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에서 청춘을 불살라 일가를 이룬 이들의 인생은 부와 명성을 떠나 그 자체로 마음이 숙연해지게 한다. 1976년 민중극단의 작품 〈꿀맛〉으로 데뷔해 40년이라는 세월을 무대에 바친 연극계의 거장 윤석화(60)도 그런 부류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83년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TV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얻은 그는 이후 뮤지컬 〈명성황후〉 〈덕혜옹주〉, 연극 〈마스터 클래스〉 등의 대작을 휩쓸며 공연 예술과 대중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촉매 역할을 하고, 공연 제작사 ‘돌꽃컴퍼니’와 설치극장 ‘정미소’ 대표로 활약하며 척박한 연극 무대를 물심양면 후원해왔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인생에 늘 햇볕만 들었던 건 아니다. 1997년 〈명성황후〉의 미국 뉴욕 공연 캐스팅에서 제외돼 슬럼프에 빠진 적도 있고, 2007년에는 데뷔 초 밝힌 학력이 거짓이었음을 스스로 밝혀 30년 넘게 뿌리내린 배우로서의 신뢰감이 송두리째 흔들린 적도 있다. 그런 와중에도 변함없이 그를 지지하는 팬들을 생각하며 연극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그가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아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1998년 그에게 최연소 ‘이해랑연극상’의 영예를 안기고, 오랜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한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의 모습을 18년 만에 다시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것. 이 작품은 마리아 칼라스가 경험한 사랑과 배신, 성공과 좌절을 그린다. 2월 2일, 연극 준비에 한창인 그를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만났다. 10여 년 전 취재를 위해 만났을 때보다 주름은 많이 늘었지만, 소녀 같은 미소는 그대로였다.
▼ 인생의 3분의 2를 연극인으로 산 소감은 어떤가요.
어떻게 살아냈는지 모르겠어요. 살아냈다는 표현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는 얘기지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잠깐 꿈을 꾼 것 같아요. 결국 감사한 것만 기억하고 싶고, 감사할 게 있다는 것 또한 감사합니다.
▼ 데뷔 40주년 기념 작품으로 하필이면 왜 〈마스터 클래스〉를 선택했나요.
이 작품 안에 제가 왜 연극을 하는지에 대한 답이 있거든요. 윤석화는 왜 40년 동안 연극을 했고 오늘도 왜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려고 하는가, 예술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 여자는 연극을 통해 우리에게 뭔가를 주려고 자꾸 노력하는가, 또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거친 광야 같은 곳에서 왜 아직도 연극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어요. 더불어 관객 역시 예술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마리아 칼라스의 삶을 빌려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요.
제가 마리아 칼라스보다 글로벌하지는 못하지만 무대에서 연기한 시간은 그녀보다 더 길어요. 그래서 이 작품은 관객이 ‘마스터 클래스(유능한 전문가가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의 청강생이 되는 거라고도 할 수 있죠. 오페라가 없어도 내일의 태양은 떠오를 거고 예술이 없어도 세상은 돌아갑니다. 하지만 예술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정신적으로 보다 성숙해지고 풍요로워지죠. 예술은 우리 삶을 변화시켜요. 디지털만큼 편리하게 자주 접할 순 없지만 책 한 권을 읽고 공연을 한 번 보고 갤러리를 찾는 것이 자신의 삶과 영혼을 아름답게 성장시킬 수 있거든요. 그게 바로 제가 연극을 하는 이유죠.
▼ 작품에 임하는 느낌, 인물을 대하는 자세가 18년 전과는 다를 것 같아요.
예전에는 마리아 칼라스의 기질이 저와 너무 똑같아서 거기서 용기도 얻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패기가 만만했다면, 지금은 저와 닮아서 오히려 객관화되지 않을까 봐 두려움이 커졌어요. 그런데 그 두려움이 어쩌면 18년 전보다 이 작품을 더 열심히 준비하게 하는 것 같아요.
