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국정 농단 사태를 불러일으킨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가 긴급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씨는 이화여대 입시 및 학사 관리 과정에서의 특혜를 비롯해 삼성으로부터 승마와 관련해 특혜성 지원을 받았으며, 외국환관리법을 위반한 혐의를 받고 도주 중인 상황이었다. 정씨가 체포된 곳은 덴마크의 북쪽 올보르 지역에 위치한 한 가정집. 덴마크 현지 경찰은 정씨의 소재를 파악한 국내 한 언론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정씨를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하고 신병을 확보했다.
정씨의 소재가 파악되자 국내 언론들은 정씨가 있는 곳으로 앞다퉈 기자들을 파견했다. 그간 행방을 감춰온 정씨를 대면해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였다. ‘길바닥 저널리스트’라는 1인 미디어로 활동 중인 박훈규(44) PD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박 PD가 정씨를 마주한 곳은 덴마크 올보르 지방법원. 정씨는 자신의 영장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박 PD는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의 녹음 기능과 동영상 촬영 기능을 활용해 8분가량 이어진 정씨의 발언 내용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후 해당 파일을 길바닥 저널리스트라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공개해 세상에 알렸다.
사실 덴마크 법정 안에서는 국내 법정과 마찬가지로 허가 없는 촬영과 녹취가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박 PD가 덴마크 실정법을 어겼다는 질타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 그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단행했을까. 덴마크 현지 취재를 마치고 귀국한 박훈규 PD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만났다.
▼ 정유라 씨의 단독 인터뷰가 크게 화제를 모았어요.
유튜브에서 운영 중인 길바닥 저널리스트 채널을 통해 맨 처음 인터뷰를 공개했어요. 1월 13일 기준으로 정씨의 육성이 담긴 녹취 파일은 64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정씨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조회수 3만 회를 약간 넘었죠. 이후 국내 여러 방송사에서 해당 영상과 녹취 파일을 보도하면서 주목을 받게 됐어요. 덕분에 길바닥 저널리스트의 구독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어요. 1년 전과 비교하면 50배 이상 늘었죠.
▼ 덴마크 현지 취재를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가요.
지난해 12월 18일에 유럽으로 건너가서 현지 취재를 시작했어요. 그동안 국내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정씨가 머물 곳으로 유력했던 독일을 중심으로 행적을 쫓았죠. 그런데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니 독일 검찰이나 경찰을 비롯해 교민들이 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고, 시내의 가게나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아서 취재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오더라고요. (그 와중에 정유라 씨가) 덴마크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장 올보르로 달려갔죠.
▼ 체포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정씨가 덴마크에 있을 거라고 예상했나요.
전혀요. 여러 루트를 통해 접한 정보로 ‘정씨가 덴마크에 있을 수도 있겠다’ 싶긴 했는데 확신이 서진 않았어요. 더구나 덴마크는 너무 생소한 나라잖아요. 그리고 정씨는 한창 팬시(Fancy)한 것들을 좋아할 나이고요. 자신과 별 연고도 없는 덴마크, 그것도 조용한 외곽에서 머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독일에 비해 교민도 별로 없어서 현지 취재 자체가 불가능한 터라 정확한 제보 없이는 섣불리 가기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 매체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PD인데, 취재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저는 2008년 광우병 파동 때부터 1인 미디어를 운영하다가 2014년부터 길바닥 저널리스트라는 이름을 걸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후원 계좌를 통해 취재 비용을 마련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자비로 충당합니다. 이번에도 차량 렌트를 포함해 총 7백만~8백만원가량을 사용했어요.
▼ 큰돈을 들여가면서까지 정유라 씨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나요.
지금껏 길바닥 저널리스트 채널에서 가장 조회수가 높은 게시물이 2015년 10월 29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제50회 전국여성대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을 당시의 영상이었어요. 그때 이화여대 학생들이 박 대통령의 방문을 반대하면서 사복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는데 국내 어떤 주요 언론도 해당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이대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고, 이듬해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 사태와 정유라 씨 특혜 비리가 연달아 터지면서 정씨를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엄마 최순실 씨도 컨트롤이 안 되는 딸이기 때문에 정씨를 만나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 정씨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뭐였나요.
