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드라마 ‘밀회’에서 애정결핍형 안하무인 재벌 딸을 실감나게 연기 중인 김혜은. 잘나가던 기상캐스터에서 연기자로 변신한 지 7년째, 더 이상 과거 이력이 아닌 연기력 그 자체로 존재감을 인정받고 있다.
3월 초 포털 사이트 네이버 검색창에는 ‘김혜은 복근’이 상위 검색어로 올랐다. jtbc 드라마 ‘밀회’ 제작발표회에서 복근이 훤히 드러나는 흰색 크롭트 톱을 선보인 결과다. 샛노란 팬츠도 눈길을 끌었지만 등 전체가 시스루로 처리된 상의는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파격’ 그 자체였다. 드라마에서의 첫 등장 또한 범상치 않았다. 벌거벗은 몸으로 젊은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자다 김희애의 갑작스런 방문에 부스스 잠에서 깨는 장면에서는 얼굴을 뒤덮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마스카라가 시커멓게 번진 눈두덩 등 리얼한 모습으로 이 남녀가 전날 밤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 중 김혜은(41)은 서한그룹 회장의 딸이자 서한예술재단 산하 아트센터 대표 서영우로 분한다. 영우는 겉으로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하나 없지만 어려서부터 사랑에 굶주린 탓에 자신의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안하무인 캐릭터. 고교 동창 오혜원(김희애)을 시녀처럼 부리면서 자신에게 훈계를 할 때면 막말을 퍼붓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진다. 서한예술재단 이사장이자 계모 한성숙(심혜진)과의 화장실 난투극에서는 변기에 머리가 처박히기도 하는 등 ‘추악한 상류층’의 민얼굴을 그대로 보여준다.
1997년 MBC 입사 후 7년 동안 간판 기상캐스터로 활약한 김혜은은 2004년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카메오로 출연하면서 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뭘 해도 만능’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던 그는 연기 학원에 등록해 속성으로 연기를 배운 결과, 당초 1회 밖에 안 되던 출연 분량이 6회로 늘어났다. 이후 MBC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로 전향한 그는 3년 뒤 MBC 드라마 ‘아현동 마님’에서 성악을 전공한 며느리 역할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실제로 서울대 성악과 출신에다 이미 가정을 꾸린 상태였던 김혜은은 첫 드라마에서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배우로서 합격점을 받았다. 이후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남자가 사랑할 때’, 드라마 ‘당신 참 예쁘다’ ‘적도의 남자’ ‘오로라 공주’ 등에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아왔다.
그는 악바리 근성으로 연기를 몸에 익혔다. 드라마 ‘아현동 마님’ 때는 전라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 6개월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광주대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영화 ‘범죄와의 전쟁’ 때는 나이트클럽 여사장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몇 달 동안 흡연을 했다. 이로 인해 영화 촬영을 마치고 난 뒤 금단현상이 왔을 정도. 덕분에 그는 최민식, 하정우, 마동석, 곽도원 등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관객에게 연기자로서의 신뢰를 심어줬다. 이번에도 김혜은은 서영우 캐릭터에 푹 빠져 있는 듯 보였다.
“누가 뭐래도 저는 영우를 이해해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탓에 거의 성격 장애에 가까운 정서를 지녔잖아요. 오죽하면 그 나이에 돈으로 남자를 사겠어요.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도 안쓰러워요. 친구인 혜원과 새엄마가 아버지 옆에 붙어서 자기 몫을 다 가져가려고 하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어요. 물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철없고 제멋대로이지만 영우로서는 어떻게든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해요. 영우를 이해하니까 머리채 잡고 싸우는 연기 정도는 너끈히 할 수 있어요(웃음).”
