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석규(55)의 매력은 평범함이다. 정우성, 이정재, 강동원 같은 잘생긴 배우들이 코트 자락 휘날리며 화려한 비주얼과 실루엣으로 관객들을 유혹할 때 한석규는 평범한 소시민의 얼굴로, 어디서 마주친 듯한 익숙한 모습으로 다가와 관객에게 슬며시 말을 건다. “이건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접속’(1997)과 ‘8월의 크리스마스’(1998)가 만인의 멜로로 사랑받은 것도, ‘넘버3’(1997)의 양아치 태주에게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도 한때 짝사랑했던 남자나 남동생, 삼촌 같은 그의 평범함에서 기인한다.
영화 ‘우상’에서 한석규가 연기하는 구명회는 선악이 공존하는 기시감을 갖게 하는 정치인이다. 한의사 출신의 도의원으로 청렴함을 내세워 차기 도지사감으로 승승장구하던 구명회는 선거 관련 중요한 미팅을 하던 중 아내로부터 아들이 사고를 쳤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급히 집으로 돌아와 보니 차는 박살이 나 있고, 비닐에 둘러싸인 시체에선 시뻘건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고 사람을 죽인 것이다. 구명회는 양심과 자신의 정치 이력을 저울질하며 위험한 선택을 감행한다. 한석규는 특유의 평범함으로 인자한 웃음 너머에 가늠할 수 없는 속내를 감추고 있다가 일순간 돌변하는, 소름 돋치도록 비열한 구명회를 입체적으로 연기해내며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수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우상’은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위기에 처한 구명회와 사고로 아들을 잃고 진실을 찾아 나선 남자 유중식(설경구), 사고 당일의 비밀을 알고 있는 중식의 며느리 최련화(천우희)가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선택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박한 이야기를 담는다. 구명회가 권력의 단맛이 있는 곳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인물이라면 유중식은 혈육과 핏줄에 모든 것을 거는 인간이다. 전작 ‘한공주’에서 인물의 세밀한 감정과 사건을 둘러싼 미묘한 공기와 분위기까지 화면에 담아내는 섬세한 연출로 호평받은 이수진 감독은 이번에도 세 인물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엮어내며 서스펜스를 쌓아간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만난 한석규는 이번 작품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현명한 사람이라면 멈췄을 텐데, 구명회는 끝까지 비열한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런 구명회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어쩌면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절하게 비열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구명회로 사는 동안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나는 용감하게 살고 있는가. 헛된 우상에 사로잡혀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였다. 이는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1990년 성우로 KBS에 입사했다가 이듬해 MBC 공채 탤런트에 뽑혀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이래 30년 가까이 충무로의 간판 배우로 자리매김해온 한석규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우상’은 이수진 감독이 13년에 걸쳐 구상한 시나리오인데, 대본을 받았을 때 느낌이 어땠나요.
투자와 제작 등 전반적인 부분이 결정되기 전에 대본을 받았는데 분위기에 압도됐고, 정성껏 쓴 시나리오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떤 대본은 재밌네 하면서 후루룩 읽게 되는데, 이건 자꾸 앞장을 들춰보며 앞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곱씹어보게 되더라고요. 그만큼 서사가 촘촘하단 이야기죠. 시나리오 자체만 봤을 때 이렇게 완성도가 높은 건 ‘초록물고기’(1997) 이후 처음이었어요. 시나리오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내 몸뚱이를 다 태워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열망을 느낄 정도로요. 영화라는 것이 결국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잘 모르는 나라에 대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잘 만들어진 그 나라의 영화를 보는 건데, ‘우상’의 시나리오가 바로 그랬어요. 현재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구나, 정곡을 찌르는구나 싶었죠.
한석규 씨가 이수진 감독에게 먼저 이 작품을 하겠다고 제안했다면서요.