▼ 연극배우 박정자 씨도 “윤석화는 마리아 칼라스를 꼭 닮았다”고 평했던데, 스스로 생각할 때 그녀와 닮은 점과 다른 점을 꼽는다면.
닮은 점은 겉모습만 보면 화려하고 편한 삶을 사는 것처럼 비친다는 거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부자도 아닌데 학교에도 부잣집 딸로 소문이 나고 ,연극을 하면서도 힘들 때가 많았는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신의 아그네스〉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 때도 저는 라면 하나 맘 편히 못 끓여 먹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차비가 없어서 바깥을 못 나간 적도 있고요. 결국 다 뛰어넘었는데, 마리아 칼라스 역시 웬만한 사람 같으면 포기할 만한 역경을 다 넘어선 여성이에요.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죠. 그렇기에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로부터 버림받은 후 상심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유명인이기에 개인적인 상처와 아픔을 숨길 데가 없었다는 점도 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점은 세계적으로 그녀만큼 유명하지도 않고, 오나시스 같은 갑부의 아내도 아니라는 거죠. 그 점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요. 저도 여자로서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지만, 삶의 규모에 눌려 갇혀 살다시피 한 마리아 칼라스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살고 있거든요. 물론 한국의 문화 사절로 외국을 방문할 때는 품격을 갖추지만, 보통 때는 김칫국물 뚝뚝 흘리면서 밥을 먹곤 해요. 마리아 칼라스보다는 덜 외로운 ‘무수리’과죠.
▼ 작품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여배우로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작품이기 때문에 운동을 열심히 해요. 한 달 전부터는 퍼스널 트레이닝도 받고 있어요. 대본도 현재에 맞게 수정해 마지막 손질 중이고요. 대사를 속사포처럼 토해내야 하는데 혀가 그만큼 잘 돌아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시간 날 때마다 대본을 소리 내 읽고 있어요. 또 우리 나이에는 힐을 신고 다니면 무릎이 상하는데 그럼에도 가급적 힐을 신어요. 버릇을 들여놔야 무대에서 종횡무진 걸을 수 있거든요. 공연에 모든 걸 맞추는 게 쉽지 않지만 아직은 그럴 수 있다는 데 감사할 따름이지요.
정말 요즘은 주름 있는 사람이 드물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저도 10년 전쯤 후배 손에 끌려가 보톡스라는 걸 처음 맞아봤는데 젊어 보이고 좋았어요. 그런데 한 번 더 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이러다간 끝도 없겠다 싶어 이후론 발길을 끊었죠. 예전부터 꿈이 예쁜 할머니로 늙어가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세안도 꼼꼼히 하고 영양크림도 열심히 바르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젊고 예쁜 배우들을 보면 유혹이 생기긴 해요. 정말 걱정스러울 만큼 주름이 많았던 사람이 드라마틱하게 예뻐져서 나타났을 때 특히요(웃음).
▼ 10여 년 전 인터뷰 때보다 한결 유연해진 느낌이에요.
세월이 준 선물이죠. 힘들 때마다 세속적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고난이 축복이라고 여기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해온 덕분인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삶이 너무 힘들면 사람이 강퍅해지는데 그때마다 ‘완악하고 교만한 것, 편케 하여 주소서~’라는 찬송을 주문처럼 불렀죠. 그러면서 제 안의 욕심과 근심을 내려놓으면 점점 더 많은 걸 포용하게 되더군요. 일할 때만 제외하고요.
▼ 배우로 살면서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데뷔 후 남보다 주목받는 일이 많아 쓸 데 없는 오해와 질투를 사곤 했어요. 그런 시선에 의연하게 대처하려 애쓰다보니 오히려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 1997년 〈명성황후〉 미국 공연을 앞두고 주연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됐을 때는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2013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외적 문제로 갑자기 〈딸에게 보내는 편지〉 취소 통보를 해왔을 땐 정말 절망했어요. 배우로서 상처를 많이 받았고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신의 아그네스〉를 하면서는 목소리에 대한 사형선고를 두 번이나 받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죠.
