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콩쿠르는 임 씨에게 단순한 성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세계적인 명문 커티스음악원 출신의 촉망받는 연주자였던 그는 7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바이올린 연주자로 성장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귀국했다가 엄마, 이모와 함께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순간이었다. 이후 그의 시간은 병원 생활과 재활로 채워졌다. 6차례의 수술, 그리고 4년간 멈춘 연주. 무대 위는 더 이상 당연한 곳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연주를 시작한 것은 2024년 6월이다. 처음에는 똑바로 앉아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예전처럼 오래 연습을 할 수도 없었다. 대신 그는 연습의 기준을 바꿨다. 몸을 만드는 시간을 연주 연습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고통은 지금도 24시간 그의 곁에 있지만, 그는 고통을 피하기보다 함께 가는 법을 택했다.
그 변화는 빠르게 결과로 이어졌다. 연주 재개 이후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와 잔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국제 콩쿠르에서 잇따라 준결선에 진출했고, 2025년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결선 무대에서 그는 휠체어에 앉아 한경arte필하모닉과 협연했다. “휠체어를 타고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가장 큰 수확이에요.” 그의 말에는 담담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우승의 순간보다 더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다. 연습하지 못했던 날들, 다시 시작한 날들, 그리고 제한 속에서 연주하는 현재까지. 임현재 씨의 하루는 여전히 재활로 시작해 연습으로 끝난다. 그 반복 속에서 그의 연주는 오늘도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큰 사고 이후 오랜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사고 직후의 기억은 뜨문뜨문해요. 중환자실에서 보낸 시간은 지금 떠올려도 가장 선명하게 아픈 구간이에요. ‘힘들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정말 생사 사이를 오가는 시간이었거든요. 코로나 시기라 면회도 쉽지 않았고, 엄마와 이모 모두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그 시간을 온전히 혼자 버텨야 했어요. 현실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많이 버거운 순간들이었죠. 병원 생활은 거의 2년 정도 이어졌고, 그사이 수술도 여러 차례 받았어요.
바이올린을 4년간 내려놓는 동안, 연주자로서의 정체성은 어떻게 지켜왔나요.
처음에는 그러지 못했어요. 아빠에게 부탁해 병원에서 바이올린을 한번 꺼내 연주를 시도해보고, ‘지금은 도저히 안 된다’는 걸 확인한 뒤에는 그냥 닫아버렸어요. 못 하니까 미워졌고, 그래서 아예 쳐다보지 않게 됐죠. 그 당시에는 클래식 음악도 일부러 듣지 않았어요. 대신 다른 것들로 시간을 채웠어요. OTT 드라마도 정말 많이 봤고, 병원에 있을 때부터 공예 같은 것도 했어요. 밖에 나오고 나서는 영상 만드는 걸 좋아해서 아이들 타깃의 퀴즈 채널을 해보기도 했고, 성능 좋은 컴퓨터를 사서 3D 그래픽을 독학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음악을 대신할 무언가를 찾으려던 몸부림이기도 했고, 동시에 ‘음악이 없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해보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다시 연주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처음부터 ‘다시 연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어요. 주변 소개로 아이들 레슨을 몇 개 맡게 됐는데, 막상 가르치기 시작하니까 생각보다 훨씬 좋더라고요. 원래 가르치는 걸 좋아하고 재능도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다시 해보니 ‘아, 이게 내 본업이구나’라는 감각이 확 왔어요. 학생들이 눈에 띄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행복했고요. 레슨하다 보면 결국 제가 직접 연주를 보여줘야 하는 순간들이 생기잖아요. 그렇게 음악이 제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다시 들어왔고, 그 과정에서 ‘나도 다시 해야겠구나’라는 마음이 생겼어요.

2017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원 재학 시절 학생 리사이틀 시리즈에서 연주하고 있는 임현재 씨.
신체적인 어려움은 한 부분만 고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몸 여기저기가 다 무너진 상태라 한 번에 회복되는 구조가 아니었고, 한동안은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중심을 잡지 못했어요. 정서적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온 무력감이 가장 괴로웠어요. 이유 없이 ‘계속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몸이 힘들면 마음이 무너지고, 마음이 무너지면 다시 몸이 더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죠. 그래서 병원에서도 계속 무언가를 찾았어요. 열이 40℃까지 오르는 상태에서도 공예를 하고, 무언가를 만들며 몰입하려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당시 제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다시 연주하기 위해 변화가 필요했던 부분이 있다면요.
처음에는 앉아서 악기를 들고 연주 자세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고, 방법도 알지 못했죠. 그래서 선생님들과 상의하고, 줌 레슨을 받고, 제 연주를 찍어 비교하면서 하나씩 방법을 찾아갔어요. 이건 하루아침에 깨닫는 변화라기보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조금씩 찾아온 변화였어요. 연주를 시작하겠다 마음먹고 윤이상국제콩쿠르를 준비하면서는 연습을 과하게 하다 손을 다쳐 잠시 쉬어야 했던 적도 있었어요. 지금도 제 상태를 ‘완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다만 분명한 건, 계속 달라지고 있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감각이에요. 그 과정 자체가 재미있어요.