하하하. 사실 연기자들은 선택을 당하는 입장인데, 이 작품은 꼭 해보고 싶더군요. ‘우상’ 같은 작품은 오락 영화도 아니고, 투자가 어려워요. 감독도 배우도 개고생할 게 뻔하죠.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 때도 제작에 어려움을 많이 겪은 걸로 알고 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왜 또 이런 작품을 하려고 할까, 그런 점에서 진정성이 느껴졌어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는 아주 괜찮은 눈을 가졌단 생각이 들더군요. 사건을 바라보는 눈, 카메라 앵글을 바라보는 눈. 질투가 날 정도로 정확한 시선을 갖고 있어요. ‘우상’은 이제 우리 손을 떠나 관객들이 판단해주실 거고, 이수진 감독에겐 빨리 다음 작품을 준비하라고 했어요. 지금껏 영화를 하면서 감독에게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 이수진 감독한테는 시나리오도 안 보고 세 번째 작품도 같이하자고 했어요. 이 감독이 저를 써줘야 할 텐데 말입니다(웃음).
신인 감독들하고 작품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은행나무 침대’의 강제규,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넘버3’의 송능한, ‘접속’의 장윤현, ‘프리즌’의 나현 감독 등이 모두 신인이었어요.
보통 신인 감독들은 작품을 하면서 몸무게가 5kg 이상 빠져요. 자신의 모든 걸 다 걸고 하니까요. 생각해보면 저도 신인 시절 그랬던 것 같아요. 이수진 감독도 갈수록 퀭해지더라고요(웃음). 이런 감독들이 잘돼야 한국 영화도 더 다양해지고 좋아질 거예요.
한석규 씨가 생각하는 구명회는 어떤 인물인가요.
우상을 좇으면서 동시에 우상이 되고 싶어하는 인물이죠. 스스로는 상황을 능동적으로 헤쳐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육체와 정신 모두 우상에 잠식당해 바보 같은 선택으로 일관하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건, 사건이 터졌을 때 어떻게 리액션(반응)하느냐로 알 수 있어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20대, 30대 땐 뭘 해도 자신감이 있었고, ‘내가 하면 다 잘된다’고 생각했죠. 연기도 반응하는 것보다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해도 안 되는 게 있더군요. ‘아, 내가 액션을 한다 생각했는데, 결국은 리액션을 하면서 사는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리액션 하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르는데, 쇼걸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배우 잭 니콜슨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외할머니의 손에서 성장한 탓에 외할머니를 어머니로, 어머니는 누나로 알았답니다. 서른 중반에 자신의 누나가 실제 자기 엄마란 사실을 알게 된 잭 니콜슨이 한 말이 “우리 집안이 연기가 좀 되는 집안이네”였답니다. 정말 좋아하는 배운데, 최악의 상황에서 보여준 리액션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이 되더라고요.
구명회가 계속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고 얘기했는데, 인생을 살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한 한석규 씨만의 기준점이 있나요.
제 경우에는 부끄러움인 것 같습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부끄러움의 신호가 온다, 그럼 그걸 무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한 번, 두 번 그 신호를 무시하기 시작하면 그다음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해요. 마취가 되는 거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려 해요.
설경구 씨와의 투샷은 총성 없는 전쟁터랄까, 스크린 밖으로까지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졌어요.
경구 씨는 저보다 네 살 어리지만, 배울 점이 많은 배우예요. 학문이 나보다 깊으면 선배죠. 연기 동료고 동시대를 배우로서 살아온 친구이기도 하고요.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발광하는 스타일이란 점에선 저랑 비슷한 점도 있어요(웃음). 좋은 연기를 위해 자학하며 노력하는 배우고 그래서 누가 봐도 ‘잘하는구나’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어요.
천우희 씨가 연기한 련화는 지금껏 한국 영화에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인데, 선배로서 어떻게 보셨나요.