▼ 학력 논란에 휘말렸을 때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어릴 때 철없이 거짓말을 한 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제가 유명해지고 나서도 그걸 바로잡을 용기를 내지 못한 건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유명해질 줄 몰랐어요. 어쩌면 하나님이 제 조그마한 허물도 남겨두지 않으려고 그런 시련을 겪게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개운해요.
▼ 슬럼프에 빠지면 어떻게 극복하나요.
관객들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죠. 무대라는 허구의 땅에서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맑아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복잡한 감정을 계속 체로 걸러야만 하거든요. 제 삶도 그렇게 해야 평온해진다고 믿으면서 견디죠.
▼ 무대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진실을 꿈꿀 수 있는 땅이에요. 세상에서는 진실하다는 것 그리고 정직하다는 것이 때론 너무도 미련하고 바보 같아 보이지만, 무대라는 작은 허구의 땅에서만큼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오늘 밤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어요. 다만 사는 날까지는 잘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제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에게 제가 보여야 할 최소한의 책임감이자, 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과 친구들에게도 덕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배우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요. 한 방울의 땀과 눈물도 아끼지 않고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해요. 그래서 신이 오늘 밤 저를 부르신다 해도 기쁘게 갈 것 같아요.
▼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가요.
그러려고 노력하죠. 수화에게는 “수화가 엄마 딸이라서 엄마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우리 수화는 엄마랑 같이 살 거지?” 이러면서 애교도 부려요. 엄마한테는 역시 딸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희 언니들을 봐도 딸하고는 노후에 함께할 수 있는 게 많아서 좋더라고요. 아들은 사춘기예요. 좀 더 어릴 땐 딸보다 더 딸 같던 해피한 아이였는데 요즘은 엄마와 말을 잘 안 하려고 해요. 어떤 때는 말도 딱 잘라 하니까 그렇게 예뻤던 제 자식이 맞나 싶고, 배신감에 부르르 떨기도 하죠. 그런데 나이가 주는 지혜가 있더라고요.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 피하는 지혜요. 세상에 엄마의 역할만큼 힘든 것도 없을 거예요. 그래도 아이들에게서 살아갈 힘을 얻어요. 좀 지칠 때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기운이 나거든요.
▼ 작품만큼 육아에도 열정적인 엄마인가요.
작품을 하지 않을 때는 될 수 있으면 아이들에게 제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줘요. 나이가 들어도 엄마가 생전에 해주신 음식이 기억에 많이 남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이 먹을 음식은 직접 만드는 편이에요. 일을 할 때도 아이들을 봐주시는 ‘이모(그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이렇게 불렀다)’에게 제 레시피를 알려드려서 엄마 손맛을 내도록 부탁하죠. 제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엄마가 음식을 통해 전한 사랑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 기억이 힘들 때 아이들을 버티게 해줄 테니까요. 아이들이 제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행복해요. 그러면서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을 던지죠. “엄마가 만든 게 맛있어? 이모가 만든 게 맛있어?” 그러면 “엄마!” 하죠.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요(웃음).
▼ 아이들을 위해 즐겨 하는 요리가 있나요.
간식으로 부침개를 많이 해줬어요. 부침개는 우리 음식이고 채소는 물론 갖가지 재료를 원하는 대로 넣어줄 수 있거든요. 아이들이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부침개를 ‘한국 피자’라고 하는데, 아이들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기에 이보다 좋은 음식이 없어요. 전복찜도 잘해요. 전복이 비싸서 자주는 못 해주지만 가끔 큰맘 먹고 사서 간장 소스 넣고 찜을 해요.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거든요. 안 그래도 수민이가 오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저녁에 귀가하면 전복찜을 하려고 이모에게 부탁해 재료를 준비해놨어요. 우리 아들은 된장국과 김치찌개도 좋아해요. 국물 요리에는 꼭 멸치와 표고버섯. 다시마를 우려낸 물을 쓰죠.
