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몹시 지치고 피로해 보였다. 하필 그날, 지갑을 잃어버렸다고도 했다. 얼음이 잔뜩 들어간 음료 잔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처럼 그의 얼굴에도 쉴 새 없이 땀이 맺혔다. 찜통더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뭔가 짠하고 아슬아슬한 느낌. 첫 번째 시집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 이후 꼬리표처럼 붙여놓은 자칭 ‘미남 시인’이라는 나르시시즘적 별명도 이 날만큼은 그다지 쾌활한 빛을 띠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쉬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고, 이번 학기를 끝으로 지난 2년간 해오던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서의 글쓰기 강의도 그만둔다고 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만 그만두는 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쉬지 않고 해왔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성지 ‘GQ’의 에디터로 일하던 이우성(35)은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무럭무럭 구덩이’가 당선되면서 ‘시 쓰는 에디터’가 됐다. 2012년엔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문학과지성사)라는 시집도 냈다. 그 사이 직장을 옮겨 잡지사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와 ‘아레나’에서 피처 에디터로도 일했다. 2013년에는 잡지에 소개됐던 칼럼을 묶어 ‘여자는 모른다’(중앙북스)라는 책을 펴냈고, 한겨레신문의 온라인 매거진 ‘ESC’의 인터뷰 연재를 비롯해 다수의 매체에 기고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학창 시절부터 가슴에 품었던 한시들을 자신의 에세이와 엮어 책으로 냈다. ‘로맨틱 한 시’(아르테)가 그 결과물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숨찬 그의 근황 중에는 짧은 결혼생활과 이혼이라는 아픈 이력도 포함돼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맨틱 한 시’는 이혼 직후 집필을 시작한 작품이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사랑을 잠식한 슬픔과 고통을 걷어내는 일이라지만 속살을 파고든 총알을 빼내기 위해 지난 사랑을 속속들이 파헤쳐보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에게는 의도치 않게 ‘로맨틱 한 시’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었다. 책을 쓰는 데 정신을 빼앗겨 덜 슬플 수는 있지만 극복하는 데는 역시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대신, 사랑에 더 정직하고 솔직해지기는 했다. 아픔을 등 뒤에 숨긴 채 괜히 예쁜 척, 희망적인 척 사랑을 말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저 로맨틱하기만 한 사랑이 어디 있나. ‘로맨틱’한 순간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예외적인 때다.
憶故人 억고인 - 이매창
春來人在遠 춘래인재원 봄이 왔다지만 그대 먼 곳에 계셔
對景意難平 대경의난평 경치를 보아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鸞鏡朝粧歇 난경조장헐 난새 거울에 아침 화장을 마치고
瑤琴月下鳴 요금월하명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뜯지요.
看花新恨起 간화신한기 꽃을 볼수록 새로운 설움이 일고
聽燕舊愁生 청연구수생 제비 우는 소리에 옛 시름 생겨나니
夜夜相思夢 야야상사몽 밤마다 그대 그리는 꿈만 꾸다가
還驚五漏聲 환경오루성 새벽 알리는 물시계소리에 놀라 깬답니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소설 쓰는 친한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헐, 너 움?”
“아니.”
“우는데. 왜 움?”
“설거지하는데 컵이 두 개야.”
“미친놈.”
“하나는 내 컵, 다른 하나는… 누구 거였겠어?”
“소설 쓰고 있네.”
이제 둘 다 내가 쓴다. 설거지도 자주 안 하고.
혼자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수돗물 소리도 엉엉 우는 소리로 들려서.
‘잘 지내? 안 궁금하겠지만, 좋아하고 있어, 아직.
네가 알아라도 주면 좋겠어.’
당신이 보라고, 여기 적는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을 다 털어내야 했으니까요.”
눈앞이 아득해져 정신을 잃은 적이 있다. 과로였다. 그는 ‘로맨틱 한 시’를 쓰는 동안에도 밤을 새워 잡지 마감을 하고, 수시로 들어오는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못해 괴로워했다. 급기야 병원에 실려 가고서야 ‘힘들다’는 말을 토해냈다. 시인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 이면에는, 사람이 되기 전에는 절대 동굴을 나서지 않겠다며 부득부득 우겨대는 야생의 곰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스스로를 채찍질할 이유는 무수히 많았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책을 출간하기로 출판사와 이야기가 끝난 상황이었고, 한시를 해석하는 전문가와 감수자, 일러스트레이터 등이 함께하는 공동 작업이었기에 힘들다고 혼자만 나자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책의 표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체로 ‘이우성 에세이’라 쓰여 있지만 그가 이혼의 고통을 뒤로하고 피고름을 짜내듯 원고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들의 노력에 누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요즘 같은 전례 없는 출판 불황에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 초판이 모두 팔린 공 역시 그들에게 돌려야 마땅했다. 동굴 안에서 허덕이고 있는 그를 위해 끊임없이 쑥과 마늘을 넣어준 편집자에게도 미안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으로 완성한 사랑 이야기라니.
