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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숨을 데 없는 캐릭터, 그래도 도망치지 않길 잘 했어요”

‘살인자의 리포트’ 배우 조여정

정세영 기자

2025. 09. 24

배우의 바람이 ‘다양한 배역과 변신’이라면 조여정은 올해 이 목표를 이룬 것 같다.
첼리스트를 연기한 영화 ‘히든페이스’와 좀비 헌터로 분한 ‘좀비딸’,
그리고 ‘살인자 리포트’ 속 베테랑 기자까지. 믿고 보는 배우 조여정의 변신은 언제나 반갑다.

이쯤이면 ‘스크린의 여왕’이라 할 만하다. 배우 조여정 얘기다. 최근 극장가엔 조여정이 주연한 영화 두 편이 약 한 달 사이로 개봉했다. 올여름 5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좀비딸’과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살인자 리포트’다. 이는 조여정이 영화계의 대체 불가 여배우임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여정은 1997년 패션 잡지 모델로 얼굴을 알렸다. 이듬해 SBS 시트콤 ‘나 어때’를 통해 배우로 데뷔한 뒤 영화 ‘인간중독’ ‘워킹걸’ ‘히든페이스’, 드라마 ‘완벽한 아내’ ‘99억의 여자’ ‘하이클래스’ 등 스크린과 안방을 넘나들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2019년 개봉한 영화 ‘기생충’으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은 그는 자신의 연기를 증명하기 위해 더 타이트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기생충’ 이후 출연한 작품이 영화, 드라마 통틀어 10편 정도다. 

27년째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조여정은 자신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기에 존재하는 배우”라고 정의한다. 작품마다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를 끝없이 몰아붙인다는 그는 “연기는 이제 선택이 아닌 책임이 됐다”고 말한다. 

지난 9월 개봉한 ‘살인자 리포트’ 역시 그에게 호기심과 부담감을 느끼게 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특종에 목마른 베테랑 기자 선주(조여정)에게 정신과 의사 영훈(정성일)이 연쇄살인을 고백하는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밀착 스릴러 형식으로, 조여정은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을 누비며 정성일 배우와 치열한 연기 대결을 펼친다. 조여정은 “시나리오를 읽은 뒤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며 “그럼에도 자신을 믿고 손을 내밀어준 감독님과 배우들, 제작진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여정은 인터뷰 내내 자기 생각을 꾸밈없고 정확하게 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대화 도중 수차례 호흡과 말을 고르며 주연 배우로서 가진 영화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깊이 있게 전달해나갔다. 



조여정이 출연한 영화 ‘살인자 리포트’ 포스터.

조여정이 출연한 영화 ‘살인자 리포트’ 포스터.

믿음에서 시작된 작품

영화 ‘기생충’ 개봉 이후 쉬지 않고 달려온 느낌이에요. 

맞아요. 빨리 현실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 나이대에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무엇보다 영화의 성공으로 인해 제 연기가 과대평가를 받는 것이 무서웠어요. 그래서 쉬면 안 되겠다 싶었죠. 힘들었지만 진짜 내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다행히도 운 좋게 훌륭한 작품을 연달아 할 수 있었고,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줄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해요.

체력적으로 힘들진 않았나요.

지쳐서 쉬고 싶던 시기도 있었어요. 그때 마침 놓치고 싶지 않았던 영화 ‘히든페이스’가 들어왔고, ‘살인자 리포트’와 ‘좀비딸’을 제안받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신기해요. 다소 어두운 소재인 ‘히든페이스’와 ‘살인자 리포트’를 하면서 힘이 들 때쯤 유쾌한 ‘좀비딸’을 촬영하게 됐으니까요. 이런 점도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살인자 리포트’를 본 소감이 궁금해요.