▼ 타임머신이 있다면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나요.
30대요. 살아보니 여자가 가장 아름다운 나이는 30대더라고요. 일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인생도 좀 아는 나이거든요. 갱년기가 오니 신체 변화를 경험할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옛날 사진을 보면 30대 때의 제 모습이 가장 예쁘더라고요. 그때는 왜 젊음을 기꺼이 누리지 못했나 싶어요.
▼ 갱년기를 이겨낸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나요.
그때도 역시 관객이라는 끈을 붙잡고 있었어요. 그들은 제게서 멀어졌을지 몰라도 전 아직 그 끈을 잡고 있죠. 그런 짝사랑은 없어요. 사실 제 자신이 기특할 때도 있지만 너무 싫을 때도 있어요. 정말 아름답게 살아내고 싶은데 그런 생각으로 힘들 때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도저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연극이라는 끈에 의지하죠.
▼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고 싶은가요.
배우는 평생 무대 위에서 다양한 삶을 표현하기 위해 뭔가를 배우는 사람이어야 하기에 ‘배우’가 아닌가 싶어요. 다시 태어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배우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살아봐야죠. 어릴 적 꿈이던 의사가 돼도 좋을 것 같고, 마더 테레사처럼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카메라에 잡히진 않았지만 윤석화는 인터뷰 도중 두 차례 눈물을 쏟았다. 무대 위에서는 객석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이지만 그때만큼은 그가 한없이 여린 여자로 보였다. 연극계의 거목이기 이전에 그도 평범한 엄마이자 아내이며 세월 앞에선 무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그는 지난 40년간 경험한 감정들을 〈마스터 클래스〉에 모두 담아낼 것이다. 〈마스터 클래스〉는 3월 10일부터 열흘간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상연된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인생에 늘 햇볕만 들었던 건 아니다. 1997년 〈명성황후〉의 미국 뉴욕 공연 캐스팅에서 제외돼 슬럼프에 빠진 적도 있고, 2007년에는 데뷔 초 밝힌 학력이 거짓이었음을 스스로 밝혀 30년 넘게 뿌리내린 배우로서의 신뢰감이 송두리째 흔들린 적도 있다. 그런 와중에도 변함없이 그를 지지하는 팬들을 생각하며 연극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그가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아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1998년 그에게 최연소 ‘이해랑연극상’의 영예를 안기고, 오랜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한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의 모습을 18년 만에 다시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것. 이 작품은 마리아 칼라스가 경험한 사랑과 배신, 성공과 좌절을 그린다. 2월 2일, 연극 준비에 한창인 그를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만났다. 10여 년 전 취재를 위해 만났을 때보다 주름은 많이 늘었지만, 소녀 같은 미소는 그대로였다.
#1. 마리아 칼라스와의 재회
▼ 인생의 3분의 2를 연극인으로 산 소감은 어떤가요.
어떻게 살아냈는지 모르겠어요. 살아냈다는 표현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는 얘기지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잠깐 꿈을 꾼 것 같아요. 결국 감사한 것만 기억하고 싶고, 감사할 게 있다는 것 또한 감사합니다.
▼ 데뷔 40주년 기념 작품으로 하필이면 왜 〈마스터 클래스〉를 선택했나요.
이 작품 안에 제가 왜 연극을 하는지에 대한 답이 있거든요. 윤석화는 왜 40년 동안 연극을 했고 오늘도 왜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려고 하는가, 예술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 여자는 연극을 통해 우리에게 뭔가를 주려고 자꾸 노력하는가, 또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거친 광야 같은 곳에서 왜 아직도 연극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어요. 더불어 관객 역시 예술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마리아 칼라스의 삶을 빌려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요.