극 중 명회가 련화에게 해를 가하려고 주사를 찔러 넣는 장면이 있어요. 미리 (어디에 찌르기로) 약속이 돼 있었죠. 우희 씨가 발버둥을 치면서 연기를 하기에 주사기가 약속된 대로 들어갔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으면 NG인데 꾹 참고 있었던 거죠. 사실 련화 역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쉬운 배역은 아니에요. 너무 강렬하고 독특해 잘못하면 밑천이 다 드러나거든요.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에서 이미 우희 씨와 작업을 했기 때문에 이번 작품에선 배제하려는 마음도 있었는데, 결국 ‘이 배우가 아니면 어렵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 같아요. 이번에 함께 작업한 경구 씨나 우희 씨를 보면서 이 배우가 이래서 연기를 하는구나, 하는 걸 알겠더군요. 정말 연기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배우들이죠.
데뷔한 지 30년 가까이 됐어요. 배우 생활을 계속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몇 년 전 한 강의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한 부자가 있었대요. 그는 어떻게 하면 재산을 더 불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잠들었다가 그날 밤 죽었답니다. 기자님은 이 얘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저는 그걸 ‘한석규라는 배우가 있었다. 자신이 얻은 인기에 만족하며 어떻게 하면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잠들었다가 그날 밤 죽었다’로 바꿔봤습니다. 인생에선 무엇을 얼마나 하느냐보다 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단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연기를 통해 무엇을 원하는 걸까’를 생각해봤는데, 열여섯 살 때 봤던 윤복희 선배님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떠오르더군요. 근사한 예술적 체험에서 오는 희열 그게 좋아서 연기자가 됐고, 중간에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연기를 한 적도 있어요. 그러다 마흔 무렵에 건강도 덜커덕하고, 자신감도 없어졌죠. 연기라는 것이 하찮게 느껴지고 지치기도 했고요. 뭔가에 혹한 것이죠. 그러다가 쉰 살이 되니까 아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구나, 하면서 초심이 생각났어요.
한석규 씨에게도 우상이 있나요.
우리 영화에서처럼 폭주하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한 의미에서의 우상(Idol)이라면 어머니가 제 우상입니다. 영화를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극장에 저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감수성이 예민하셨고 자식들에게 한 번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신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손잡고 극장에 가서 봤던 영화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저도 그렇고 제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의 액션이 아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걸 실감해요. 그래서 오늘 제가 가장 드리고 싶은 말씀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액션과 리액션이라는 겁니다(웃음).
디자인 최정미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영화 ‘우상’에서 한석규가 연기하는 구명회는 선악이 공존하는 기시감을 갖게 하는 정치인이다. 한의사 출신의 도의원으로 청렴함을 내세워 차기 도지사감으로 승승장구하던 구명회는 선거 관련 중요한 미팅을 하던 중 아내로부터 아들이 사고를 쳤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급히 집으로 돌아와 보니 차는 박살이 나 있고, 비닐에 둘러싸인 시체에선 시뻘건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고 사람을 죽인 것이다. 구명회는 양심과 자신의 정치 이력을 저울질하며 위험한 선택을 감행한다. 한석규는 특유의 평범함으로 인자한 웃음 너머에 가늠할 수 없는 속내를 감추고 있다가 일순간 돌변하는, 소름 돋치도록 비열한 구명회를 입체적으로 연기해내며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수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우상’은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위기에 처한 구명회와 사고로 아들을 잃고 진실을 찾아 나선 남자 유중식(설경구), 사고 당일의 비밀을 알고 있는 중식의 며느리 최련화(천우희)가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선택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박한 이야기를 담는다. 구명회가 권력의 단맛이 있는 곳에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인물이라면 유중식은 혈육과 핏줄에 모든 것을 거는 인간이다. 전작 ‘한공주’에서 인물의 세밀한 감정과 사건을 둘러싼 미묘한 공기와 분위기까지 화면에 담아내는 섬세한 연출로 호평받은 이수진 감독은 이번에도 세 인물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엮어내며 서스펜스를 쌓아간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만난 한석규는 이번 작품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현명한 사람이라면 멈췄을 텐데, 구명회는 끝까지 비열한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런 구명회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어쩌면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절하게 비열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구명회로 사는 동안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나는 용감하게 살고 있는가. 헛된 우상에 사로잡혀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였다. 이는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1990년 성우로 KBS에 입사했다가 이듬해 MBC 공채 탤런트에 뽑혀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 이래 30년 가까이 충무로의 간판 배우로 자리매김해온 한석규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우상’은 이수진 감독이 13년에 걸쳐 구상한 시나리오인데, 대본을 받았을 때 느낌이 어땠나요.
