 복식인 도포의 형태와 같아요. 소매와 길이를 줄여 현대적으로 해석했지만, 한복의 배래선은 그대로 살리고 평면 재단법으로 만들어 전통 방식을 재현했습니다. 로제 씨가 입은 검은색 외투는 남자 전통 복식인 철릭에서 모티프를 따와 모양과 제작 방법도 흡사해요. 크롭트 톱은 조선시대 가슴 가리개라고 하는 속옷의 형태인데, 문양을 더해 밖으로 노출시킨 거예요. 화려한 문양은 조선시대 궁중 보자기에 사용된 봉황문을 새겨 넣었고요.
뮤직비디오를 보고 뿌듯했을 것 같아요.
단하의 옷들은 화려하기도 하고, 입는 사람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는데 블랙핑크 멤버들이 잘 소화해준 것 같아요. 특히 뮤직비디오에서 제니 씨가 팔을 양옆으로 들어 올리는 장면에서 열광했어요. 그 의상을 만들면서 무늬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양팔을 드니 무늬의 대칭을 보여주는 시너지 효과가 나더라고요.
블랙핑크 덕분에 ‘단하’ 브랜드도 세계적으로 알려졌는데 유명해진 걸 실감하나요.
보통 국내 브랜드가 이름을 알리기까지 최소 2~3년은 버텨야 해요. 저희 역시 3년까지는 적자를 내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버티자고 결심했는데, 이렇게 빨리 좋은 기회가 찾아와 감사하는 마음이 커요. 뮤직비디오 덕분에 주문량도 늘었어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주문하는 경우도 많고요. 미국이 절반 이상이고, 나머지는 유럽과 아시아 지역 팬들이에요. 뮤직비디오 공개 이후 주문이 몰려들 것을 대비해 일주일 전에 해외 몰을 리뉴얼해 새로 오픈했어요. 또 블랙핑크 외에 다른 걸 그룹이나 CF와 관련해 협찬 문의도 늘었는데, 한번 크게 노출된 상태라 조심스럽더라고요. 아직까지 진행되는 사항은 없어요.
내외신의 보도도 많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요.
미국 잡지에 블랙핑크와 한복에 대해 다룬 기사가 있었어요. 그 내용 중 ‘뮤직비디오에 나온 모든 브랜드 중 가장 작고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가 가장 주목할 만한 쇼피스였다’ ‘샤넬 등 명품 브랜드가 등장하지만 한국의 가장 작은 로컬 브랜드가 뮤직비디오의 분위기를 이끌고 나갔다’는 부분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답니다. 뮤직비디오의 피날레 부분에 나와 더 임팩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은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들어오던 시절이었어요.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저는 호텔이나 카지노 쪽으로 취업을 알아보다 중국인들이 많이 오는 제주도 카지노에서 일하게 됐지요. 일은 재밌었지만 문제는 3교대였어요. 밤에 잠을 못 자니 힘들더라고요. 다만 8시간만 일하고 잔업은 없어서 틈날 때면 여기저기로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한복 사랑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할아버지가 매듭 장인(실, 노끈 등을 다양하게 맺거나 술을 다는 전통 매듭 기술이 있는 사람)이시라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매듭을 보고 자랐어요. 그런 집안 분위기가 제가 한복과 관련된 일을 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한복과 친숙했고, 고등학교 교복도 개량한복 스타일이었어요. 해외여행 갈 때도 꼭 한복을 챙겼어요. 처음에는 하얀 저고리와 파란색 치마를 들고 갔는데 양면으로 만들어서 두 벌인 것처럼 뒤집어 입을 수 있게 했죠. 브랜드를 론칭한 후에도 계속 한복을 입고 여행했고요. 이국적인 풍경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으니 색다른 분위기가 연출되고 예쁘더라고요.
여행 중 만난 외국인들의 반응도 궁금하네요.
외국 사람들이 보기에 한복은 특이하고 낯선 실루엣이잖아요. “어느 나라 옷이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같이 사진 찍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편집숍을 운영하는데 혹시 납품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고요. 한번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자리한 아와니 호텔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예약 시간에 조금 늦어 입구에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웨이터가 다가오더니 “옷이 예쁘니까 어서 들어오라”면서 레스토랑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내줬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복에 대한 고정 관념이 있어요. 결혼식이나 돌잔치 등 중요한 행사나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이고, 노출 없이 단아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죠. 하지만 한복은 치마와 저고리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다양한 복식 스타일로 보여줄 게 무궁무진하거든요. 한복에 대한 별다른 지식이 없는 외국인들도 개량된 한복을 보면 “저게 기모노나 치파오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한복인가?” 하면서 신기하게도 잘 알아채더라고요.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됐을 때도 “한국의 전통 옷인가” “전통 복식 같은데?”라는 반응이 있어서 놀랐어요.
