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방영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은 학교폭력 피해자로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성인이 된 그는 우연히 삼겹살이 불판에 구워지는 소리를 듣고 그만 바닥에 주저앉는다. 학창 시절 뜨겁게 데워진 고데기를 팔과 다리에 가져다 댄 가해자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 동은은 죄책감 없이 그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무리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며 순간 정신을 잃는다. 약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옥 같던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동은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 불판에 고기가 구워지며 나는 “치익” 소리가 잊고 싶었던 과거를 현재로 다시 불러오는 트리거 작용을 한 셈이다.
‘트라우마’는 상처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용어다. 심각한 부상, 성폭력 등 외부의 위험한 상황에 직접 노출됐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외상으로, 심신의 건강을 위협하는 충격적인 경험을 통칭한다. 불면, 비현실감, 우울 등과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심하면 두근거림이나 호흡곤란, 목 또는 가슴이 조이는 느낌, 소화불량 등의 신체적 반응도 초래한다.
최근에는 서울시청 역주행 교통사고, 이태원 참사 등과 같은 일상 속 대형 사고로 인한 간접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익숙한 공간에서 발생한 갑작스러운 인명 사고를 지켜보며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트라우마 전문가로 꼽히는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건, 사고에 해당하는 관련 콘텐츠를 접한 뒤 불안감, 무기력증 등으로 병원을 찾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고 말한다. 일상 속 참사로 인한 직간접 트라우마로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받는 이들이 많다는 것. 그는 “관련 증상 및 예방법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 우울, 불안, 알코올중독과 같은 2차적 문제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백종우 교수는 트라우마 분야의 다학제 전문 학회인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3대 회장이다. 보건복지부 중앙자살예방센터장과 중앙심리부검센터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회자살예방포럼 자문위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신경정신의학 정책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트라우마도 종류가 다양하다고 들었습니다.
트라우마를 나누는 기준은 많지만 요즘은 빅 트라우마와 스몰 트라우마로 구분 지어요. 빅 트라우마는 불의의 사고, 재난, 전쟁 등 일상을 넘어서는 커다란 사건으로 개인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험을 뜻해요. 악몽, 공포, 불안, 사회 부적응 등의 증상을 일으키죠. 스몰 트라우마는 가족, 친구 등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반복적인 상처를 의미합니다. 어린 시절 놀림을 받거나 실수해서 마음을 다치는 등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 부정적이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죠. 빅 트라우마는 눈에 보이는 큰 사건들로 인해 발생하기에 자신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인지하기 쉬워요. 사건이 발생한 시간도 특정할 수 있고요. 하지만 스몰 트라우마는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요. 때문에 본인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 알기 어렵죠.
트라우마 종류에 따라 상처의 강도도 달라지나요.
가끔 스몰 트라우마를 가볍게 여기는 분들이 있어요. 정말 잘못된 생각이에요. 여러 가지 스몰 트라우마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이하 PTSD), 경계성인격장애, 사회 불안증, 우울증 등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이러한 현상들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면 복합 트라우마가 발병하는 거고요. 사고 범위나 크기에 따라 상처의 강도를 나눌 순 없습니다.
트라우마에 취약한 성격이 있나요
트라우마를 잘 겪는 성격이 따로 있진 않아요. 그보다 중요한 건 스트레스 지수예요. 당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면 평소에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건들이 트라우마로 다가올 수 있거든요. 또 성장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많이 겪었던 사람이 다시 트라우마에 노출될 확률도 높습니다. 공포로 다가오는 사건에 대해 저항할 힘이 이미 약해진 상태거든요. 이는 트라우마로 인해 생기는 질병인 PTSD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PTSD는 주로 어떤 상황에 나타나나요. 진단 기준이 있다면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전쟁과 같은 위협적인 모습이나 폭력 등을 ‘직접 경험’하거나 비정상적인 죽음, 부상 등을 ‘직접 목격’한 경우 그리고 가까운 지인에게 일어난 경험에 ‘간접적으로 노출’됐을 때입니다. 이런 사건을 경험한 뒤 당시의 기억이 수시로 떠오르거나 꿈에 나타나는 등의 ‘침투 증상’과 관련 기억 및 감정에 대한 ‘회피 증상’, 자신 혹은 주변 세계에 대한 변형된 인식과 외상 사건에 대한 기억상실을 뜻하는 ‘해리 증상’이 나타납니다. 또 짜증과 분노 폭발 및 과잉 경계와 같은 ‘각성 증상’도 일어나고요. 이 중 2가지 증상이 1개월 이상 지속되면 PTSD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PTSD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고요. 대표 증상을 꼽는다면요.