투자와 제작 등 전반적인 부분이 결정되기 전에 대본을 받았는데 분위기에 압도됐고, 정성껏 쓴 시나리오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떤 대본은 재밌네 하면서 후루룩 읽게 되는데, 이건 자꾸 앞장을 들춰보며 앞에서 나왔던 이야기를 곱씹어보게 되더라고요. 그만큼 서사가 촘촘하단 이야기죠. 시나리오 자체만 봤을 때 이렇게 완성도가 높은 건 ‘초록물고기’(1997) 이후 처음이었어요. 시나리오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내 몸뚱이를 다 태워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열망을 느낄 정도로요. 영화라는 것이 결국은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잖아요. 잘 모르는 나라에 대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잘 만들어진 그 나라의 영화를 보는 건데, ‘우상’의 시나리오가 바로 그랬어요. 현재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구나, 정곡을 찌르는구나 싶었죠.
한석규 씨가 이수진 감독에게 먼저 이 작품을 하겠다고 제안했다면서요.
하하하. 사실 연기자들은 선택을 당하는 입장인데, 이 작품은 꼭 해보고 싶더군요. ‘우상’ 같은 작품은 오락 영화도 아니고, 투자가 어려워요. 감독도 배우도 개고생할 게 뻔하죠.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 때도 제작에 어려움을 많이 겪은 걸로 알고 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왜 또 이런 작품을 하려고 할까, 그런 점에서 진정성이 느껴졌어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는 아주 괜찮은 눈을 가졌단 생각이 들더군요. 사건을 바라보는 눈, 카메라 앵글을 바라보는 눈. 질투가 날 정도로 정확한 시선을 갖고 있어요. ‘우상’은 이제 우리 손을 떠나 관객들이 판단해주실 거고, 이수진 감독에겐 빨리 다음 작품을 준비하라고 했어요. 지금껏 영화를 하면서 감독에게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 이수진 감독한테는 시나리오도 안 보고 세 번째 작품도 같이하자고 했어요. 이 감독이 저를 써줘야 할 텐데 말입니다(웃음).
신인 감독들하고 작품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은행나무 침대’의 강제규,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넘버3’의 송능한, ‘접속’의 장윤현, ‘프리즌’의 나현 감독 등이 모두 신인이었어요.
보통 신인 감독들은 작품을 하면서 몸무게가 5kg 이상 빠져요. 자신의 모든 걸 다 걸고 하니까요. 생각해보면 저도 신인 시절 그랬던 것 같아요. 이수진 감독도 갈수록 퀭해지더라고요(웃음). 이런 감독들이 잘돼야 한국 영화도 더 다양해지고 좋아질 거예요.
한석규 씨가 생각하는 구명회는 어떤 인물인가요.
우상을 좇으면서 동시에 우상이 되고 싶어하는 인물이죠. 스스로는 상황을 능동적으로 헤쳐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육체와 정신 모두 우상에 잠식당해 바보 같은 선택으로 일관하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건, 사건이 터졌을 때 어떻게 리액션(반응)하느냐로 알 수 있어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20대, 30대 땐 뭘 해도 자신감이 있었고, ‘내가 하면 다 잘된다’고 생각했죠. 연기도 반응하는 것보다 뭔가를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해도 안 되는 게 있더군요. ‘아, 내가 액션을 한다 생각했는데, 결국은 리액션을 하면서 사는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리액션 하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르는데, 쇼걸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배우 잭 니콜슨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외할머니의 손에서 성장한 탓에 외할머니를 어머니로, 어머니는 누나로 알았답니다. 서른 중반에 자신의 누나가 실제 자기 엄마란 사실을 알게 된 잭 니콜슨이 한 말이 “우리 집안이 연기가 좀 되는 집안이네”였답니다. 정말 좋아하는 배운데, 최악의 상황에서 보여준 리액션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이 되더라고요.