말로 표현하기 너무 어려워요. 이 영화는 사실 작년에 극장 시사에서 처음 봤었어요. 그 후 약 1년 뒤인 언론시사회에서 다시 한번 보게 됐죠. 결론적으로 몰입감 있게 잘 나온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복수를 소재로 한 작품은 넘쳐나요. 하지만 ‘살인자 리포트’처럼 ‘밀실’ ‘인터뷰’ 등 신선한 요소를 활용해 죄책감과 복수를 풀어낸 영화는 많지 않거든요. 새롭게 구현된 방식이 관객들에게도 잘 전달되길 바랄 뿐이죠. 

작품을 결정할 때 고민은 없었나요. 

너무 무서웠어요. 배우들은 표현을 안 할 뿐이지 자신의 연기 밑천이 드러날까 늘 두려워해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특히 이 영화는 연기적으로 숨을 데가 없었어요. 그럼에도 이 작품을 선택한 건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오면 또 도망가겠구나’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도전하기로 마음먹었고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잖아요. ‘실력을 그대로 드러내고 매를 맞아보자’라는 생각으로 작품에 임했어요. ‘살인자 리포트’는 조영준 감독님이 오래전에 쓴 시나리오예요. 그동안 철저히 준비해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죠. 인터뷰만으로 2시간을 끌고 가야 하는 새로운 형식이었지만, 작품 자체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았어요. 늘 그랬듯 ‘내가 연기를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뿐이었죠. 매 신이 도전이자 모험이었는데,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독님은 여정 씨의 어떤 점에 끌려 작품을 제안했을까요.

저도 처음에는 ‘뭘 믿고 내게 이런 역할을 맡기셨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감독님과 첫 미팅을 해보니 알겠더라고요. 감독님의 눈이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이 연기하는 걸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스스로는 연기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데, 온전히 저를 믿어주시는 걸 보며 함께해봐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데뷔 27년 차예요. ‘기생충’을 통해 글로벌 배우로 도약했고, 유수의 영화 시상식에서 굵직한 상을 휩쓸었죠. 그럼에도 연기에 대한 확신이 안 서나요. 

결과물을 떠나서 과정이 힘든 경우도 있잖아요. 측근들은 잘 아는데, 저는 사시나무 떨듯이 덜덜 떨면서 연기해요. 그런 제가 괜찮아 보일 수 있는 건 베테랑 제작진 덕분이고요. 시나리오, 연출, 분장 등 많은 전문가가 저를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그 도움 덕분에 ‘연기를 해야겠다’는 용기가 생기고요. 또 가족들이 늘 냉정하게 평가해줘서 들뜨지 않고 오래 연기를 해온 것 같아요. 

한 공간에서 배우의 대사와 움직임, 감정만으로 2시간을 끌고 나가는 형식이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촬영에 임했지만 쉽진 않았어요. 일단 대사가 너무 많았거든요. 매니저는 제가 하는 말이 대사인지 대답인지 헷갈릴 정도였죠. 또 영화가 정성일 배우와 저의 대사로 진행되고, 밀착 촬영으로 이뤄지니 너무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래서 더욱 마음을 내려놓고 연기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못하면 못하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보여주기로 했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시작하면 되고요. 이러한 마인드로 임하니 마음이 아주 조금은 편해지더라고요. 

연극 같은 형식,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이 장점이자 단점이었을 것 같아요.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힘들었던 건 대사량이에요. 시나리오 자체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사와 상황으로 구성돼 있었거든요. 그래서 대사를 조각조각 암기하는 것보다 아예 통으로 외우는 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정성일 배우가 대사량을 두고 “감독님을 죽이고 싶었다”라고 말했는데, 저는 그 심정이 너무나 이해되더라고요(웃음). 사실 정성일 배우가 저보다 대사량이 더 많아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다’라는 생각도 했어요. 오빠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대사가 조금 적었던 게 저에게는 큰 안심이 됐거든요. 

백선주는 특종을 따내야 하는 기자예요. 딸 양육권을 두고 이혼한 남편과 다툼을 벌이고 있죠.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석했나요.