인지 처리에 문제가 생겨 발생하는 해리(dissociation)성 기억상실이요. 너무 고통스러웠던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 거죠. 트라우마는 마음과 함께 기억도 산산조각 나는 경우가 있거든요. 해리성 기억상실로 인해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어요. 성폭력 피해자들이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사건이 벌어진 순간의 정황을 수사기관에 정확하게 진술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고통스러운 기억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는 것은 PTSD의 핵심적인 병리입니다. 회피도 PTSD의 주요 진단 기준이에요. 피해자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당연히 잊고 싶죠. 이는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 기반한 당연한 선택이에요. 즉, 피해자는 자신이 경험한 고통을 어떻게든 잊으려 애쓰고, 연관된 상황을 회피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런 회피가 지속되면 삶의 즐거움, 행복 등의 감정이 무감각해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어요.
신체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없나요.
식은땀이 나거나 호흡이 가빠지고 손과 발에 땀이 나기도 해요. 공포에 따른 반응이죠. 또 소화 기능이 저하되고, 공황발작 등 평소와 다른 신체적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증상이 반복되면 무조건 전문의를 찾아야 해요.
사건을 경험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PTSD 반응이 나타날 수 있나요.
1~2년이 지난 뒤에 PTSD 진단을 받는 경우도 있어요. 당시 슬픔을 억제하다가 추후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거나 경험했을 때 트라우마 반응을 느끼는 거죠. 또 불현듯 사건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과거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들이 고향에 돌아온 뒤 전우들이 사망하는 장면 등이 꿈에 반복적으로 떠올라 불면증을 겪으며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례가 있었어요. 미국에서 이 같은 현상을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파악한 뒤 PTSD라는 질환으로 분류했고요. 이처럼 PTSD는 사고 직후는 물론, 몇 년이 지나서 발병하기도 합니다.
전쟁, 재난 상황 시 자신을 희생하며 타인을 도운 사람들도 트라우마에 시달릴 확률이 높겠네요.
우리는 트라우마라고 하면 보통 참사의 직접적인 피해자들만 떠올리죠. 하지만 사회적 재난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경찰, 소방관, 의료인 등도 트라우마의 위협에 노출돼 있죠. 그중 소방관의 노출도가 큰 편이에요. 국민의 생명을 최전선에서 지키는 소방관들은 처참한 사고 현장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시신을 수습합니다. 소방관들에 따르면 특히 아이의 시신을 목격했던 경험이 평생 잊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또 현장을 함께 누비던 동료가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남기고요. 대다수는 혼자만 살아서 나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해요. 소방관은 보통의 신념이 아니면 일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 노동의 강도가 세요. 정신 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소방관들의 수면장애는 일반인보다 약 20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어요. 그중 PTSD 치료가 필요한 소방관은 6.3%, 우울증은 10.7%에 이르고요.
소방관의 정신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나요.
2020년부터 소방관은 국가직으로 인정됐어요. 또 소방관을 위한 ‘보고 듣고 말하기’ 생명 지킴이 교육이 개발 및 보급되고 있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상담실도 운영 중이죠. 구조 활동 등으로 트라우마를 입은 소방관들의 치유를 돕는 전문 기관인 국립소방병원도 2025년 건립될 예정이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거나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불이익을 받을까 하는 걱정 또는 동료들에게 나약한 사람으로 비칠까 염려되기 때문이죠. 국민이 위급한 상황에 닥치면 119를 찾듯이 소방관들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신속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와 여건이 마련돼야 해요. 가령 1년에 한 번은 제대로 된 정신 건강검진을 시행하고, 문제가 감지되면 최고 수준으로 치료를 지원해줘야 합니다. 적어도 수많은 생명을 살린 사람이 그 과정에서 얻은 정신 건강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없어야죠.