드라마를 보면 그동안 김희애를 이렇게 거칠게 다룬 연기자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혜원을 향한 영우의 횡포는 기가 막힌다. 극의 감정을 이어가기 위해 두 사람은 촬영 전 일부러 거리를 두고 긴장감을 유지하기도 한다. 김혜은은 “영우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버지 돈으로 공부하고, 연봉 1억의 직장에, 남편 교수 자리까지 제공받은 데다, 새엄마와 짜고 자기 자리를 넘보는 혜원이 좋을 리 없지 않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실제 그의 롤모델은 김희애.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기 전부터 김희애의 열혈 팬이었다는 그는 김희애를 몸과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김혜은은 “평소 다른 여배우들이 따라올 수 없는 빛나는 무언가를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곧은 심지가 비밀무기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영우의 눈을 통해 상류층의 추악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요즘, 그는 새삼 정의로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봤다고 한다. 돈과 명예를 무기 삼아 횡포 부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옆에 붙어 또 다른 욕망을 채워가는 자들을 보며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다. 이처럼 ‘밀회’가 남녀 간의 사랑을 뛰어넘어 인생의 거대 담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김혜은은 안판석 PD에 대한 무한 신뢰를 드러냈다.
“첫 미팅 때 장장 6시간에 걸쳐 사는 얘기를 나누면서 꼭 감독님과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감독님은 비중이 작을 수도 있으니 저보고 결정을 하라고 하셨는데, 한 회 한 신만 나오더라도 상관없다고 했죠. 실제로 대본을 받아보니 처음에는 특별 출연인가 싶을 정도로 분량이 작더라고요(웃음). 그래도 가치관이 맞는 분과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촬영에 임했는데, 역시나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요. 안 감독님은 모든 배우가 열연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셨어요. 가장 큰 특징은 배우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연기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어쩔 때는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죠.”
엄마 재능 펼치라며 용기 북돋아주는 딸
연기자로의 성공적인 안착을 가장 기뻐해주는 사람은 남편과 딸. 치과 의사인 남편 김인수 씨는 처음에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하는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이 잘 키우고 남편 내조 잘하는 평범한 삶을 살길 바랐던 것. 하지만 영화 ‘범죄와의 전쟁’ 이후 그를 배우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김혜은은 “영화를 보고 남편은 ‘이제 내 손에서 떠난 문제구나’ 하고 느낀 것 같다”며 “내가 성장하는 걸 보면서 같이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 가은이도 든든한 지원군. 엄마가 연기자라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엄마 손이 한창 필요한 때라 살뜰하게 챙겨주지 못하는 게 늘 아쉽지만 가은이가 엄마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려고 해요. 가끔 숙제를 안 하거나 꾀를 부리면 연기 그만둔다고 엄포를 놔요. 그러면 놀라서 바로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을 하죠(웃음). 한번은 ‘엄마 일 그만두고 우리 가은이 안고 잠이나 실컷 자면 좋겠다’고 했더니 ‘엄마는 재능이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며 저를 나무라더라고요. 하하. 또 얼마 전에는 ‘엄마는 나중에 늙어서 그냥 할머니가 아니라 꼭 배우 할머니가 돼야 해’ 하고 다짐까지 받으려 했어요.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도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열정, 특히 땀 흘려 일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는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라도 성실한 자세로 연기에 임한다.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는 건 물론이고 ‘밀회’를 한 회마다 스무 번 이상 보고 또 봤다고. 특히 요즘 그는 조연들의 연기에 푹 빠져 있다. 김혜은은 “연극으로 내공을 쌓은 분들이어서 그런지 연기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며 감탄을 표했다. 연기 수업도 꾸준히 받고 있다. 연기자로 전향하기 3년 전부터 남몰래 연기 수업을 받으러 다녔던 그는 요즘도 처음 인연을 맺었던 연기 멘토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캐릭터를 이해하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연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성악가도 자신의 노래를 지도해줄 선생님이 있고, 골퍼도 코치가 있듯이 연기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내 연기에 스스로 만족할 때, 그게 바로 벼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늘 ‘자뻑’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해요(웃음).”
날씬하고 어려보이는 외모도 연기자로서 가진 큰 장점. 제작발표회 때 화제가 됐던 ‘복근’은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는 부지런함의 결과물이다. 그는 출산 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운동을 마흔 번씩 하고 있다고 밝혔다. 따로 피트니스 센터를 찾지 않더라도 생활하면서 틈틈이 몸을 움직이고, 촬영장에서도 수시로 스트레칭을 하며 몸과 마음의 긴장감을 푸는 게 그만의 몸매 관리 노하우다. 김혜은은 “제작발표회 때 찍힌 사진을 보고서야 내 배가 그렇게 생긴 줄 처음 알았다”며 웃었다.