한복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카지노에서 일하면서 수면 부족으로 피부에 빨갛게 발진이 올라오는 등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어요. 휴직하고 쉬는 기간에 한복학원에서 한복을 배웠는데 생각보다 적성에 맞더라고요. 회사가 투잡이 가능한 분위기라 복직 후 2015년에 일단 테스트처럼 온라인 한복 대여 사업을 시작했어요. 한복을 디자인한 뒤 한복 제작하는 업체에 맡겨서 제품을 만들었고요. 트렌디한 감각의 예비 신부를 대상으로 오프라인보다 저렴한 가격에 대여해줬는데 수익이 잘 났어요. 그러다 2018년에 대학원 진학과 함께 대여 사업은 관두고 단하 브랜드를 론칭하게 됐습니다.
궁중 보자기를 활용한 원단이 눈에 띄더라고요.
한복은 원단과 실루엣이 거의 전부예요. 영국의 리버티 원단처럼 저희만의 텍스타일 디자인을 하고 싶었어요. 여러 가지 시도를 하다가 궁중 보자기를 활용한 텍스타일을 만들게 됐고 디자인 특허도 냈어요. 색감도 튀고 한자도 들어가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됐지만, 다른 한편으론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도 있었어요.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내놓았는데, 목표 금액의 8000%를 달성해 무려 4천만원의 재원을 확보했어요. 단하의 대표 제품이 바로 이 궁중 보자기 무늬를 패턴으로 활용한 허리 치마예요. 또 업사이클링 제품에도 관심이 커 플라스틱 페트병에서 추출한 원사로 만든 옷도 많아요. 사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매 분기 컬렉션을 준비하고 원단 개발도 해야 해 돈이 많이 들어가요. 아직도 저흰 적자 상태고요(웃음). 창업 3년까지는 ‘가져가는 게 없다고 생각하고 투자하자’며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젊은 층에게 한복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는 분위기예요.
한국인이라면 한복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전통 한복을 출근복으로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복 고유의 느낌을 어느 정도 간직한 옷에 눈길에 갈 듯해요. 단하의 옷은 여행이나 기념일 등 특별한 날뿐 아니라 일상복으로도 많이 입으세요. 항공정비사로 일하는 한 여성 고객의 경우 치마를 종류별로 구입하셨는데, 작업복 대신 단하의 치마를 입고 출근한다고 하더라고요. 디자인도 예쁘고 활동하기 편하니까요.
디자인 전공이 아니니 한복 의상 만드는 일이 힘들었을 듯해요.
처음에는 만날 힘들었어요. 한복은 성격대로 만들면 옷에 그대로 나타나요. 다림질 한번 건너뛰어도 티가 나고요. 한국궁중복식연구원에서 공부한 지 1년 정도 지난 후에야 ‘내 고집대로가 아니라 가르침대로 하면 잘하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도 공부 중인데, 항상 처음 배우는 기분으로 임하고 있어요.
단하의 한복을 꼭 입혔으면 하는 사람이 있나요.
이영애 씨와 수지 씨요. 이영애 씨는 설명할 필요 없이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대표 스타잖아요. 수지 씨는, 예전에 한복 화보를 봤는데 단아하면서 소녀 같은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디자이너로서 한복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정의 내리기 힘들어요. 한복은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만들고 입고 즐기는 등 모든 걸 함께해온 옷이에요. 전통에 얽매여 너무 엄격한 잣대로 보지 않는다면 좀 더 발전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동안 생활 한복 브랜드들은 대부분 저고리에 블라우스, 치마 형태에 집중했는데 이제부터 좀 더 다채로운 형태와 디자인의 브랜드가 나올 것 같고요. 외국에서도 자주 찾아줄 듯하고요.
앞으로의 행보도 궁금하네요.