‘세월호 7시간’이죠. 엄마와 관계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또 좋을 땐 모녀간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고 들었어요. 어쩌면 그날 대통령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엄마에게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씨는 “당시 임신 중이었다. 엄마와 사이가 틀어져 아예 연락을 안할 시기였다”고 하더군요. 출산한 게 2015년 5월인 것을 생각해보면 정씨의 발언은 거짓이었죠.
▼ 당시엔 정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나요.
이미 인터뷰를 할 때부터 정씨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취재진을 갑작스레 만나면 대답을 피하거나 답이 꼬이게 마련인데, 정씨는 너무나 차분한 어조로 적극적인 답변을 늘어놓잖아요. 준비한 답변을 한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죠.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서 정씨의 답변에 충분히 반론을 제기할 겨를이 없었던 게 사실이에요.
▼ 어렵게 정씨를 만났을 땐 기분이 어땠나요.
짜릿했죠. 본격적으로 정씨에 대해 취재를 시작한 건 지난해 10월부터였어요. 정씨와 인연이 있을 법한 인물들의 SNS를 전부 뒤졌고, 실제로 함께 학교를 다닌 친구들을 수소문해 만나보기도 했어요. 정유라 씨에 대한 집착이었죠. 그런데 그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정씨의 존재는 알지만,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성격이 별나다” “친구가 없다”였어요. 보통 그 나이의 여대생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게 마련인데, 정씨에겐 그런 친구 한 명 없었던 거예요.
▼ 정씨를 만났을 당시 상황을 좀 더 소개해주세요.
심리를 마치고 선고를 앞둔 휴정 시간이었는데,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경황이 없었죠. 사실 직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는 후배 PD 한 명을 “유럽 여행하자”며 데려갔었어요. 정씨를 맞닥뜨렸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하라고 후배에게 당부하고 저는 정씨와 시선을 맞추고 인터뷰를 진행했죠. 법정 안에서 녹취나 촬영이 금지돼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정씨의 육성을 담아내는 것이 우리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 선고 결과가 나온 후 정씨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4주간 덴마크 구치소에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변호인에게 기대어 울더라고요. 추가로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바로 압송 절차를 밟는 바람에 시도하지 못했어요.
▼ 덴마크 법원에선 “법정 내 허가받지 않은 촬영과 녹음이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던데요.
정유라 씨의 변호를 맡은 현지 대형 로펌 tvc 소속의 얀 슈나이더 변호사가 법원에 문제 제기를 한 것이더라고요. 만일 덴마크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 부분은 제가 감수해야죠. 하지만 정씨의 육성과 영상을 공개한 것을 후회하진 않아요.
▼ 이후 덴마크에서 정씨의 행적에 대해 추가 취재를 해봤나요.
정씨가 머물렀던 집과 동네를 가봤어요. 정씨가 빌린 집은 월세가 2백40만~2백50만원 정도 하더라고요. 제가 정씨의 자택을 찾았을 땐 모든 창문에 블라인드가 쳐져 있어서 안을 볼 수 없었어요.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현지 경찰로부터 “사생활 침해 소지가 있다”고 여러 차례 제지를 받았고요.
▼ 매체에 소속돼 있다면 좀 더 취재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나요.
저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1인 미디어를 운영하던 게 본업이 된 케이스예요. 인터넷 매체에서 제의가 와 1년 정도 그곳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데스크로부터 취재 지시를 받아서 일하는 것이 저와는 잘 맞지 않더라고요. 특히 세월호 사고를 취재하면서 언론사의 접근 방식에 화가 났어요. 다들 자극적인 것만 따라갔지, 세월호 유가족들이 원하는 진상 규명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죠.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언론의 기능이 마비된 거예요.
▼ 독립 PD로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없나요.
외국에선 독립 저널리스트의 지위를 인정해주는데 우리나라엔 아직 그런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게 사실이에요. 취재를 나가면 “소속이 어디냐”부터 따져 물으니까요. 수입이 일정치 않다는 것도 어려움 중 하나예요. 특정 저널리스트에게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좋을 것 같아요.이번에 제가 부담을 무릅쓰고 정유라 씨 인터뷰에 뛰어든 이유 중 하나도 ‘독립 저널리스트도 얼마든지 기성 매체에 뒤지지 않는 뉴스를 전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컸기 때문이죠.