삶의 큰 변화를 지나오며 음악을 바라보는 철학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음악하는 나와 음악을 하지 않는 나로 나누지 않게 됐다는 점이에요. 음악은 결국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영역이잖아요. 성품이나 인격,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요. 그래서 이제는 음악을 특정 순간의 작업이 아니라, 제 일상과 인생 전체의 연장선으로 느껴요.
다시 무대에 섰던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무엇이었나요.
이번 콩쿠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결과가 아니라 예선 무대에 처음 섰을 때였어요. 이상할 만큼 행복했어요. ‘콩쿠르니까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떠나, 연주 그 자체에 이렇게 집중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죠. 그때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이 음악을 어떻게 전달할까’였어요. 작곡가의 의도와 제 해석이 어긋나지 않게 붙여보려 했고, 듣는 사람은 왜 이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지, 저는 무엇을 건네고 싶은지를 계속 고민했어요.
우승 소식을 들었을 때의 감정은 어땠나요.
솔직히 말하면 그 순간에 ‘엄청 기쁘다’는 감정이 먼저 오진 않았어요. 좋긴 했지만 담담했어요. 아마 인생에서 이미 큰일을 겪어서 그런 것 같아요. 우승의 의미가 작다는 건 아니지만, 저는 이미 ‘매일이 소중하다’는 걸 먼저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우승의 순간보다 더 크게 남아 있는 건, 무대에 올라 연주를 시작했던 그 순간이에요. 결과와 상관없이 그때 느꼈던 행복감은 지금도 또렷해요.

2025년 12월 10일 열린 서울국제음악콩쿠르에서 하동완 피아니스트(오른쪽)와 협연하는 모습.
“시련을 극복한 스토리보다 음악으로 평가받고 싶어”
‘연륜이 느껴지는 연주’라는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이나요.나이가 들었다고 연주가 저절로 깊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이번 결선에서 연주했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돌이켜보면, 사고 이전에는 그 곡이 담고 있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사고 이후의 시간을 지나오며 같은 곡을 다시 마주했을 때 감정의 결이 분명히 달라졌다는 걸 느꼈어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겪게 된 일들이 있었고, 그런 경험들이 감정과 표현 방식으로 연주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 같아요.
우승 소감이 궁금합니다.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재활이라는 시간이 워낙 길었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저를 붙잡아준 사람들이 있었어요. 연주를 다시 시작할 때는 자세부터 거의 처음 배우는 것과 다름없었어요. 선생님들이 제가 엇나가지 않게 방향을 잡아주셨고, 조급해하지 않고 제 속도를 믿고 기다려주신 부분이 정말 컸어요. 2024년에 KBS 한전음악콩쿠르에 도전했다가 나오던 길에 커티스음악원 동기인 이원석 오빠를 우연히 만났어요. 저를 보자마자 “현재야, 너 여기 뭐 협연하러 왔어?”라고 물었는데, 그 한마디가 다시 악기를 자신 있게 잡을 수 있는 힘이 됐어요. 은사 미도리 선생님께도 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하겠다 마음먹고 선생님께 연락을 드린 후 줌으로 이야기하고 레슨을 받으며 하나씩 호흡을 가다듬었어요. 선생님은 공연 일정 중에도 시간을 내 한국에 들러 지도해주셨어요. 음악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정말 많이 배우고 존경하는 분이에요.
재활과 복귀 과정이 관객에게 울림을 줍니다. 이런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동정으로 읽히는 게 싫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시선의 중심이 응원이라는 걸 알아요. SNS에서 “용기를 얻는다”는 DM을 받을 때는 오히려 제가 더 힘을 얻어요. 다만 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제 스토리보다 음악이에요. 결국에는 음악으로 울림을 만들고 싶거든요. 연주를 통해 누군가에게 기쁨이든 위로든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을 건네는 것, 그게 제가 음악을 하는 가장 큰 이유이자 정말 기쁜 일이에요.
현재의 연주에서 가장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가요.
저는 제가 정체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몸도 연주도 계속 좋아지고 있고요. 지금 제 삶의 키워드는 ‘변화’와 ‘성장’이에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다는 감각이 저를 계속 움직이게 해요.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레퍼토리나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있나요.
지금은 새로운 곡을 많이 늘리기보다, 음악을 대하는 방식 자체를 넓혀가고 싶어요. 연습 시간보다 운동 시간이 더 중요해졌고, 제가 건강하고 힘이 있어야 연주에도 영향을 준다는 걸 절실히 느끼거든요. 육체와 정신은 떼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요.
물리적으로 연습 시간이 제한되다 보니 오히려 더 ‘생각하는 연습’을 하게 됐어요. 다른 연주자의 음악이나 기타 장르의 음악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고 느끼고요. 그런 방식으로 제 음악의 폭을 조금씩 확장해가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임현재라는 이름이 어떤 음악가로 기억되길 바라나요.
제가 겪은 시련의 이야기보다, 결국엔 ‘음악으로 사람에게 닿는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제 연주를 듣고 ‘좋다’에서 끝나도 좋아요. 그게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든 위로가 되든, 혹은 단 한 번이라도 다시 삶을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도 좋고요. 연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바이올리니스트임현재 #서울국제음악콩쿠르우승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사진제공 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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