다음 시즌은 민화 작가와 협업해 새로운 텍스타일 디자인을 발표하려고 논의 중이에요.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그림이 옷으로 재창조된다면 작품처럼 근사하지 않을까요. 또 남성 라인도 준비하고 있어요. 아직까지 한국적인 옷을 모티프로 하는 패션 브랜드가 세계에 진출한 사례는 없다고 알고 있어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샤넬 1호점에는 건물 전체에 장인들이 근무하며 샤넬 컬렉션을 탄생시키고 있다고 해요. 샤넬처럼 단하가 우리나라에 한복을 제작하는 건물을 세우고,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해 지구 곳곳에 숍을 오픈하는 게 궁극적인 꿈이에요.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단하, YG엔터테인먼트
블랙핑크가 입은 한복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한복 네 벌 중 두 벌은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스타트업 기업 ‘단하주단’의 단하(30) 대표 작품이다. 언뜻 보기에는 크롭트 티에 핫팬츠, 시스루 재킷처럼 보이지만 모두 전통 복식에서 따온 의상들이다. 크롭트 티는 가슴 가리개, 시스루 재킷은 남성 한복인 도포나 철릭(조선시대 무신이 입던 공복으로 상·하의를 따로 구성해 허리에 연결시킨 포)의 변형이다.
단하 대표는 그가 선보이는 개성 넘치는 한복만큼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그는 2013년부터 3년간 제주도 카지노에서 딜러와 사무직으로 일했다. 평소 한복 사랑이 깊어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한복을 입고 다녔고, 한복에 대한 경험과 애정을 살려 직장에 다니면서도 온라인으로 한복 대여 사업을 시작했다고. 그러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2016년 퇴사를 했고, 본격적인 한복 사업에 나서며 2018년 자신의 브랜드 ‘단하’를 론칭했다. 한복에 관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2016년 3월부터 지금까지 한국궁중복식연구원에서 조경숙 명인에게 한복 디자인을 배우고 있으며, 2018년부터 성균관대 의상학과 복식사/복식미학 석·박사 통합과정에서 공부 중이다.
그의 옆에는 한복을 함께 입고 해외를 누비던 고등학교 동창 임우정 씨가 든든한 파트너로 있다. 현재 단하주단에서 단하 대표는 한복 디자인과 제작을 담당하고, 임 씨는 한복을 제외한 다른 디자인과 디지털 업무를 맡고 있다.
1 단하를 대표하는 궁중 보자기 무늬를 활용한 원단. 2 단하 대표는 창의적인 한복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공부 중이다. 3 무지기(겉치마가 부풀게 보이도록 입는 속치마)를 모티프로 한 궁중 보자기 패턴의 허리 치마를 입은 단하 대표.
한복을 시작하면서 조경숙 명인께 받은 이름이에요.‘비단 단(緞)’에 ‘여름 하(夏)’를 쓰는데, ‘여름 비단’이라는 뜻이랍니다. 여름 비단은 다루기 까다로운 소재예요. 제 성격이 워낙 급하니 ‘한복을 지을 때 꼼꼼하게 잘하라’는 의미로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블랙핑크는 단하의 어떤 한복을 입었나요.
그동안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의 방송이나 화보 촬영에서 종종 단하의 옷을 선보였어요. 블랙핑크 스타일리스트팀에게 뮤직비디오에 쓸 한복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무척 기뻤어요. 제니 씨와 로제 씨가 저희 옷을 입었어요. 지수 씨와 리사 씨의 의상은 블랙핑크 스타일리스트팀에서 자체 제작한 거고요.
제니 씨는 분홍 봉황문 두루마기 재킷, 로제 씨는 봉황문 크롭트 톱에 짧은 검정 철릭을 입었어요. 다만 무대에서 춤추는 상황을 고려해 블랙핑크 스타일리스트팀에서 디자인을 약간 수정했고요. 총 길이 74cm인 두루마기는 하단을 잘라 짧은 재킷이 됐고, 남은 천은 아래에 둘러 치마처럼 표현했어요. 철릭도 길이를 수정하고 자수 색실을 붙여 장식했죠.
블랙핑크 의상이 다소 파격적이라 ‘한복이 맞나’라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개량한복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전통 복식 형태를 그대로 살려서 만들었어요. 제니 씨가 입은 한복은 남자 복식인 도포의 형태와 같아요. 소매와 길이를 줄여 현대적으로 해석했지만, 한복의 배래선은 그대로 살리고 평면 재단법으로 만들어 전통 방식을 재현했습니다. 로제 씨가 입은 검은색 외투는 남자 전통 복식인 철릭에서 모티프를 따와 모양과 제작 방법도 흡사해요. 크롭트 톱은 조선시대 가슴 가리개라고 하는 속옷의 형태인데, 문양을 더해 밖으로 노출시킨 거예요. 화려한 문양은 조선시대 궁중 보자기에 사용된 봉황문을 새겨 넣었고요.