맞아요. 이태원 참사, 시청역 돌진 교통사고 등과 같이 규모가 큰 경우 해당 상황을 찍어 SNS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의도와 상관없이 알고리즘에 따라 휴대폰에 해당 영상이 불시에 등장하죠. 언제 어디서건 대형 참사에 해당하는 장면을 다수가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간접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어요. 이를 본 사람들 대부분은 큰 정신적 충격에 휩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불안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이들도 있고요. 이태원 참사 후 이와 같은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았어요. 이를 예방하기 위해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에서 각 언론에 자극적인 장면을 최소화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적용해 보도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지만 SNS에 퍼진 콘텐츠는 손을 쓸 수가 없어요. 이미 전 세계에 널리 퍼졌으니까요. 자극적인 영상과 쇼츠 등을 중단, 삭제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사회적 숙제입니다.
‘트라우마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트라우마 증상이 완화되는 건 사실이에요. 시간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치유의 시간 동안 견뎌야 할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살 수도 있고요. 만약 트라우마가 장기화해 머릿속에 고착되면 망상에 빠져 특정 행동을 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죠. 그래서 치료를 권하는 겁니다.
전문의는 언제 찾아야 하나요.
트라우마가 의심되면 먼저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위기상담전화(1577-0199)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눌 것을 권해요. 이후 상담가가 정신 건강 전문의와의 상담을 추천하면 정신 건강 전문병원을 찾으면 됩니다. 병원도 치료 방법이 각각 달라요. 진단과 약물치료 중심인지, 예약제로 상담을 충분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인지를 먼저 알아본 뒤 선택하는 것이 좋고요.
트라우마 치료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지나요.
사실 트라우마 치료는 첫 시작이 중요해요. 먼저 해당 사건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점차 대화를 통해 환자와 신뢰를 쌓아야 하죠. 그 후 본인이 동의하고 견딜 수 있는 지점까지만 트라우마를 다룹니다. 트라우마를 침착하게 마주할 수 있게 안전한 분위기를 마련한 뒤 환자 자신이 이 치료를 주도하고 있다는 인식이 생길 만한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그 후 외상중심인지행동치료, 노출치료 등 과학적으로 근거 있는 방법을 시행하죠. 증상이나 의사의 판단에 따라 약물치료를 동반하는 경우도 있어요. 1차 치료제로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와 같은 항우울제를 권고합니다. 보통 2개월 정도 투여하면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데, 1년 이상 지속해야 재발 가능성이 낮아요. 초기에는 항불안제와 수면제 등도 사용할 수 있고요.
치료가 힘든 트라우마도 있나요.
오랜 기간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트라우마에 노출된 케이스가 그렇습니다. 이 경우 안정화, 외상 처리, 재통합이라는 3단계 접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능력을 증진하는 과정을 끈기 있게 수행해야 해요. 트라우마 증상의 치료율은 결코 낮지 않아요. 물론 만성화돼 오랜 기간 치료가 힘든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치료 후 3개월 내에는 절반이, 2년 내에는 80% 정도가 회복하고 있어요.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특별한 말보다는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이 최고입니다. 환자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제안하는 것보다는 곁에서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을 하며 마음 열기를 기다려야 해요. 그러면 분명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옵니다. 환자 곁을 묵묵히 지키며 ‘나는 항상 네 편이고, 언제든 네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해요.
주위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면요.
“어떤 심정인지 알아” “힘내” “다 괜찮아질 거야” 등과 같은 격려의 멘트요. 이 같은 말들은 환자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주하지 않고 그저 ‘피하라’는 의미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꼭 말해줘” “힘이 될 수 있게 노력할게” 등과 같이 ‘고통을 공감하고 옆에서 지지하겠다’는 의미의 말을 자주 해주는 것이 좋아요.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요.