제가 마리아 칼라스보다 글로벌하지는 못하지만 무대에서 연기한 시간은 그녀보다 더 길어요. 그래서 이 작품은 관객이 ‘마스터 클래스(유능한 전문가가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의 청강생이 되는 거라고도 할 수 있죠. 오페라가 없어도 내일의 태양은 떠오를 거고 예술이 없어도 세상은 돌아갑니다. 하지만 예술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정신적으로 보다 성숙해지고 풍요로워지죠. 예술은 우리 삶을 변화시켜요. 디지털만큼 편리하게 자주 접할 순 없지만 책 한 권을 읽고 공연을 한 번 보고 갤러리를 찾는 것이 자신의 삶과 영혼을 아름답게 성장시킬 수 있거든요. 그게 바로 제가 연극을 하는 이유죠.
▼ 작품에 임하는 느낌, 인물을 대하는 자세가 18년 전과는 다를 것 같아요.
예전에는 마리아 칼라스의 기질이 저와 너무 똑같아서 거기서 용기도 얻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패기가 만만했다면, 지금은 저와 닮아서 오히려 객관화되지 않을까 봐 두려움이 커졌어요. 그런데 그 두려움이 어쩌면 18년 전보다 이 작품을 더 열심히 준비하게 하는 것 같아요.
▼ 연극배우 박정자 씨도 “윤석화는 마리아 칼라스를 꼭 닮았다”고 평했던데, 스스로 생각할 때 그녀와 닮은 점과 다른 점을 꼽는다면.
닮은 점은 겉모습만 보면 화려하고 편한 삶을 사는 것처럼 비친다는 거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부자도 아닌데 학교에도 부잣집 딸로 소문이 나고 ,연극을 하면서도 힘들 때가 많았는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신의 아그네스〉로 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 때도 저는 라면 하나 맘 편히 못 끓여 먹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차비가 없어서 바깥을 못 나간 적도 있고요. 결국 다 뛰어넘었는데, 마리아 칼라스 역시 웬만한 사람 같으면 포기할 만한 역경을 다 넘어선 여성이에요.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죠. 그렇기에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로부터 버림받은 후 상심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유명인이기에 개인적인 상처와 아픔을 숨길 데가 없었다는 점도 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점은 세계적으로 그녀만큼 유명하지도 않고, 오나시스 같은 갑부의 아내도 아니라는 거죠. 그 점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어요. 저도 여자로서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지만, 삶의 규모에 눌려 갇혀 살다시피 한 마리아 칼라스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살고 있거든요. 물론 한국의 문화 사절로 외국을 방문할 때는 품격을 갖추지만, 보통 때는 김칫국물 뚝뚝 흘리면서 밥을 먹곤 해요. 마리아 칼라스보다는 덜 외로운 ‘무수리’과죠.
▼ 작품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여배우로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작품이기 때문에 운동을 열심히 해요. 한 달 전부터는 퍼스널 트레이닝도 받고 있어요. 대본도 현재에 맞게 수정해 마지막 손질 중이고요. 대사를 속사포처럼 토해내야 하는데 혀가 그만큼 잘 돌아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시간 날 때마다 대본을 소리 내 읽고 있어요. 또 우리 나이에는 힐을 신고 다니면 무릎이 상하는데 그럼에도 가급적 힐을 신어요. 버릇을 들여놔야 무대에서 종횡무진 걸을 수 있거든요. 공연에 모든 걸 맞추는 게 쉽지 않지만 아직은 그럴 수 있다는 데 감사할 따름이지요.