“실제로는 친구 역할인 김희애 선배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데 더 나이 들어 보이거나 뚱뚱해 보이면 안 되잖아요(웃음). 드라마 들어가기 전에 더 열심히 다이어트를 했어요. 평소에는 과격한 운동 대신 식이요법으로 관리를 하는데, 저녁 식사 때 탄수화물 대신 단백질과 채소로 배를 채우려고 해요. 그렇게 한 지 8년 가까이 됐는데, 이제는 습관이 돼서 그런지 탄수화물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잘 안 들어요.”
단아한 이미지 좋았다면 기상캐스터 계속해
제작발표회 때 화제가 된 의상은 영우라는 캐릭터를 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설명이다. 캐릭터를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의상으로 명쾌하게 보여주는 게 낫다는 판단에 7년 동안 함께 일해온 스타일리스트와 심사숙고해서 골랐다고 한다. 김혜은은 “너무 야하다는 눈총도 받았지만 지금껏 공식석상에 설 때마다 캐릭터에 맞춰 의상을 입었다. 전작 ‘오로라 공주 ’때는 화려함을 쫓는 성악가에 맞춰 드레스를 입었고, 이번에는 노골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심리의 영우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김혜은은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매 신마다 철저하게 준비하려 애쓴다. 오랜 세월 성악을 한 덕분에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네 살 때 처음 성악을 시작해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오로지 프리마돈나를 꿈꾸며 살았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귀가 열리면서 ‘나는 세계적인 소프라노는 될 수 없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껏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에 포기가 쉽게 되더라고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는 연연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여요. 그래서인지 인기에 대한 욕심이나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는 야망이 없어요(웃음). 그저 연기하는 게 좋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캐릭터에 대한 틀과 편견을 깨는 것 또한 연기자로서 그가 추구하는 바다. 강한 캐릭터에 대한 부담감도 털어버린 지 오래. 그는 “강한 이미지는 삶 자체라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 예쁘고 단아한 이미지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게 좋았다면 기상캐스터를 계속하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올해로 4년째 청소년 쉼터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김혜은은 청소년 상담을 할 때도 진취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하곤 한다. 그는 “뭔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가장 예쁘다. 희망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꿈을 찾아주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납득할 수만 있다면 어떤 캐릭터도 겁내지 않고 도전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는 김혜은. 앞으로 그가 보여줄 ‘고품격 파격’에 기대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글·김유림 기자|사진·지호영 기자, jtbc 제공
3월 초 포털 사이트 네이버 검색창에는 ‘김혜은 복근’이 상위 검색어로 올랐다. jtbc 드라마 ‘밀회’ 제작발표회에서 복근이 훤히 드러나는 흰색 크롭트 톱을 선보인 결과다. 샛노란 팬츠도 눈길을 끌었지만 등 전체가 시스루로 처리된 상의는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파격’ 그 자체였다. 드라마에서의 첫 등장 또한 범상치 않았다. 벌거벗은 몸으로 젊은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자다 김희애의 갑작스런 방문에 부스스 잠에서 깨는 장면에서는 얼굴을 뒤덮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마스카라가 시커멓게 번진 눈두덩 등 리얼한 모습으로 이 남녀가 전날 밤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 중 김혜은(41)은 서한그룹 회장의 딸이자 서한예술재단 산하 아트센터 대표 서영우로 분한다. 영우는 겉으로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하나 없지만 어려서부터 사랑에 굶주린 탓에 자신의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표출하는 안하무인 캐릭터. 고교 동창 오혜원(김희애)을 시녀처럼 부리면서 자신에게 훈계를 할 때면 막말을 퍼붓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진다. 서한예술재단 이사장이자 계모 한성숙(심혜진)과의 화장실 난투극에서는 변기에 머리가 처박히기도 하는 등 ‘추악한 상류층’의 민얼굴을 그대로 보여준다.
김혜은은 극 중 의상으로 캐릭터를 표현한다. 제일 오른쪽 사진이 ‘밀회’ 제작발표회에서 입어 화제가 된 크롭트 톱.