애초에 사랑이란 건 그다지 로맨틱하거나 희망적인 감정이 아닌데도 사랑에 관한 착각들은 언제나 그런 것들로만 채워진다. 그렇게 쓰인 말들은 어차피 거짓이다. 심지어 그는 결혼이라는 것은 사랑과는 전혀 별개의 감정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쪽이어서 그 섬뜩함에 스스로를 상처 입히기 일쑤였다.
“현실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거든요.”
어쨌건 로맨틱한 순간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듯 결혼도 사랑이 전부가 아니란 건 선명해졌다. 그의 말처럼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어쩌면 미래에도 달콤하고 말랑말랑하기만 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겁나 슬픈 시 한 수
그는 ‘겁나 슬프기 때문’에 우리 한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풀어놓고 보면 더 절절하고 아파서 예쁜 것이 한시라고 했다. 되짚어보면 꽤나 근래인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시’는 사랑을 고백하거나, 사랑의 아픔을 노래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언어였다. 하지만 십 수년 사이에 시는 대중에게서 가장 멀어진 문학 장르가 됐다. 21세기에 들어 사랑시, 심지어 수백 년 전 한문으로 쓴 시에 이토록 관심이 집중된 적이 있었던가 싶은데도 그는 한사코 ‘로맨틱 한 시’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것이 책에 수록된 그의 에세이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현대시들이 너무 어렵다보니 대중에게서 멀어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한시를 새로이 접해보니 너무 예뻤던 거 아닐까요?”
戀慕時 연모시 - 작자 미상
馬上誰家白面生 마상수가백면생 하얀 얼굴의 말 탄 도령은 누구일까?
爾來三月不知名 이래삼월부지명 석 달이 다 되도록 이름도 몰랐지
如今始識金台鉉 여금시식김태현 지금에야 비로소 김태현임을 알았는데
細眼長眉暗入情 세안장미암입정 가는 눈, 긴 눈썹을 남몰래 사랑한다네
신기해.
이름을 알면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느껴져.
몸짓, 말투, 마음까지도.
그래….
그런데 구체적인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어떤 도령을 좋아하는데 고백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거예요. 마음속으로만 갖고 있다가 겨우 그 사람 이름을 알게 됐는데 그게 김태현이라는 거죠.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기는커녕 내 존재를 알고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면서 그 이름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사랑에 성큼 다가간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 그런 정서가 예쁘고 감동적이에요. 쉽게 다가가거나 고백하지 못하고 누가 알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소중히 여기는 감정. 그런 정서가 좋았어요.”
그러면서도 그는 걸 그룹 ‘포미닛’이 부른 동명의 노래 ‘이름이 뭐예요’나 ‘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 같은 노래도 좋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첫 번째 시집에서부터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고백할 만큼 나르시시즘에 빠져 사는 남자였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것이 진중하지 못한 것은 아니잖아요. 예술의 흐름은 반복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굉장히 직설적인 것들이 유행하다 보면 그 유행을 돌아서 이 시처럼 소극적이지만 애절한 것들에 마음이 가게 되고 그런 거 아닐까요. 이 언어가 빛나기 위해서는 다른 언어들도 필요한 거고. 결국 시어들은 서로가 서로를 빛나게 해주고 있다고 봐요.”