#2. 배우로 산다는 것
▼ 요즘은 배우들의 얼굴에서 주름을 찾아보기 힘든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계셔서 좀 놀랐어요.정말 요즘은 주름 있는 사람이 드물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저도 10년 전쯤 후배 손에 끌려가 보톡스라는 걸 처음 맞아봤는데 젊어 보이고 좋았어요. 그런데 한 번 더 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이러다간 끝도 없겠다 싶어 이후론 발길을 끊었죠. 예전부터 꿈이 예쁜 할머니로 늙어가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세안도 꼼꼼히 하고 영양크림도 열심히 바르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젊고 예쁜 배우들을 보면 유혹이 생기긴 해요. 정말 걱정스러울 만큼 주름이 많았던 사람이 드라마틱하게 예뻐져서 나타났을 때 특히요(웃음).
▼ 10여 년 전 인터뷰 때보다 한결 유연해진 느낌이에요.
세월이 준 선물이죠. 힘들 때마다 세속적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고난이 축복이라고 여기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해온 덕분인 것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만큼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삶이 너무 힘들면 사람이 강퍅해지는데 그때마다 ‘완악하고 교만한 것, 편케 하여 주소서~’라는 찬송을 주문처럼 불렀죠. 그러면서 제 안의 욕심과 근심을 내려놓으면 점점 더 많은 걸 포용하게 되더군요. 일할 때만 제외하고요.
▼ 배우로 살면서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데뷔 후 남보다 주목받는 일이 많아 쓸 데 없는 오해와 질투를 사곤 했어요. 그런 시선에 의연하게 대처하려 애쓰다보니 오히려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 1997년 〈명성황후〉 미국 공연을 앞두고 주연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됐을 때는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2013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외적 문제로 갑자기 〈딸에게 보내는 편지〉 취소 통보를 해왔을 땐 정말 절망했어요. 배우로서 상처를 많이 받았고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신의 아그네스〉를 하면서는 목소리에 대한 사형선고를 두 번이나 받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죠.
▼ 학력 논란에 휘말렸을 때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어릴 때 철없이 거짓말을 한 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제가 유명해지고 나서도 그걸 바로잡을 용기를 내지 못한 건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렇게 유명해질 줄 몰랐어요. 어쩌면 하나님이 제 조그마한 허물도 남겨두지 않으려고 그런 시련을 겪게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개운해요.
▼ 슬럼프에 빠지면 어떻게 극복하나요.
관객들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죠. 무대라는 허구의 땅에서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맑아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복잡한 감정을 계속 체로 걸러야만 하거든요. 제 삶도 그렇게 해야 평온해진다고 믿으면서 견디죠.
▼ 무대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진실을 꿈꿀 수 있는 땅이에요. 세상에서는 진실하다는 것 그리고 정직하다는 것이 때론 너무도 미련하고 바보 같아 보이지만, 무대라는 작은 허구의 땅에서만큼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오늘 밤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어요. 다만 사는 날까지는 잘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제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에게 제가 보여야 할 최소한의 책임감이자, 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과 친구들에게도 덕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배우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최선을 다해 살아왔어요. 한 방울의 땀과 눈물도 아끼지 않고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해요. 그래서 신이 오늘 밤 저를 부르신다 해도 기쁘게 갈 것 같아요.
#3. 여자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
어느덧 그의 나이도 예순. 1994년 김석기 당시 중앙종금 사장과 결혼한 그는 가슴으로 낳은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들 수민이는 2003년, 딸 수화는 2007년 입양했다. 손자 손녀를 볼 나이에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녹록지 않을 듯했다.▼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인가요.
그러려고 노력하죠. 수화에게는 “수화가 엄마 딸이라서 엄마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우리 수화는 엄마랑 같이 살 거지?” 이러면서 애교도 부려요. 엄마한테는 역시 딸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희 언니들을 봐도 딸하고는 노후에 함께할 수 있는 게 많아서 좋더라고요. 아들은 사춘기예요. 좀 더 어릴 땐 딸보다 더 딸 같던 해피한 아이였는데 요즘은 엄마와 말을 잘 안 하려고 해요. 어떤 때는 말도 딱 잘라 하니까 그렇게 예뻤던 제 자식이 맞나 싶고, 배신감에 부르르 떨기도 하죠. 그런데 나이가 주는 지혜가 있더라고요.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 피하는 지혜요. 세상에 엄마의 역할만큼 힘든 것도 없을 거예요. 그래도 아이들에게서 살아갈 힘을 얻어요. 좀 지칠 때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기운이 나거든요.