구명회가 계속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고 얘기했는데, 인생을 살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한 한석규 씨만의 기준점이 있나요.
제 경우에는 부끄러움인 것 같습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부끄러움의 신호가 온다, 그럼 그걸 무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한 번, 두 번 그 신호를 무시하기 시작하면 그다음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해요. 마취가 되는 거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려 해요.
설경구 씨와의 투샷은 총성 없는 전쟁터랄까, 스크린 밖으로까지 팽팽한 긴장감이 전해졌어요.
경구 씨는 저보다 네 살 어리지만, 배울 점이 많은 배우예요. 학문이 나보다 깊으면 선배죠. 연기 동료고 동시대를 배우로서 살아온 친구이기도 하고요.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발광하는 스타일이란 점에선 저랑 비슷한 점도 있어요(웃음). 좋은 연기를 위해 자학하며 노력하는 배우고 그래서 누가 봐도 ‘잘하는구나’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어요.
천우희 씨가 연기한 련화는 지금껏 한국 영화에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인데, 선배로서 어떻게 보셨나요.
극 중 명회가 련화에게 해를 가하려고 주사를 찔러 넣는 장면이 있어요. 미리 (어디에 찌르기로) 약속이 돼 있었죠. 우희 씨가 발버둥을 치면서 연기를 하기에 주사기가 약속된 대로 들어갔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으면 NG인데 꾹 참고 있었던 거죠. 사실 련화 역이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쉬운 배역은 아니에요. 너무 강렬하고 독특해 잘못하면 밑천이 다 드러나거든요.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에서 이미 우희 씨와 작업을 했기 때문에 이번 작품에선 배제하려는 마음도 있었는데, 결국 ‘이 배우가 아니면 어렵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 같아요. 이번에 함께 작업한 경구 씨나 우희 씨를 보면서 이 배우가 이래서 연기를 하는구나, 하는 걸 알겠더군요. 정말 연기 하나만 보고 달려가는 배우들이죠.
‘쉬리’ ‘접속’ ‘초록물고기’ 등을 통해 충무로 르네상스를 이끌던 배우 한석규가 ‘우상’으로 돌아왔다.
몇 년 전 한 강의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한 부자가 있었대요. 그는 어떻게 하면 재산을 더 불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잠들었다가 그날 밤 죽었답니다. 기자님은 이 얘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저는 그걸 ‘한석규라는 배우가 있었다. 자신이 얻은 인기에 만족하며 어떻게 하면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잠들었다가 그날 밤 죽었다’로 바꿔봤습니다. 인생에선 무엇을 얼마나 하느냐보다 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단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연기를 통해 무엇을 원하는 걸까’를 생각해봤는데, 열여섯 살 때 봤던 윤복희 선배님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떠오르더군요. 근사한 예술적 체험에서 오는 희열 그게 좋아서 연기자가 됐고, 중간에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연기를 한 적도 있어요. 그러다 마흔 무렵에 건강도 덜커덕하고, 자신감도 없어졌죠. 연기라는 것이 하찮게 느껴지고 지치기도 했고요. 뭔가에 혹한 것이죠. 그러다가 쉰 살이 되니까 아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구나, 하면서 초심이 생각났어요.
한석규 씨에게도 우상이 있나요.
우리 영화에서처럼 폭주하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한 의미에서의 우상(Idol)이라면 어머니가 제 우상입니다. 영화를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극장에 저를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감수성이 예민하셨고 자식들에게 한 번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신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손잡고 극장에 가서 봤던 영화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저도 그렇고 제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의 액션이 아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걸 실감해요. 그래서 오늘 제가 가장 드리고 싶은 말씀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액션과 리액션이라는 겁니다(웃음).
디자인 최정미 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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