옆에서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줄 사람이 가장 필요합니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고된 아픔도 옆에서 지지해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이 주변의 따뜻한 격려와 지지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 다시 건강한 일상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트라우마 #PTSD #여성동아
사진 박해윤
기자 게티이미지
사진출처 넷플릭스 더글로리
‘트라우마’는 상처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용어다. 심각한 부상, 성폭력 등 외부의 위험한 상황에 직접 노출됐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외상으로, 심신의 건강을 위협하는 충격적인 경험을 통칭한다. 불면, 비현실감, 우울 등과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심하면 두근거림이나 호흡곤란, 목 또는 가슴이 조이는 느낌, 소화불량 등의 신체적 반응도 초래한다.
최근에는 서울시청 역주행 교통사고, 이태원 참사 등과 같은 일상 속 대형 사고로 인한 간접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익숙한 공간에서 발생한 갑작스러운 인명 사고를 지켜보며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트라우마 전문가로 꼽히는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건, 사고에 해당하는 관련 콘텐츠를 접한 뒤 불안감, 무기력증 등으로 병원을 찾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고 말한다. 일상 속 참사로 인한 직간접 트라우마로 심리적, 정신적 고통을 받는 이들이 많다는 것. 그는 “관련 증상 및 예방법을 미리 숙지하고 있어야 우울, 불안, 알코올중독과 같은 2차적 문제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백종우 교수는 트라우마 분야의 다학제 전문 학회인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3대 회장이다. 보건복지부 중앙자살예방센터장과 중앙심리부검센터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회자살예방포럼 자문위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신경정신의학 정책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예민하다고 트라우마 잘 겪진 않아”
넷플릭스 ‘더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은 성인이 돼서도 학창 시절 학교폭력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한다.
트라우마를 나누는 기준은 많지만 요즘은 빅 트라우마와 스몰 트라우마로 구분 지어요. 빅 트라우마는 불의의 사고, 재난, 전쟁 등 일상을 넘어서는 커다란 사건으로 개인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험을 뜻해요. 악몽, 공포, 불안, 사회 부적응 등의 증상을 일으키죠. 스몰 트라우마는 가족, 친구 등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반복적인 상처를 의미합니다. 어린 시절 놀림을 받거나 실수해서 마음을 다치는 등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 부정적이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죠. 빅 트라우마는 눈에 보이는 큰 사건들로 인해 발생하기에 자신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인지하기 쉬워요. 사건이 발생한 시간도 특정할 수 있고요. 하지만 스몰 트라우마는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요. 때문에 본인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지 알기 어렵죠.
트라우마 종류에 따라 상처의 강도도 달라지나요.
가끔 스몰 트라우마를 가볍게 여기는 분들이 있어요. 정말 잘못된 생각이에요. 여러 가지 스몰 트라우마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이하 PTSD), 경계성인격장애, 사회 불안증, 우울증 등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이러한 현상들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면 복합 트라우마가 발병하는 거고요. 사고 범위나 크기에 따라 상처의 강도를 나눌 순 없습니다.
트라우마에 취약한 성격이 있나요
트라우마를 잘 겪는 성격이 따로 있진 않아요. 그보다 중요한 건 스트레스 지수예요. 당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면 평소에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건들이 트라우마로 다가올 수 있거든요. 또 성장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많이 겪었던 사람이 다시 트라우마에 노출될 확률도 높습니다. 공포로 다가오는 사건에 대해 저항할 힘이 이미 약해진 상태거든요. 이는 트라우마로 인해 생기는 질병인 PTSD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PTSD는 주로 어떤 상황에 나타나나요. 진단 기준이 있다면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전쟁과 같은 위협적인 모습이나 폭력 등을 ‘직접 경험’하거나 비정상적인 죽음, 부상 등을 ‘직접 목격’한 경우 그리고 가까운 지인에게 일어난 경험에 ‘간접적으로 노출’됐을 때입니다. 이런 사건을 경험한 뒤 당시의 기억이 수시로 떠오르거나 꿈에 나타나는 등의 ‘침투 증상’과 관련 기억 및 감정에 대한 ‘회피 증상’, 자신 혹은 주변 세계에 대한 변형된 인식과 외상 사건에 대한 기억상실을 뜻하는 ‘해리 증상’이 나타납니다. 또 짜증과 분노 폭발 및 과잉 경계와 같은 ‘각성 증상’도 일어나고요. 이 중 2가지 증상이 1개월 이상 지속되면 PTSD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PTSD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고요. 대표 증상을 꼽는다면요.