▼ 작품만큼 육아에도 열정적인 엄마인가요.
작품을 하지 않을 때는 될 수 있으면 아이들에게 제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줘요. 나이가 들어도 엄마가 생전에 해주신 음식이 기억에 많이 남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아이들이 먹을 음식은 직접 만드는 편이에요. 일을 할 때도 아이들을 봐주시는 ‘이모(그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이렇게 불렀다)’에게 제 레시피를 알려드려서 엄마 손맛을 내도록 부탁하죠. 제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엄마가 음식을 통해 전한 사랑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 기억이 힘들 때 아이들을 버티게 해줄 테니까요. 아이들이 제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행복해요. 그러면서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을 던지죠. “엄마가 만든 게 맛있어? 이모가 만든 게 맛있어?” 그러면 “엄마!” 하죠.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요(웃음).
▼ 아이들을 위해 즐겨 하는 요리가 있나요.
간식으로 부침개를 많이 해줬어요. 부침개는 우리 음식이고 채소는 물론 갖가지 재료를 원하는 대로 넣어줄 수 있거든요. 아이들이 외국 생활을 오래 해서 부침개를 ‘한국 피자’라고 하는데, 아이들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기에 이보다 좋은 음식이 없어요. 전복찜도 잘해요. 전복이 비싸서 자주는 못 해주지만 가끔 큰맘 먹고 사서 간장 소스 넣고 찜을 해요.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거든요. 안 그래도 수민이가 오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저녁에 귀가하면 전복찜을 하려고 이모에게 부탁해 재료를 준비해놨어요. 우리 아들은 된장국과 김치찌개도 좋아해요. 국물 요리에는 꼭 멸치와 표고버섯. 다시마를 우려낸 물을 쓰죠.
▼ 타임머신이 있다면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나요.
30대요. 살아보니 여자가 가장 아름다운 나이는 30대더라고요. 일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인생도 좀 아는 나이거든요. 갱년기가 오니 신체 변화를 경험할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옛날 사진을 보면 30대 때의 제 모습이 가장 예쁘더라고요. 그때는 왜 젊음을 기꺼이 누리지 못했나 싶어요.
▼ 갱년기를 이겨낸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나요.
그때도 역시 관객이라는 끈을 붙잡고 있었어요. 그들은 제게서 멀어졌을지 몰라도 전 아직 그 끈을 잡고 있죠. 그런 짝사랑은 없어요. 사실 제 자신이 기특할 때도 있지만 너무 싫을 때도 있어요. 정말 아름답게 살아내고 싶은데 그런 생각으로 힘들 때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도저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연극이라는 끈에 의지하죠.
▼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고 싶은가요.
배우는 평생 무대 위에서 다양한 삶을 표현하기 위해 뭔가를 배우는 사람이어야 하기에 ‘배우’가 아닌가 싶어요. 다시 태어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배우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살아봐야죠. 어릴 적 꿈이던 의사가 돼도 좋을 것 같고, 마더 테레사처럼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카메라에 잡히진 않았지만 윤석화는 인터뷰 도중 두 차례 눈물을 쏟았다. 무대 위에서는 객석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이지만 그때만큼은 그가 한없이 여린 여자로 보였다. 연극계의 거목이기 이전에 그도 평범한 엄마이자 아내이며 세월 앞에선 무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그는 지난 40년간 경험한 감정들을 〈마스터 클래스〉에 모두 담아낼 것이다. 〈마스터 클래스〉는 3월 10일부터 열흘간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에서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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