▼ 아이템을 선정하는 기준이 따로 있나요.
‘남들 하는 건 하지 말자’예요. 기성 매체들이 하고 있는 걸 굳이 저까지 할 필요 없잖아요. 기존 언론에서 보여주는 그림 외에 다른 면을 밝히려고 노력 중이죠. 혹자는 언론이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허상이라고 봐요. 기성 언론의 왜곡 보도가 시작되는 것은 권력자들의 목소리를 먼저 듣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현재의 언론사 시스템 하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길바닥 저널리스트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우선적으로 보도하고 후에 반론을 듣는 방식으로 운영해요. 영상 구성 자체도 기존의 뉴스와는 달라요. 기존의 뉴스엔 리포팅이 들어가지만 저는 전혀 손질하지 않은 날것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 외부의 압력이나 항의를 받은 적은 없나요.
‘박사모’와 관련된 영상을 올렸을 땐 “선동꾼”이라며 고소하겠다는 말도 들었죠. 만약 제 보도 내용이 잘못됐다면 무척 신경 쓰이겠지만 그건 아니잖아요. 항의 메시지만 받았을 뿐 실제로 고소를 당한 적은 없어요.
▼ 한 언론이 정유라 씨의 소재를 파악하고 경찰에 신고한 뒤 이를 취재한 것을 두고 해석이 분분해요. 박 PD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힘들지만, 만약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몇날 며칠을 기다려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페이스북 라이브 같은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전하며 보도 압박을 했을 것 같아요. 정씨의 행적을 찾아서 속보를 내고 단독 보도를 하는 게 아니라, 심도 깊은 인터뷰를 위해 그와는 다른 선택을 했을 거예요.
▼ 앞으로의 취재 방향은 정했나요.
현지 취재를 다녀온 이후 여러 루트를 통해 관련 제보들을 받고 있어요. 정씨가 아직 덴마크에 있으니 조만간 한 번 더 현지에 가서 관련 취재를 이어갈 계획도 있어요. 정씨가 귀국하지 않고 버티는 건 최순실 씨가 여전히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의미예요. 길바닥 저널리스트가 할 일이 많다는 얘기죠.
사진 지호영 기자
디자인 김영화
정씨의 소재가 파악되자 국내 언론들은 정씨가 있는 곳으로 앞다퉈 기자들을 파견했다. 그간 행방을 감춰온 정씨를 대면해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였다. ‘길바닥 저널리스트’라는 1인 미디어로 활동 중인 박훈규(44) PD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박 PD가 정씨를 마주한 곳은 덴마크 올보르 지방법원. 정씨는 자신의 영장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박 PD는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의 녹음 기능과 동영상 촬영 기능을 활용해 8분가량 이어진 정씨의 발언 내용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후 해당 파일을 길바닥 저널리스트라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공개해 세상에 알렸다.
사실 덴마크 법정 안에서는 국내 법정과 마찬가지로 허가 없는 촬영과 녹취가 엄격하게 금지돼 있다. 박 PD가 덴마크 실정법을 어겼다는 질타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 그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단행했을까. 덴마크 현지 취재를 마치고 귀국한 박훈규 PD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만났다.
▼ 정유라 씨의 단독 인터뷰가 크게 화제를 모았어요.
유튜브에서 운영 중인 길바닥 저널리스트 채널을 통해 맨 처음 인터뷰를 공개했어요. 1월 13일 기준으로 정씨의 육성이 담긴 녹취 파일은 64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정씨의 모습이 담긴 영상은 조회수 3만 회를 약간 넘었죠. 이후 국내 여러 방송사에서 해당 영상과 녹취 파일을 보도하면서 주목을 받게 됐어요. 덕분에 길바닥 저널리스트의 구독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어요. 1년 전과 비교하면 50배 이상 늘었죠.
▼ 덴마크 현지 취재를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가요.
지난해 12월 18일에 유럽으로 건너가서 현지 취재를 시작했어요. 그동안 국내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정씨가 머물 곳으로 유력했던 독일을 중심으로 행적을 쫓았죠. 그런데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니 독일 검찰이나 경찰을 비롯해 교민들이 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고, 시내의 가게나 상점들도 모두 문을 닫아서 취재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오더라고요. (그 와중에 정유라 씨가) 덴마크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장 올보르로 달려갔죠.