1997년 MBC 입사 후 7년 동안 간판 기상캐스터로 활약한 김혜은은 2004년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카메오로 출연하면서 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뭘 해도 만능’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던 그는 연기 학원에 등록해 속성으로 연기를 배운 결과, 당초 1회 밖에 안 되던 출연 분량이 6회로 늘어났다. 이후 MBC에 사표를 내고 프리랜서로 전향한 그는 3년 뒤 MBC 드라마 ‘아현동 마님’에서 성악을 전공한 며느리 역할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실제로 서울대 성악과 출신에다 이미 가정을 꾸린 상태였던 김혜은은 첫 드라마에서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배우로서 합격점을 받았다. 이후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남자가 사랑할 때’, 드라마 ‘당신 참 예쁘다’ ‘적도의 남자’ ‘오로라 공주’ 등에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아왔다.
그는 악바리 근성으로 연기를 몸에 익혔다. 드라마 ‘아현동 마님’ 때는 전라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 6개월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광주대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영화 ‘범죄와의 전쟁’ 때는 나이트클럽 여사장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몇 달 동안 흡연을 했다. 이로 인해 영화 촬영을 마치고 난 뒤 금단현상이 왔을 정도. 덕분에 그는 최민식, 하정우, 마동석, 곽도원 등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관객에게 연기자로서의 신뢰를 심어줬다. 이번에도 김혜은은 서영우 캐릭터에 푹 빠져 있는 듯 보였다.
극 중 심혜진과 김희애를 상대로 막말과 난동을 서슴지 않는 김혜은.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끊임없이 상대 연기자들과 호흡을 맞춘다고 한다.
“누가 뭐래도 저는 영우를 이해해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탓에 거의 성격 장애에 가까운 정서를 지녔잖아요. 오죽하면 그 나이에 돈으로 남자를 사겠어요.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도 안쓰러워요. 친구인 혜원과 새엄마가 아버지 옆에 붙어서 자기 몫을 다 가져가려고 하는데 누가 가만히 있겠어요. 물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철없고 제멋대로이지만 영우로서는 어떻게든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해요. 영우를 이해하니까 머리채 잡고 싸우는 연기 정도는 너끈히 할 수 있어요(웃음).”
드라마를 보면 그동안 김희애를 이렇게 거칠게 다룬 연기자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혜원을 향한 영우의 횡포는 기가 막힌다. 극의 감정을 이어가기 위해 두 사람은 촬영 전 일부러 거리를 두고 긴장감을 유지하기도 한다. 김혜은은 “영우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버지 돈으로 공부하고, 연봉 1억의 직장에, 남편 교수 자리까지 제공받은 데다, 새엄마와 짜고 자기 자리를 넘보는 혜원이 좋을 리 없지 않냐”고 항변한다. 하지만 실제 그의 롤모델은 김희애. 드라마에 함께 출연하기 전부터 김희애의 열혈 팬이었다는 그는 김희애를 몸과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김혜은은 “평소 다른 여배우들이 따라올 수 없는 빛나는 무언가를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곧은 심지가 비밀무기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영우의 눈을 통해 상류층의 추악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요즘, 그는 새삼 정의로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봤다고 한다. 돈과 명예를 무기 삼아 횡포 부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옆에 붙어 또 다른 욕망을 채워가는 자들을 보며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다. 이처럼 ‘밀회’가 남녀 간의 사랑을 뛰어넘어 인생의 거대 담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김혜은은 안판석 PD에 대한 무한 신뢰를 드러냈다.
“첫 미팅 때 장장 6시간에 걸쳐 사는 얘기를 나누면서 꼭 감독님과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감독님은 비중이 작을 수도 있으니 저보고 결정을 하라고 하셨는데, 한 회 한 신만 나오더라도 상관없다고 했죠. 실제로 대본을 받아보니 처음에는 특별 출연인가 싶을 정도로 분량이 작더라고요(웃음). 그래도 가치관이 맞는 분과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촬영에 임했는데, 역시나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요. 안 감독님은 모든 배우가 열연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셨어요. 가장 큰 특징은 배우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연기하게 만든다는 거예요. 어쩔 때는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죠.”
