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서 무속인으로 변신한 정호근(57)의 요즘 활동이 화제다. 유튜브 채널 ‘푸하하TV’ 속 ‘정호근의 기묘한 인생상담소 심야신당’을 통해 자신의 두 가지 이력을 적절히 버무려 활약하고 있다. 초대 손님을 불러 점사(占事)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종의 토크쇼인데,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을 본떠 “심야에 점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그가 직접 이름 지었다.
사실 정호근의 입담은 그간 ‘라디오스타’를 비롯한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청률 보증 수표로 입증돼왔다. 또한 DJ DOC 이하늘과 개그맨 김학도·김기수, 개그우먼 김영희, NRG 출신 노유민 등 유명 연예인이 게스트로 등장하고 그가 점사를 보는 콘셉트니 재미가 없는 게 더 이상할 터. 또한 각자 고민을 갖고 출연한 게스트들은 남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아이돌 출신 가수 일라이와 이혼한 지연수가 신용불량자가 된 속내를 말하거나,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 혼자서만 비를 안 맞았다”는 체험을 털어 놓아 그에게 “너 신내림 받아야겠다”는 말을 들은 김기수의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렇다 보니 ‘심야신당’의 새로운 콘텐츠가 업로드되는 날이면 출연 게스트의 이름이 온종일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인기다. 한 편당 수십만 회에서 1백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 중이며, 지난해 3월에 올라왔던 노유민 편은 누적 조회수가 2백60만 회를 넘었다.
‘심야신당’에서 정호근은 게스트들이 말하지도 않은 속사정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게 한다. 동시에 선배 연예인 입장에서 후배들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원인을 분석하며, 대처방법에 대해서도 점사를 바탕으로 조언해준다. 과거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 ‘선덕여왕’(2009) ‘광개토대왕’(2011~2012) ‘굿닥터’(2013) ‘정도전’(2014) 등에서 보여줬던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예전에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박감 속에 살아서 연기에 힘이 들어갔었어요. 에너지가 충만했던 시기라 강력하게 표현된 듯하고요. 지금은 산전수전 다 겪고, 시퍼런 작두날 위에도 올라가다보니 여유가 생긴 것 같아요.”
신내림을 받고 무속인으로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맞게 된 변화다. 지금은 웃으며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지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 그에게는 엄청난 고민과 번민의 시간이 있었다.
두 아이를 잃고야 무속인 운명 받아들여
정호근이 신내림을 받은 건 2014년이지만, 어릴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집안에서 대대로 무당이 나왔으며, 할머니는 대전 지역에서 꽤 이름을 떨치던 만신(무당)이었고, 누나들도 무병을 앓은 경험이 있다. 그 역시도 같은 운명을 타고난 탓에 어린 시절이 평범치만은 않았다. 어릴 적 친구에게 “너희 집 마루 밑에 귀신 있지?”라고 했다가 진짜 친구 집 마루 밑에서 무덤이 발견됐던 일이나, 가겟집 아주머니에게 “아줌마네 아저씨 아프네? 3일을 못 견디면 아저씨가 죽어”라고 말했던 일화는 방송에서도 자주 회자됐던 에피소드다. 배우가 되기 전에는 불우한 환경 탓에 스님이 되려고도 했다.“저희 집이 대전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이었는데 제가 열여덟 살 무렵 아버지 사업이 풍비박산 나면서 달동네로 이사 갔어요. 아버지는 매일 자살하겠다고 산으로 올라가고 저는 아버지를 쫓아다니며 암울한 시간을 보냈죠. 아버지 사업이 잘 될 때는 집에 늘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망하니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였어요. 심지어 아버지가 시집·장가보낸 형제들도 멀리하더군요.”
그 시절 한 줄기 빛이 되어 준 건 바로 연기였다. 고등학교 때 연극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재능을 깨달은 그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고, 스물한 살에 MBC 공채탤런트가 되면서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된다. 배종옥, 이재룡 등이 그의 대학 동기다.