불통의 시대, 지금은 시를 쓰고 싶지 않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먼저 대답했다. 지금은 시를 쓰고 싶지 않다고. ‘로맨틱 한 시’에 수록된 글들도 엄격히 말하면 시가 아니라 ‘에세이’다. 지금까지도 굳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써왔으니 형식이 뭐 그리 대수일까 싶을 수도 있지만, 시인에게 ‘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호흡을 중단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세월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자살을 생각했었어요. 이해 못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거 같아요. 그때 추모시를 썼었는데 고모부가 그러시더라고요.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세월호 이야기를 해야 하냐고요. 문인들 중에도 그런 얘길 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걸 안 따지다가 나라가 이렇게 된 건데, 사람들은 자꾸 경제가 어려우니 그런 얘긴 집어치우라고들 하죠. 그런데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어른이 죽는 건 잘못된 거야’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신뢰가 생기고,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국가와 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요? 그 뒤로 시를 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어요. ‘집밥 백선생’에 열광하는 건 괜찮고, 사람들의 죽음은 외면해야 하는 나라에서 시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요즘도 그는 종종 왜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을 내지 않느냐는 질문을 듣는다. 그의 시를 좋아해주던 사람들은 그의 에세이집에 반가워하면서도 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지, 걱정스러운 어투의 이메일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 질문 앞에서는 그 자신도 먹먹해진다. 하지만 1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노란 리본을 매단 사람들을 만날 때면 저릿한 동지애가 느껴지고 가슴이 뜨끔해진다. 다행인 것은, 시인으로서 이루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이미 첫 시집을 통해 이뤘다고 자조할 수 있다는 점이고, 회사를 그만둔 후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는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두 번째 시집에서는 시대의 괴물이 먹어치워버린 ‘소통’의 방법을 토해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말처럼 시를 쓰는 것은 ‘예술 활동’이지 생산적인 경제활동이 가미된 작업이 아니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 일을 한다고 했다. 그래야 이 사회 안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 문인들이 추구하던 예술적 가치가 그러했듯, 예술이란 여전히 동시대적인 것이다.
돈을 많이 받았으면 하지 않았을 그 밖의 일들
그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예외적 인간이다. 그가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전까지 그의 학교에는 시인으로 등단한 선배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의 청춘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도 일단은 어떻게든 이 사회에 발을 디디고 살 구실을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다 막상 직장을 구하고 나서는 일보다 시를 쓰는 데 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래봤자 1년 내내 땡전 한 푼 손에 쥐기 어렵다는 시인이 되기 위해 정말로 전력을 다했다.
잡지 에디터라는 직업은 어쩌면 지금껏 그가 해온 수많은 ‘돈을 많이 받았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해나가기 위한 구실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후배의 부탁으로 시작하게 된 글쓰기 강의도 그런 일 중 하나다. 수업 전 그가 내건 조건은 단 하나, 수업료를 비싸게 받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마저도 망설였다. 어차피 글이란 가르쳐서 잘 쓸 수 있게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이란 사고의 발현이다. 사고가 성숙해 있지 않다면 성숙한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수업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스킬’을 가르치는 대신 삶에 대한 인식을 다듬는 작업을 함께했다.
제자들은 수업 이후 각자의 삶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방법을 터득해나가고 있다. 요리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 법학도부터 시민단체 활동가로 변신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에 발을 디디며 글쓰기를 해나간다.
무엇이 되었든 돈 많이 벌 기회를 좇는 것보다 옳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것이 ‘삶’이고 시인에게는 그런 삶이 진짜다. 시인 이우성은 과거에도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어한다.
■ 디자인 · 최진이 기자
아니나 다를까. 그는 “쉬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고, 이번 학기를 끝으로 지난 2년간 해오던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서의 글쓰기 강의도 그만둔다고 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만 그만두는 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쉬지 않고 해왔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성지 ‘GQ’의 에디터로 일하던 이우성(35)은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무럭무럭 구덩이’가 당선되면서 ‘시 쓰는 에디터’가 됐다. 2012년엔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문학과지성사)라는 시집도 냈다. 그 사이 직장을 옮겨 잡지사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와 ‘아레나’에서 피처 에디터로도 일했다. 2013년에는 잡지에 소개됐던 칼럼을 묶어 ‘여자는 모른다’(중앙북스)라는 책을 펴냈고, 한겨레신문의 온라인 매거진 ‘ESC’의 인터뷰 연재를 비롯해 다수의 매체에 기고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학창 시절부터 가슴에 품었던 한시들을 자신의 에세이와 엮어 책으로 냈다. ‘로맨틱 한 시’(아르테)가 그 결과물이다.
듣는 것만으로도 숨찬 그의 근황 중에는 짧은 결혼생활과 이혼이라는 아픈 이력도 포함돼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맨틱 한 시’는 이혼 직후 집필을 시작한 작품이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사랑을 잠식한 슬픔과 고통을 걷어내는 일이라지만 속살을 파고든 총알을 빼내기 위해 지난 사랑을 속속들이 파헤쳐보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에게는 의도치 않게 ‘로맨틱 한 시’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었다. 책을 쓰는 데 정신을 빼앗겨 덜 슬플 수는 있지만 극복하는 데는 역시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대신, 사랑에 더 정직하고 솔직해지기는 했다. 아픔을 등 뒤에 숨긴 채 괜히 예쁜 척, 희망적인 척 사랑을 말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그저 로맨틱하기만 한 사랑이 어디 있나. ‘로맨틱’한 순간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예외적인 때다.