▼ 체포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정씨가 덴마크에 있을 거라고 예상했나요.
전혀요. 여러 루트를 통해 접한 정보로 ‘정씨가 덴마크에 있을 수도 있겠다’ 싶긴 했는데 확신이 서진 않았어요. 더구나 덴마크는 너무 생소한 나라잖아요. 그리고 정씨는 한창 팬시(Fancy)한 것들을 좋아할 나이고요. 자신과 별 연고도 없는 덴마크, 그것도 조용한 외곽에서 머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독일에 비해 교민도 별로 없어서 현지 취재 자체가 불가능한 터라 정확한 제보 없이는 섣불리 가기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 매체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PD인데, 취재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저는 2008년 광우병 파동 때부터 1인 미디어를 운영하다가 2014년부터 길바닥 저널리스트라는 이름을 걸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후원 계좌를 통해 취재 비용을 마련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자비로 충당합니다. 이번에도 차량 렌트를 포함해 총 7백만~8백만원가량을 사용했어요.
▼ 큰돈을 들여가면서까지 정유라 씨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나요.
지금껏 길바닥 저널리스트 채널에서 가장 조회수가 높은 게시물이 2015년 10월 29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제50회 전국여성대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을 당시의 영상이었어요. 그때 이화여대 학생들이 박 대통령의 방문을 반대하면서 사복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는데 국내 어떤 주요 언론도 해당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이대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고, 이듬해 미래라이프 대학 설립 사태와 정유라 씨 특혜 비리가 연달아 터지면서 정씨를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엄마 최순실 씨도 컨트롤이 안 되는 딸이기 때문에 정씨를 만나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 정씨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뭐였나요.
‘세월호 7시간’이죠. 엄마와 관계가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또 좋을 땐 모녀간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고 들었어요. 어쩌면 그날 대통령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엄마에게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씨는 “당시 임신 중이었다. 엄마와 사이가 틀어져 아예 연락을 안할 시기였다”고 하더군요. 출산한 게 2015년 5월인 것을 생각해보면 정씨의 발언은 거짓이었죠.
▼ 당시엔 정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나요.
이미 인터뷰를 할 때부터 정씨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취재진을 갑작스레 만나면 대답을 피하거나 답이 꼬이게 마련인데, 정씨는 너무나 차분한 어조로 적극적인 답변을 늘어놓잖아요. 준비한 답변을 한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죠.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서 정씨의 답변에 충분히 반론을 제기할 겨를이 없었던 게 사실이에요.
▼ 어렵게 정씨를 만났을 땐 기분이 어땠나요.
짜릿했죠. 본격적으로 정씨에 대해 취재를 시작한 건 지난해 10월부터였어요. 정씨와 인연이 있을 법한 인물들의 SNS를 전부 뒤졌고, 실제로 함께 학교를 다닌 친구들을 수소문해 만나보기도 했어요. 정유라 씨에 대한 집착이었죠. 그런데 그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정씨의 존재는 알지만,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성격이 별나다” “친구가 없다”였어요. 보통 그 나이의 여대생들은 친구들과 어울리게 마련인데, 정씨에겐 그런 친구 한 명 없었던 거예요.
▼ 정씨를 만났을 당시 상황을 좀 더 소개해주세요.
심리를 마치고 선고를 앞둔 휴정 시간이었는데,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경황이 없었죠. 사실 직장을 그만두고 쉬고 있는 후배 PD 한 명을 “유럽 여행하자”며 데려갔었어요. 정씨를 맞닥뜨렸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하라고 후배에게 당부하고 저는 정씨와 시선을 맞추고 인터뷰를 진행했죠. 법정 안에서 녹취나 촬영이 금지돼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정씨의 육성을 담아내는 것이 우리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 선고 결과가 나온 후 정씨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4주간 덴마크 구치소에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변호인에게 기대어 울더라고요. 추가로 인터뷰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바로 압송 절차를 밟는 바람에 시도하지 못했어요.
▼ 덴마크 법원에선 “법정 내 허가받지 않은 촬영과 녹음이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던데요.