“제가 무대에 서면 다들 ‘신들린 것 같다’ ‘시선을 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런 반응에 희열을 느꼈고요. 지금 돌이켜보면 재능도 있었겠지만 정말 신이 들렸으니까 그랬던 듯해요. 그런데 막상 TV 탤런트가 되고 나니 인형 같은 배우들만 주연이 됐어요. 제겐 눈에 띄지 않는 조연만 주어졌죠. 배우 생활이 너무 치열했어요. 그래도 꼭 살아남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연기하다가 결국 기회를 잡았어요. ‘광개토대왕’의 중국인 장수 풍발!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었죠.”
그는 ‘주인공을 말아 먹겠다’는 독한 마음가짐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연기에 매달렸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딱 그때부터 눈앞에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촬영을 하는데 누가 뒤에 반듯하게 서 있더라고요. 안 보이던 게 보이니까 덜덜덜 떨리면서 대사를 뱉을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감독이 ‘정호근, 왜 그래?’ 하더라고요. 당시 스태프들이 저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어요.”
반면 신기한 체험도 했다. 클로즈업을 위해 진짜 칼을 휘두르다가 실수로 조명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목을 치는 대형 사고를 냈는데 상대의 목은 말짱했다. 겨울이라 딱딱해진 고무 화살촉이 그의 눈으로 날아와 박힌 사고도 겪었다. 실명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화살촉은 안구를 빗겨가 눈 사이 공간에 꽂혀 있었다.
“사극을 하면서 단체신을 찍다 보면 정말 많이 다쳐요. 그래서 저는 그런 일이 없도록 촬영 들어가기 전에 기도를 했어요. 보이지 않는 세계 속 모든 신령님들에게 도와달라고 기도했죠. 그 힘이 대단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신이 안오셨겠어요.”
촬영 중 생사를 오가는 일들이 자주 생기고 귀신을 보는 일도 잦아지면서 도저히 배우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무당이 되기 싫어서 버티고 또 버텼다. 결국 그를 무너뜨린 건 두 아이의 죽음이었다. 첫째 아이가 미숙아로 태어나 생후 27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쌍둥이로 태어난 막내아들도 하늘의 별로 보내야했다.
정호근은 벌써 18년째 기러기 아빠로 생활 중이다. 아내와 세 아이는 미국행을 선택해 그곳에서 정착해 살고 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매일 아침 화상통화로, 또 수시로 사진을 주고받으며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무속인의 길을 걷기 전부터 신기를 누르기 위해 집에 신당을 모시고 살았어요. 거기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너는 이제 죽어. 내가 꼿꼿이 세워놓으려고 했더니 말을 안 들으니까 네 밑으로 내려간다’고 하더군요. 제 밑으로 내려간다는 건, 제 자식들에게 간다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엎드리게 됐어요.”
하지만 내림굿을 받았다고 모든 고통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지난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이 세상에 무당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 질문에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때까지의 힘겨운 시간이 함축돼 있었다.
“신내림을 받은 뒤에도 배우 생활을 계속 하려고 했어요. 신내림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드라마에 계속 출연했죠.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말하는 게 무당 같다’고 하면서요. 속으로 뜨끔했지만 ‘어려서부터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면서 덮고 또 덮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배가 계속 아픈 거예요. 아무리 의학으로 해결하려고 해도 낫지 않았어요. 결국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내가 신을 모시기로 했으니 책임을 져야지’하는 마음으로 세상에 고백하기로 결심했어요.”
정호근은 크게 마음을 먹고 친한 기자를 불러내서 힘겹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 기자는 아주 당연한 듯 이렇게 말했단다. “형,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술만 먹으면 좔좔좔좔 풀더라.” 배우 정호근이 무당 정호근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예상은 했으나 일상의 너무 많은 것들이 흔들렸다.
“기사가 나간 뒤부터 갑자기 통화가 안 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전화도 안 왔고요. 그동안 사이좋게 의리를 나눴던 사람들이 홍해 갈라지듯 쫙 빠졌죠. 미국에 있던 아내는 짐작을 했던 모양이에요.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자꾸 피하다가, 결국 제가 내림굿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니 통곡하더라고요. 보름 간 설득을 했지만 이혼하자고 하더군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신당을 열기 직전 아내가 전화해 ‘내가 잘못했다, 당신의 선택을 응원하겠다’고 전했어요.”