인지 처리에 문제가 생겨 발생하는 해리(dissociation)성 기억상실이요. 너무 고통스러웠던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 거죠. 트라우마는 마음과 함께 기억도 산산조각 나는 경우가 있거든요. 해리성 기억상실로 인해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어요. 성폭력 피해자들이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사건이 벌어진 순간의 정황을 수사기관에 정확하게 진술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고통스러운 기억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는 것은 PTSD의 핵심적인 병리입니다. 회피도 PTSD의 주요 진단 기준이에요. 피해자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당연히 잊고 싶죠. 이는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 기반한 당연한 선택이에요. 즉, 피해자는 자신이 경험한 고통을 어떻게든 잊으려 애쓰고, 연관된 상황을 회피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런 회피가 지속되면 삶의 즐거움, 행복 등의 감정이 무감각해지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어요.
신체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없나요.
식은땀이 나거나 호흡이 가빠지고 손과 발에 땀이 나기도 해요. 공포에 따른 반응이죠. 또 소화 기능이 저하되고, 공황발작 등 평소와 다른 신체적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증상이 반복되면 무조건 전문의를 찾아야 해요.
사건을 경험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PTSD 반응이 나타날 수 있나요.
1~2년이 지난 뒤에 PTSD 진단을 받는 경우도 있어요. 당시 슬픔을 억제하다가 추후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거나 경험했을 때 트라우마 반응을 느끼는 거죠. 또 불현듯 사건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과거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들이 고향에 돌아온 뒤 전우들이 사망하는 장면 등이 꿈에 반복적으로 떠올라 불면증을 겪으며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례가 있었어요. 미국에서 이 같은 현상을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파악한 뒤 PTSD라는 질환으로 분류했고요. 이처럼 PTSD는 사고 직후는 물론, 몇 년이 지나서 발병하기도 합니다.
전쟁, 재난 상황 시 자신을 희생하며 타인을 도운 사람들도 트라우마에 시달릴 확률이 높겠네요.
우리는 트라우마라고 하면 보통 참사의 직접적인 피해자들만 떠올리죠. 하지만 사회적 재난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경찰, 소방관, 의료인 등도 트라우마의 위협에 노출돼 있죠. 그중 소방관의 노출도가 큰 편이에요. 국민의 생명을 최전선에서 지키는 소방관들은 처참한 사고 현장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시신을 수습합니다. 소방관들에 따르면 특히 아이의 시신을 목격했던 경험이 평생 잊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또 현장을 함께 누비던 동료가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를 남기고요. 대다수는 혼자만 살아서 나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해요. 소방관은 보통의 신념이 아니면 일을 수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 노동의 강도가 세요. 정신 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소방관들의 수면장애는 일반인보다 약 20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어요. 그중 PTSD 치료가 필요한 소방관은 6.3%, 우울증은 10.7%에 이르고요.
소방관의 정신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나요.
2020년부터 소방관은 국가직으로 인정됐어요. 또 소방관을 위한 ‘보고 듣고 말하기’ 생명 지킴이 교육이 개발 및 보급되고 있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상담실도 운영 중이죠. 구조 활동 등으로 트라우마를 입은 소방관들의 치유를 돕는 전문 기관인 국립소방병원도 2025년 건립될 예정이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거나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불이익을 받을까 하는 걱정 또는 동료들에게 나약한 사람으로 비칠까 염려되기 때문이죠. 국민이 위급한 상황에 닥치면 119를 찾듯이 소방관들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신속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와 여건이 마련돼야 해요. 가령 1년에 한 번은 제대로 된 정신 건강검진을 시행하고, 문제가 감지되면 최고 수준으로 치료를 지원해줘야 합니다. 적어도 수많은 생명을 살린 사람이 그 과정에서 얻은 정신 건강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는 일은 없어야죠.