선주는 녹록지 않은 삶을 살고 있어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서 좌절하기도 하고요. 선주가 특종을 위해 인터뷰에 응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속마음은 달라요. 이런 모습이 누군가에겐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전 공감이 되더라고요. 누구나 어떤 일에 관해 진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아닌 척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선주도 이와 비슷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자기 일은 똑 부러지게 처리하지만 결혼이나 육아 등에서 난관을 겪는 것도 지극히 인간답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극 후반부로 갈수록 선주에게 100% 몰입된 것처럼 보였어요. 

마지막에 선주가 모든 걸 알고 스위트룸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장면을 찍을 때는 저 역시 캐릭터에 잠겨 있는 상태였어요. 그때는 정말 무슨 정신으로 연기했는지 모르겠어요.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저런 모습이었구나’라는 걸 확인하게 됐죠. 제가 집중력은 좋은 편인데 체력이 약하거든요. 이 작품은 집중력과 체력이 모두 필요했기에 컨디션 조절에도 신경을 썼어요. 많이 걱정했는데 마지막까지 큰 어려움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호텔방을 나오는 신을 찍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나요. 

시나리오에는 한 줄 적혀 있었어요. ‘무너져 내리면서 통곡의 벽 앞에서 오열하는 선주’. 대사 그대로 좌절과 안도, 허무함이 공존했던 것 같아요. 사실 편집된 장면이 있어요. 선주가 스위트룸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서 얼굴을 닦고 집에 돌아가요. 그 후 아이를 만나 안아주고, 울고 난 뒤 악몽을 꾸고, 테라스에서 죄책감에 우는 신이에요. 영화에서는 복도에서 걸어 나와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모습만 나왔고요. 편집된 장면은 감독님께서 필요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관객들도 선주라면 충분히 그랬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을 테니까요. 

영화에서는 기자로서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실제로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죠. 가장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다면요. 

“오늘 컨디션 괜찮아?”라는 질문이요. 별말 아닌 것 같지만 저는 그 말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얻어요. 보통은 촬영 현장에서 연기, 리액션 등 대부분 일적인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컨디션 괜찮냐” “별일 없냐”와 같은 개인적인 상황이나 상태를 묻는 질문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배우가 아닌 인간 조여정을 신경 써주고 있다는 느낌이 감동적으로 다가오거든요.

오늘 컨디션 괜찮나요.

너무 좋아요(웃음). 사실 어제(9월 3일) 영화와 관련해 뒤풀이 행사가 있었는데 술을 안 마셨거든요. 그랬더니 확실히 컨디션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에 잠은 잘 안 오더라고요. 많이 못 잤어요.

조여정은 ‘살인자 리포트’ 에서 특종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기자 백선주를 연기했다.

조여정은 ‘살인자 리포트’ 에서 특종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기자 백선주를 연기했다.

“일과 사랑 모든 걸 가질 순 없어요”

지난해 출연한 유튜브 채널 ‘성시경의 만날텐데’에서 “비혼주의는 아니다”라고 말했어요. 결혼에 대한 조급함은 없나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혼보다는 일에 대한 비중이 높아졌어요. 작품을 할 때는 오직 역할에 집중하고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일과 사랑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에 대한 조급함을 가지는 것 자체가 욕심인 것 같고요. 저는 욕심쟁이가 될 생각은 없어요(웃음).

현재 차기작으로 이창동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가능한 사랑’을 촬영 중이라고요.

맞아요. 너무 꿈같은 일이에요. 이창동 감독님이 저를 찾아주실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요. 지금도 믿기지 않아요. 이창동 감독님 영화에 제가 필요한 순간이 있을까 싶었는데, 상상이 현실이 됐어요. 저는 특별한 재주가 없기에 그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고요. 

#조여정 #살인자리포트 #여성동아

사진제공 에이투지엔터테인먼트 소니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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