뮤직비디오를 보고 뿌듯했을 것 같아요.
단하의 옷들은 화려하기도 하고, 입는 사람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는데 블랙핑크 멤버들이 잘 소화해준 것 같아요. 특히 뮤직비디오에서 제니 씨가 팔을 양옆으로 들어 올리는 장면에서 열광했어요. 그 의상을 만들면서 무늬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양팔을 드니 무늬의 대칭을 보여주는 시너지 효과가 나더라고요.
블랙핑크 덕분에 ‘단하’ 브랜드도 세계적으로 알려졌는데 유명해진 걸 실감하나요.
보통 국내 브랜드가 이름을 알리기까지 최소 2~3년은 버텨야 해요. 저희 역시 3년까지는 적자를 내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버티자고 결심했는데, 이렇게 빨리 좋은 기회가 찾아와 감사하는 마음이 커요. 뮤직비디오 덕분에 주문량도 늘었어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주문하는 경우도 많고요. 미국이 절반 이상이고, 나머지는 유럽과 아시아 지역 팬들이에요. 뮤직비디오 공개 이후 주문이 몰려들 것을 대비해 일주일 전에 해외 몰을 리뉴얼해 새로 오픈했어요. 또 블랙핑크 외에 다른 걸 그룹이나 CF와 관련해 협찬 문의도 늘었는데, 한번 크게 노출된 상태라 조심스럽더라고요. 아직까지 진행되는 사항은 없어요.
내외신의 보도도 많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요.
미국 잡지에 블랙핑크와 한복에 대해 다룬 기사가 있었어요. 그 내용 중 ‘뮤직비디오에 나온 모든 브랜드 중 가장 작고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가 가장 주목할 만한 쇼피스였다’ ‘샤넬 등 명품 브랜드가 등장하지만 한국의 가장 작은 로컬 브랜드가 뮤직비디오의 분위기를 이끌고 나갔다’는 부분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감동을 받았답니다. 뮤직비디오의 피날레 부분에 나와 더 임팩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중국어 전공한 카지노 직원, 한복 디자이너로 인생 2막 열다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카지노 딜러로 일하는 등 이력이 독특해요.제가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은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들어오던 시절이었어요.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저는 호텔이나 카지노 쪽으로 취업을 알아보다 중국인들이 많이 오는 제주도 카지노에서 일하게 됐지요. 일은 재밌었지만 문제는 3교대였어요. 밤에 잠을 못 자니 힘들더라고요. 다만 8시간만 일하고 잔업은 없어서 틈날 때면 여기저기로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한복 사랑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할아버지가 매듭 장인(실, 노끈 등을 다양하게 맺거나 술을 다는 전통 매듭 기술이 있는 사람)이시라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매듭을 보고 자랐어요. 그런 집안 분위기가 제가 한복과 관련된 일을 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한복과 친숙했고, 고등학교 교복도 개량한복 스타일이었어요. 해외여행 갈 때도 꼭 한복을 챙겼어요. 처음에는 하얀 저고리와 파란색 치마를 들고 갔는데 양면으로 만들어서 두 벌인 것처럼 뒤집어 입을 수 있게 했죠. 브랜드를 론칭한 후에도 계속 한복을 입고 여행했고요. 이국적인 풍경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으니 색다른 분위기가 연출되고 예쁘더라고요.
여행 중 만난 외국인들의 반응도 궁금하네요.
외국 사람들이 보기에 한복은 특이하고 낯선 실루엣이잖아요. “어느 나라 옷이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같이 사진 찍자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편집숍을 운영하는데 혹시 납품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고요. 한번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자리한 아와니 호텔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예약 시간에 조금 늦어 입구에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웨이터가 다가오더니 “옷이 예쁘니까 어서 들어오라”면서 레스토랑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내줬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복에 대한 고정 관념이 있어요. 결혼식이나 돌잔치 등 중요한 행사나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이고, 노출 없이 단아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죠. 하지만 한복은 치마와 저고리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다양한 복식 스타일로 보여줄 게 무궁무진하거든요. 한복에 대한 별다른 지식이 없는 외국인들도 개량된 한복을 보면 “저게 기모노나 치파오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한복인가?” 하면서 신기하게도 잘 알아채더라고요.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됐을 때도 “한국의 전통 옷인가” “전통 복식 같은데?”라는 반응이 있어서 놀랐어요.