트라우마 최고 치료법은 ‘그저 곁에 이어주는 것’
요즘 간접 트라우마로 병원을 찾는 이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맞아요. 이태원 참사, 시청역 돌진 교통사고 등과 같이 규모가 큰 경우 해당 상황을 찍어 SNS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의도와 상관없이 알고리즘에 따라 휴대폰에 해당 영상이 불시에 등장하죠. 언제 어디서건 대형 참사에 해당하는 장면을 다수가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간접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어요. 이를 본 사람들 대부분은 큰 정신적 충격에 휩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 불안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이들도 있고요. 이태원 참사 후 이와 같은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았어요. 이를 예방하기 위해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에서 각 언론에 자극적인 장면을 최소화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를 적용해 보도했던 걸로 기억해요. 하지만 SNS에 퍼진 콘텐츠는 손을 쓸 수가 없어요. 이미 전 세계에 널리 퍼졌으니까요. 자극적인 영상과 쇼츠 등을 중단, 삭제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사회적 숙제입니다.
‘트라우마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트라우마 증상이 완화되는 건 사실이에요. 시간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치유의 시간 동안 견뎌야 할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살 수도 있고요. 만약 트라우마가 장기화해 머릿속에 고착되면 망상에 빠져 특정 행동을 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죠. 그래서 치료를 권하는 겁니다.
전문의는 언제 찾아야 하나요.
트라우마가 의심되면 먼저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위기상담전화(1577-0199)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 나눌 것을 권해요. 이후 상담가가 정신 건강 전문의와의 상담을 추천하면 정신 건강 전문병원을 찾으면 됩니다. 병원도 치료 방법이 각각 달라요. 진단과 약물치료 중심인지, 예약제로 상담을 충분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인지를 먼저 알아본 뒤 선택하는 것이 좋고요.
트라우마 치료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지나요.
사실 트라우마 치료는 첫 시작이 중요해요. 먼저 해당 사건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점차 대화를 통해 환자와 신뢰를 쌓아야 하죠. 그 후 본인이 동의하고 견딜 수 있는 지점까지만 트라우마를 다룹니다. 트라우마를 침착하게 마주할 수 있게 안전한 분위기를 마련한 뒤 환자 자신이 이 치료를 주도하고 있다는 인식이 생길 만한 환경을 만들어줍니다. 그 후 외상중심인지행동치료, 노출치료 등 과학적으로 근거 있는 방법을 시행하죠. 증상이나 의사의 판단에 따라 약물치료를 동반하는 경우도 있어요. 1차 치료제로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와 같은 항우울제를 권고합니다. 보통 2개월 정도 투여하면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데, 1년 이상 지속해야 재발 가능성이 낮아요. 초기에는 항불안제와 수면제 등도 사용할 수 있고요.
치료가 힘든 트라우마도 있나요.
오랜 기간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트라우마에 노출된 케이스가 그렇습니다. 이 경우 안정화, 외상 처리, 재통합이라는 3단계 접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능력을 증진하는 과정을 끈기 있게 수행해야 해요. 트라우마 증상의 치료율은 결코 낮지 않아요. 물론 만성화돼 오랜 기간 치료가 힘든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치료 후 3개월 내에는 절반이, 2년 내에는 80% 정도가 회복하고 있어요.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특별한 말보다는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이 최고입니다. 환자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제안하는 것보다는 곁에서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을 하며 마음 열기를 기다려야 해요. 그러면 분명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옵니다. 환자 곁을 묵묵히 지키며 ‘나는 항상 네 편이고, 언제든 네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해요.
주위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면요.
“어떤 심정인지 알아” “힘내” “다 괜찮아질 거야” 등과 같은 격려의 멘트요. 이 같은 말들은 환자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주하지 않고 그저 ‘피하라’는 의미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꼭 말해줘” “힘이 될 수 있게 노력할게” 등과 같이 ‘고통을 공감하고 옆에서 지지하겠다’는 의미의 말을 자주 해주는 것이 좋아요.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요.
옆에서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줄 사람이 가장 필요합니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고된 아픔도 옆에서 지지해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이 주변의 따뜻한 격려와 지지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 다시 건강한 일상을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트라우마 #PTSD #여성동아
사진 박해윤
기자 게티이미지
사진출처 넷플릭스 더글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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