심성 착한 연예인 지연수와 박주희, 올해 대한민국은 혼돈 지속될 듯
정호근은 ‘심야신당’을 통해 만난 출연진 중 심성이 착한 인물로 지연수를 꼽았다.
“무당이 되어 보니, 무당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굿해!’ ‘누가 아파서 죽게 되니 열심히 빌어!’라고 엄포를 놓는 사람이 아니에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찾아온 사람들에게 공감해주면서 점사가 나온 대로 잘못한 부분은 잘못했다고 알려주고, 갈 길은 가라고 조언하는 가이드 같아요. 그러니 무당도 배움이 뒤처지지 않는 인텔리전트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또 저를 찾아온 사람들이 점사를 들으면 울거나, 어떨 때는 악을 쓰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심야신당’을 통해 만난 출연자 중 누가 가장 인상적인지 물었다. 그는 방송 이후 화제가 됐던 지연수와 ‘자기야’로 유명한 가수 박주희를 꼽았다.
“지연수와 박주희 씨 모두 심성이 착한 사람들인데, 연예계에서 살아남기에는 연약한 성정을 갖지 않았나 해요. 그것이 그들에게 갈등으로 다가오고, 걸림돌이 돼서 일이 못 뻗어 나가지 않았나 싶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살아보니 상상 이상의 나는 놈들이 즐비하게 있더라고요. 이런 성정을 가진 분들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꼭 말해주고 싶어요.”
그는 무당이라고 해서 자아가 없어지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몸속에 신이 있긴 하지만 엄연히 ‘정호근’은 존재한다고. 그 예로 지극히 인간적인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 날 굿당에 가자마자 제 입에서 ‘작두날 좀 시퍼렇게 갈아라’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말하자마자 후회했어요. 저도 인간이잖아요. ‘무슨 소리야? 나는 방울 흔들고 부채만 펼 거야’라고 하면서 괜히 안 쪼는 척 하고 있었죠. 그러다 제가 1백여 명의 신도들 앞에서 작두 탈 순서가 왔는데, 칼을 보니 정말 손만 닿아도 베일 정도로 열심히 갈아놨더라고요. 그래도 올라가는 순간에는 물아지경이 돼요. 멍한 기분이 들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작두날 위에서 쪼그려 앉기, 발 들었다 내렸다를 하면서 공수(신의 메시지)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다 다시 작두 아래로 내려오면 영락없는 연약한 ‘인간 정호근’이 된다.
“작두에서 내려와서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가서 발을 봤어요. 발 나갔을까 봐요(웃음). 그런데 진짜 괜찮은 거예요. 아직도 저는 제 자신이 신기해요. 무당은 자아를 버리는 게 아니에요. 제 몸의 반만 신이 차지해도 대단한 무당이라고 생각해요. 제 몸에는 자아와 신의 에너지가 공존하고 있어요.”
정호근은 배우 생활에 미련은 없느냐는 질문에 섭외가 오기도 하지만 나중에 결국 무당이라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고 전했다. 예능 프로그램 역시 출연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고.
“돌이켜 보면 아픔이 있을 때 늘 외톨이었어요.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해야 하는 환경에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제가 스승의 위치에 올랐을 때 후배들을 감싸 안고 교감하며 상처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지금 ‘심야신당’에서 하는 것처럼요. 앞으로도 이런 활동을 계속하고 싶고, 무속인으로서 무교의 위상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그는 신축년, 대한민국의 올해 운에 대해서 이렇게 점치며 당부의 말을 함께 전했다.
“‘신축년 대한민국의 상황은 안타깝게도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혼란스럽다. 어디에 서야할지 혼돈이 온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사람의 마음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방송이나 언론에서 무엇을 조심하라고 하면 거기에 따르면서 내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 아무 문제없다고 봐요. 마스크 쓰고 손 깨끗이 닦고 밥 잘 먹고 건강하면 별 탈 없이 지나갈 거라 믿으세요. 마음을 옳고 바르고 담대하게 갖도록 하시고, 모두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사진 홍태식
사진제공 유튜브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