한복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카지노에서 일하면서 수면 부족으로 피부에 빨갛게 발진이 올라오는 등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어요. 휴직하고 쉬는 기간에 한복학원에서 한복을 배웠는데 생각보다 적성에 맞더라고요. 회사가 투잡이 가능한 분위기라 복직 후 2015년에 일단 테스트처럼 온라인 한복 대여 사업을 시작했어요. 한복을 디자인한 뒤 한복 제작하는 업체에 맡겨서 제품을 만들었고요. 트렌디한 감각의 예비 신부를 대상으로 오프라인보다 저렴한 가격에 대여해줬는데 수익이 잘 났어요. 그러다 2018년에 대학원 진학과 함께 대여 사업은 관두고 단하 브랜드를 론칭하게 됐습니다.
궁중 보자기를 활용한 원단이 눈에 띄더라고요.
한복은 원단과 실루엣이 거의 전부예요. 영국의 리버티 원단처럼 저희만의 텍스타일 디자인을 하고 싶었어요. 여러 가지 시도를 하다가 궁중 보자기를 활용한 텍스타일을 만들게 됐고 디자인 특허도 냈어요. 색감도 튀고 한자도 들어가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구나 생각됐지만, 다른 한편으론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도 있었어요.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내놓았는데, 목표 금액의 8000%를 달성해 무려 4천만원의 재원을 확보했어요. 단하의 대표 제품이 바로 이 궁중 보자기 무늬를 패턴으로 활용한 허리 치마예요. 또 업사이클링 제품에도 관심이 커 플라스틱 페트병에서 추출한 원사로 만든 옷도 많아요. 사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매 분기 컬렉션을 준비하고 원단 개발도 해야 해 돈이 많이 들어가요. 아직도 저흰 적자 상태고요(웃음). 창업 3년까지는 ‘가져가는 게 없다고 생각하고 투자하자’며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신곡 뮤직비디오에서 현대적인 감각의 한복을 입어 화제를 모은 블랙핑크 멤버들 모습. 왼쪽부터 리사, 지수, 제니, 로제. 넷 중 제니와 로제가 단하의 한복을 착용했다.
한국인이라면 한복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전통 한복을 출근복으로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복 고유의 느낌을 어느 정도 간직한 옷에 눈길에 갈 듯해요. 단하의 옷은 여행이나 기념일 등 특별한 날뿐 아니라 일상복으로도 많이 입으세요. 항공정비사로 일하는 한 여성 고객의 경우 치마를 종류별로 구입하셨는데, 작업복 대신 단하의 치마를 입고 출근한다고 하더라고요. 디자인도 예쁘고 활동하기 편하니까요.
디자인 전공이 아니니 한복 의상 만드는 일이 힘들었을 듯해요.
처음에는 만날 힘들었어요. 한복은 성격대로 만들면 옷에 그대로 나타나요. 다림질 한번 건너뛰어도 티가 나고요. 한국궁중복식연구원에서 공부한 지 1년 정도 지난 후에야 ‘내 고집대로가 아니라 가르침대로 하면 잘하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도 공부 중인데, 항상 처음 배우는 기분으로 임하고 있어요.
단하의 한복을 꼭 입혔으면 하는 사람이 있나요.
이영애 씨와 수지 씨요. 이영애 씨는 설명할 필요 없이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대표 스타잖아요. 수지 씨는, 예전에 한복 화보를 봤는데 단아하면서 소녀 같은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디자이너로서 한복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정의 내리기 힘들어요. 한복은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만들고 입고 즐기는 등 모든 걸 함께해온 옷이에요. 전통에 얽매여 너무 엄격한 잣대로 보지 않는다면 좀 더 발전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동안 생활 한복 브랜드들은 대부분 저고리에 블라우스, 치마 형태에 집중했는데 이제부터 좀 더 다채로운 형태와 디자인의 브랜드가 나올 것 같고요. 외국에서도 자주 찾아줄 듯하고요.
앞으로의 행보도 궁금하네요.
다음 시즌은 민화 작가와 협업해 새로운 텍스타일 디자인을 발표하려고 논의 중이에요.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그림이 옷으로 재창조된다면 작품처럼 근사하지 않을까요. 또 남성 라인도 준비하고 있어요. 아직까지 한국적인 옷을 모티프로 하는 패션 브랜드가 세계에 진출한 사례는 없다고 알고 있어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샤넬 1호점에는 건물 전체에 장인들이 근무하며 샤넬 컬렉션을 탄생시키고 있다고 해요. 샤넬처럼 단하가 우리나라에 한복을 제작하는 건물을 세우고,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해 지구 곳곳에 숍을 오픈하는 게 궁극적인 꿈이에요.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단하, YG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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