정유라 씨의 변호를 맡은 현지 대형 로펌 tvc 소속의 얀 슈나이더 변호사가 법원에 문제 제기를 한 것이더라고요. 만일 덴마크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 부분은 제가 감수해야죠. 하지만 정씨의 육성과 영상을 공개한 것을 후회하진 않아요.
▼ 이후 덴마크에서 정씨의 행적에 대해 추가 취재를 해봤나요.
정씨가 머물렀던 집과 동네를 가봤어요. 정씨가 빌린 집은 월세가 2백40만~2백50만원 정도 하더라고요. 제가 정씨의 자택을 찾았을 땐 모든 창문에 블라인드가 쳐져 있어서 안을 볼 수 없었어요.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현지 경찰로부터 “사생활 침해 소지가 있다”고 여러 차례 제지를 받았고요.
▼ 매체에 소속돼 있다면 좀 더 취재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나요.
저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1인 미디어를 운영하던 게 본업이 된 케이스예요. 인터넷 매체에서 제의가 와 1년 정도 그곳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데스크로부터 취재 지시를 받아서 일하는 것이 저와는 잘 맞지 않더라고요. 특히 세월호 사고를 취재하면서 언론사의 접근 방식에 화가 났어요. 다들 자극적인 것만 따라갔지, 세월호 유가족들이 원하는 진상 규명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죠.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언론의 기능이 마비된 거예요.
▼ 독립 PD로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없나요.
외국에선 독립 저널리스트의 지위를 인정해주는데 우리나라엔 아직 그런 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게 사실이에요. 취재를 나가면 “소속이 어디냐”부터 따져 물으니까요. 수입이 일정치 않다는 것도 어려움 중 하나예요. 특정 저널리스트에게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좋을 것 같아요.이번에 제가 부담을 무릅쓰고 정유라 씨 인터뷰에 뛰어든 이유 중 하나도 ‘독립 저널리스트도 얼마든지 기성 매체에 뒤지지 않는 뉴스를 전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컸기 때문이죠.
▼ 아이템을 선정하는 기준이 따로 있나요.
‘남들 하는 건 하지 말자’예요. 기성 매체들이 하고 있는 걸 굳이 저까지 할 필요 없잖아요. 기존 언론에서 보여주는 그림 외에 다른 면을 밝히려고 노력 중이죠. 혹자는 언론이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허상이라고 봐요. 기성 언론의 왜곡 보도가 시작되는 것은 권력자들의 목소리를 먼저 듣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현재의 언론사 시스템 하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길바닥 저널리스트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우선적으로 보도하고 후에 반론을 듣는 방식으로 운영해요. 영상 구성 자체도 기존의 뉴스와는 달라요. 기존의 뉴스엔 리포팅이 들어가지만 저는 전혀 손질하지 않은 날것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 외부의 압력이나 항의를 받은 적은 없나요.
‘박사모’와 관련된 영상을 올렸을 땐 “선동꾼”이라며 고소하겠다는 말도 들었죠. 만약 제 보도 내용이 잘못됐다면 무척 신경 쓰이겠지만 그건 아니잖아요. 항의 메시지만 받았을 뿐 실제로 고소를 당한 적은 없어요.
▼ 한 언론이 정유라 씨의 소재를 파악하고 경찰에 신고한 뒤 이를 취재한 것을 두고 해석이 분분해요. 박 PD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힘들지만, 만약 저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몇날 며칠을 기다려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페이스북 라이브 같은 채널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전하며 보도 압박을 했을 것 같아요. 정씨의 행적을 찾아서 속보를 내고 단독 보도를 하는 게 아니라, 심도 깊은 인터뷰를 위해 그와는 다른 선택을 했을 거예요.
▼ 앞으로의 취재 방향은 정했나요.
현지 취재를 다녀온 이후 여러 루트를 통해 관련 제보들을 받고 있어요. 정씨가 아직 덴마크에 있으니 조만간 한 번 더 현지에 가서 관련 취재를 이어갈 계획도 있어요. 정씨가 귀국하지 않고 버티는 건 최순실 씨가 여전히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의미예요. 길바닥 저널리스트가 할 일이 많다는 얘기죠.
사진 지호영 기자
디자인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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