憶故人 억고인 - 이매창
春來人在遠 춘래인재원 봄이 왔다지만 그대 먼 곳에 계셔
對景意難平 대경의난평 경치를 보아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鸞鏡朝粧歇 난경조장헐 난새 거울에 아침 화장을 마치고
瑤琴月下鳴 요금월하명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뜯지요.
看花新恨起 간화신한기 꽃을 볼수록 새로운 설움이 일고
聽燕舊愁生 청연구수생 제비 우는 소리에 옛 시름 생겨나니
夜夜相思夢 야야상사몽 밤마다 그대 그리는 꿈만 꾸다가
還驚五漏聲 환경오루성 새벽 알리는 물시계소리에 놀라 깬답니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소설 쓰는 친한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헐, 너 움?”
“아니.”
“우는데. 왜 움?”
“설거지하는데 컵이 두 개야.”
“미친놈.”
“하나는 내 컵, 다른 하나는… 누구 거였겠어?”
“소설 쓰고 있네.”
이제 둘 다 내가 쓴다. 설거지도 자주 안 하고.
혼자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수돗물 소리도 엉엉 우는 소리로 들려서.
‘잘 지내? 안 궁금하겠지만, 좋아하고 있어, 아직.
네가 알아라도 주면 좋겠어.’
당신이 보라고, 여기 적는다.
“내 안에 있는 사랑을 다 털어내야 했으니까요.”
눈앞이 아득해져 정신을 잃은 적이 있다. 과로였다. 그는 ‘로맨틱 한 시’를 쓰는 동안에도 밤을 새워 잡지 마감을 하고, 수시로 들어오는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못해 괴로워했다. 급기야 병원에 실려 가고서야 ‘힘들다’는 말을 토해냈다. 시인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 이면에는, 사람이 되기 전에는 절대 동굴을 나서지 않겠다며 부득부득 우겨대는 야생의 곰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로맨틱 한 시’는 이혼 직후 집필을 시작한 작품이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사랑을 잠식한 슬픔과 고통을 걷어내는 일이라지만 속살을 파고든 총알을 빼내기 위해 지난 사랑을 속속들이 파헤쳐보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에게는 의도치 않게 ‘로맨틱 한 시’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었다.
애초에 사랑이란 건 그다지 로맨틱하거나 희망적인 감정이 아닌데도 사랑에 관한 착각들은 언제나 그런 것들로만 채워진다. 그렇게 쓰인 말들은 어차피 거짓이다. 심지어 그는 결혼이라는 것은 사랑과는 전혀 별개의 감정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쪽이어서 그 섬뜩함에 스스로를 상처 입히기 일쑤였다.
“현실은 그렇게 로맨틱하지 않거든요.”
어쨌건 로맨틱한 순간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듯 결혼도 사랑이 전부가 아니란 건 선명해졌다. 그의 말처럼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어쩌면 미래에도 달콤하고 말랑말랑하기만 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겁나 슬픈 시 한 수
그는 ‘겁나 슬프기 때문’에 우리 한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풀어놓고 보면 더 절절하고 아파서 예쁜 것이 한시라고 했다. 되짚어보면 꽤나 근래인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시’는 사랑을 고백하거나, 사랑의 아픔을 노래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언어였다. 하지만 십 수년 사이에 시는 대중에게서 가장 멀어진 문학 장르가 됐다. 21세기에 들어 사랑시, 심지어 수백 년 전 한문으로 쓴 시에 이토록 관심이 집중된 적이 있었던가 싶은데도 그는 한사코 ‘로맨틱 한 시’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것이 책에 수록된 그의 에세이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현대시들이 너무 어렵다보니 대중에게서 멀어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한시를 새로이 접해보니 너무 예뻤던 거 아닐까요?”
戀慕時 연모시 - 작자 미상
馬上誰家白面生 마상수가백면생 하얀 얼굴의 말 탄 도령은 누구일까?
爾來三月不知名 이래삼월부지명 석 달이 다 되도록 이름도 몰랐지
如今始識金台鉉 여금시식김태현 지금에야 비로소 김태현임을 알았는데
細眼長眉暗入情 세안장미암입정 가는 눈, 긴 눈썹을 남몰래 사랑한다네
신기해.
이름을 알면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느껴져.
몸짓, 말투, 마음까지도.
그래….
그런데 구체적인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어떤 도령을 좋아하는데 고백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 거예요. 마음속으로만 갖고 있다가 겨우 그 사람 이름을 알게 됐는데 그게 김태현이라는 거죠.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기는커녕 내 존재를 알고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면서 그 이름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사랑에 성큼 다가간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 그런 정서가 예쁘고 감동적이에요. 쉽게 다가가거나 고백하지 못하고 누가 알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소중히 여기는 감정. 그런 정서가 좋았어요.”
