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29일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회. ‘트럼프 유니폼’ 네이비 슈트에 레드 컬러 넥타이를 맨 후보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니키 헤일리 후보.
“트럼프는 토론에 없었지만 트럼프의 스타일은 있었다(Trump Wasn’t at the Debate, But His Outfit Was).”
미국 정치 일간지 ‘폴리티코’가 지난해 9월 27일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회 직후 게재한 칼럼 제목이다.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주 주지사, 더그 버검 노스다코타주 주지사, 기업가 출신인 비벡 라마스와미 등 거의 모든 남성 후보가 소모사 소재 네이비 정장에 화이트 셔츠, 레드 컬러 넥타이 차림이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를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유산을 쟁취하려는 의도로 읽혔다. 하지만 이날 스포트라이트는 유일한 여성 후보, 니키 헤일리(52)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에게로 쏠렸다. 당당하고 세련되면서도 안정감을 주는 와인 컬러 코트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트럼프 유니폼’을 입은 (패션 스타일만 보면) 그저 그런 중년 남성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니키 헤일리는 유엔 대사 시절부터 포토제닉한 스타일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목하도록 하는 데 능했다. 이는 마치 브로치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나 스카프 패션으로 유명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를 연상케 한다. 헤일리 전 대사의 패션 스타일링에서 일찌감치 그의 정치적 야심을 읽은 이들도 많다.
유엔 주재 미국 대사 시절 대북제재안을 결의하는 회의장에 핑크색 정장을 입고 등장한 니키 헤일리.
니키 헤일리 후보는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그동안 독주하던 트럼프를 무서운 기세로 따라잡으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 회사인 아메리칸리서치그룹이 뉴햄프셔주 공화당 경선 참여 예상자 600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12월 14~20일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율은 33%, 헤일리 후보의 지지율은 29%로 나타났다. 두 후보 간 격차가 오차범위인 ±4%p까지 좁혀진 것. 2016년과 2020년 트럼프를 후원했던 기부자들이 헤일리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가 하면, 조 바이든 대통령과 헤일리가 각각 민주당과 공화당 대표로 대선에서 맞붙을 경우 헤일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공화당 경선의 첫 관문인 1월 15일 아이오와 코커스에서는 트럼프, 디샌티스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하이힐은 그냥 패션이 아니라 탄약”
미국 국기가 그려진 셔츠는 횐색과 블랙, 깔별로 구비하고 있다.
니키 헤일리 후보는 1972년생으로, 미국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인도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부모는 시크교도였는데, 부친은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지냈고 모친은 의류업체를 운영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공립 종합대학인 클렘슨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그녀는 지역상공회의소에서 기업 활동 환경 개선을 위해 일하다 2004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 커리어를 시작했다. 2010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최연소, 최초 여성 주지사로 당선됐다. 뼛속 깊이 보수적인 지역 분위기를 감안하면, 이민 가정 출신 여성인 그녀의 당선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헤일리는 주지사를 연임하며 보잉사의 B787 여객기 생산 라인, 볼보·벤츠 자동차 공장, 세계적인 신생 에너지 기업들을 유치하며 지역 경제 발전을 견인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힘을 실은 그녀는 2017~2018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국제 무대에서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데, 헤일리는 재임 기간 동안 이를 충실히 수행했다는 평을 얻는다. 트럼프가 선언한 파리기후협약 탈퇴 작업을 했고, 유엔 인권이사국에서도 탈퇴했다. 2017년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와 6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의 북한 제재 강화에 앞장섰다.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2017년 4월 2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논의하는 꽉 찬 회의장에 디자이너 브랜드 스키아파렐리의 핑크색 재킷과 원피스를 입고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무엇인가 의논하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헤일리의 포토제닉한 의상 선택은 그녀가 틸러슨 이상으로 대북 제재 이슈에 주도권을 갖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유엔 대사 시절 블루, 핑크, 레드 등 화려한 원색 의상을 즐겨 입어 무채색 일색의 남성 외교관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해 2월 대권 도전 선언 이후 헤일리 후보는 공식 석상에서는 화이트, 블랙, 블루, 와인 등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컬러 의상을 즐겨 입는다. 유권자들과 캐주얼하게 만나는 행사에서는 니트나 스웨터, 셔츠 등을 입어 편안하고 활동적이며 친근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특히 성조기 무늬가 있는 스웨터는 블랙과 화이트 컬러를 ‘깔별’로 구비하고 애국심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행사에 입고 나온다.
헤일리 후보는 평소 눈에 띄는 화려한 컬러 의상을 즐겨 입는다.
여성 정치인은 남성 정치인들보다 의상 선택의 폭이 넓지만 동시에 훨씬 더 많은 ‘감시’의 눈이 따른다. 치마를 입느냐, 바지를 입느냐, 하이힐을 신느냐, 플랫 슈즈를 신느냐 하나하나가 모두 공격을 당하거나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8일 공화당 경선 3차 토론에서 비벡 라마스와미가 헤일리에 대해 “3cm 구두를 신은 딕 체니”라고 언급했다. 우리 식으로 해석하자면 ‘치마 두른 (남자 정치인) 누구’ 정도의 표현일 것이다. 이에 대해 헤일리는 “일단 3cm가 아니고 5cm다. 이걸 신고 뛸 수 없었다면 신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응수한 뒤 “나는 하이힐을 신는데, 그것은 패션을 위해서가 아니라 탄약이다. 누군가를 발로 찰 때 하이힐을 신으면 더 아프다”고 맞받아쳤다. 남성 주류 사회에서 너무 흔하게 일어나는, 은연중 남녀를 구별 짓고 여성을 비하하는 언사에 당당하게 맞선 헤일리의 발언에 큰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헤일리 후보에게 있어 패션은 그저 예쁘게 보이기 위한 옷차림이 아니라 정치라는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올 전략적인 도구인 셈이다.
한편 헤일리 후보는 패션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4월 딸 결혼식에서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린 직후다. 신부가 입는 웨딩드레스가 흰색이기 때문에 결혼식날 하객들은 흰색 계통을 피하는 것이 기본 에티켓이다. 그녀의 SNS에는 “딸의 결혼식 날 엄마가 왜 신부처럼 옷을 입었나” “왜 신부 엄마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위의 팔을 잡고 있나” “소름 끼친다”는 등 따가운 댓글이 달렸고, 인터넷에선 이에 관한 찬반 논쟁도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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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게티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