그러면서도 그는 걸 그룹 ‘포미닛’이 부른 동명의 노래 ‘이름이 뭐예요’나 ‘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 같은 노래도 좋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첫 번째 시집에서부터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고백할 만큼 나르시시즘에 빠져 사는 남자였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것이 진중하지 못한 것은 아니잖아요. 예술의 흐름은 반복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굉장히 직설적인 것들이 유행하다 보면 그 유행을 돌아서 이 시처럼 소극적이지만 애절한 것들에 마음이 가게 되고 그런 거 아닐까요. 이 언어가 빛나기 위해서는 다른 언어들도 필요한 거고. 결국 시어들은 서로가 서로를 빛나게 해주고 있다고 봐요.”
불통의 시대, 지금은 시를 쓰고 싶지 않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먼저 대답했다. 지금은 시를 쓰고 싶지 않다고. ‘로맨틱 한 시’에 수록된 글들도 엄격히 말하면 시가 아니라 ‘에세이’다. 지금까지도 굳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써왔으니 형식이 뭐 그리 대수일까 싶을 수도 있지만, 시인에게 ‘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호흡을 중단하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세월호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자살을 생각했었어요. 이해 못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어쩌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거 같아요. 그때 추모시를 썼었는데 고모부가 그러시더라고요.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세월호 이야기를 해야 하냐고요. 문인들 중에도 그런 얘길 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걸 안 따지다가 나라가 이렇게 된 건데, 사람들은 자꾸 경제가 어려우니 그런 얘긴 집어치우라고들 하죠. 그런데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어른이 죽는 건 잘못된 거야’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신뢰가 생기고, 신뢰가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국가와 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요? 그 뒤로 시를 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졌어요. ‘집밥 백선생’에 열광하는 건 괜찮고, 사람들의 죽음은 외면해야 하는 나라에서 시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요즘도 그는 종종 왜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을 내지 않느냐는 질문을 듣는다. 그의 시를 좋아해주던 사람들은 그의 에세이집에 반가워하면서도 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지, 걱정스러운 어투의 이메일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 질문 앞에서는 그 자신도 먹먹해진다. 하지만 1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노란 리본을 매단 사람들을 만날 때면 저릿한 동지애가 느껴지고 가슴이 뜨끔해진다. 다행인 것은, 시인으로서 이루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이미 첫 시집을 통해 이뤘다고 자조할 수 있다는 점이고, 회사를 그만둔 후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는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두 번째 시집에서는 시대의 괴물이 먹어치워버린 ‘소통’의 방법을 토해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말처럼 시를 쓰는 것은 ‘예술 활동’이지 생산적인 경제활동이 가미된 작업이 아니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 일을 한다고 했다. 그래야 이 사회 안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 문인들이 추구하던 예술적 가치가 그러했듯, 예술이란 여전히 동시대적인 것이다.
돈을 많이 받았으면 하지 않았을 그 밖의 일들
그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예외적 인간이다. 그가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전까지 그의 학교에는 시인으로 등단한 선배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의 청춘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도 일단은 어떻게든 이 사회에 발을 디디고 살 구실을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다 막상 직장을 구하고 나서는 일보다 시를 쓰는 데 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래봤자 1년 내내 땡전 한 푼 손에 쥐기 어렵다는 시인이 되기 위해 정말로 전력을 다했다.
잡지 에디터라는 직업은 어쩌면 지금껏 그가 해온 수많은 ‘돈을 많이 받았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해나가기 위한 구실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후배의 부탁으로 시작하게 된 글쓰기 강의도 그런 일 중 하나다. 수업 전 그가 내건 조건은 단 하나, 수업료를 비싸게 받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마저도 망설였다. 어차피 글이란 가르쳐서 잘 쓸 수 있게 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이란 사고의 발현이다. 사고가 성숙해 있지 않다면 성숙한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그의 수업을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스킬’을 가르치는 대신 삶에 대한 인식을 다듬는 작업을 함께했다.
제자들은 수업 이후 각자의 삶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방법을 터득해나가고 있다. 요리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 법학도부터 시민단체 활동가로 변신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에 발을 디디며 글쓰기를 해나간다.
무엇이 되었든 돈 많이 벌 기회를 좇는 것보다 옳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것이 ‘삶’이고 시인에게는 그런 삶이 진짜다. 시인 이우성은 과거에도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어한다.
■ 디자인 · 최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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