엄마 재능 펼치라며 용기 북돋아주는 딸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나이트클럽 여사장 역을 맡아 배우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연기자로의 성공적인 안착을 가장 기뻐해주는 사람은 남편과 딸. 치과 의사인 남편 김인수 씨는 처음에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하는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이 잘 키우고 남편 내조 잘하는 평범한 삶을 살길 바랐던 것. 하지만 영화 ‘범죄와의 전쟁’ 이후 그를 배우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김혜은은 “영화를 보고 남편은 ‘이제 내 손에서 떠난 문제구나’ 하고 느낀 것 같다”며 “내가 성장하는 걸 보면서 같이 기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 가은이도 든든한 지원군. 엄마가 연기자라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엄마 손이 한창 필요한 때라 살뜰하게 챙겨주지 못하는 게 늘 아쉽지만 가은이가 엄마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려고 해요. 가끔 숙제를 안 하거나 꾀를 부리면 연기 그만둔다고 엄포를 놔요. 그러면 놀라서 바로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을 하죠(웃음). 한번은 ‘엄마 일 그만두고 우리 가은이 안고 잠이나 실컷 자면 좋겠다’고 했더니 ‘엄마는 재능이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며 저를 나무라더라고요. 하하. 또 얼마 전에는 ‘엄마는 나중에 늙어서 그냥 할머니가 아니라 꼭 배우 할머니가 돼야 해’ 하고 다짐까지 받으려 했어요.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도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열정, 특히 땀 흘려 일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는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라도 성실한 자세로 연기에 임한다.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는 건 물론이고 ‘밀회’를 한 회마다 스무 번 이상 보고 또 봤다고. 특히 요즘 그는 조연들의 연기에 푹 빠져 있다. 김혜은은 “연극으로 내공을 쌓은 분들이어서 그런지 연기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며 감탄을 표했다. 연기 수업도 꾸준히 받고 있다. 연기자로 전향하기 3년 전부터 남몰래 연기 수업을 받으러 다녔던 그는 요즘도 처음 인연을 맺었던 연기 멘토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캐릭터를 이해하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연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성악가도 자신의 노래를 지도해줄 선생님이 있고, 골퍼도 코치가 있듯이 연기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내 연기에 스스로 만족할 때, 그게 바로 벼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늘 ‘자뻑’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해요(웃음).”
날씬하고 어려보이는 외모도 연기자로서 가진 큰 장점. 제작발표회 때 화제가 됐던 ‘복근’은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는 부지런함의 결과물이다. 그는 출산 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다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운동을 마흔 번씩 하고 있다고 밝혔다. 따로 피트니스 센터를 찾지 않더라도 생활하면서 틈틈이 몸을 움직이고, 촬영장에서도 수시로 스트레칭을 하며 몸과 마음의 긴장감을 푸는 게 그만의 몸매 관리 노하우다. 김혜은은 “제작발표회 때 찍힌 사진을 보고서야 내 배가 그렇게 생긴 줄 처음 알았다”며 웃었다.
“실제로는 친구 역할인 김희애 선배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데 더 나이 들어 보이거나 뚱뚱해 보이면 안 되잖아요(웃음). 드라마 들어가기 전에 더 열심히 다이어트를 했어요. 평소에는 과격한 운동 대신 식이요법으로 관리를 하는데, 저녁 식사 때 탄수화물 대신 단백질과 채소로 배를 채우려고 해요. 그렇게 한 지 8년 가까이 됐는데, 이제는 습관이 돼서 그런지 탄수화물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잘 안 들어요.”
단아한 이미지 좋았다면 기상캐스터 계속해
제작발표회 때 화제가 된 의상은 영우라는 캐릭터를 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설명이다. 캐릭터를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의상으로 명쾌하게 보여주는 게 낫다는 판단에 7년 동안 함께 일해온 스타일리스트와 심사숙고해서 골랐다고 한다. 김혜은은 “너무 야하다는 눈총도 받았지만 지금껏 공식석상에 설 때마다 캐릭터에 맞춰 의상을 입었다. 전작 ‘오로라 공주 ’때는 화려함을 쫓는 성악가에 맞춰 드레스를 입었고, 이번에는 노골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심리의 영우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김혜은은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매 신마다 철저하게 준비하려 애쓴다. 오랜 세월 성악을 한 덕분에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네 살 때 처음 성악을 시작해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오로지 프리마돈나를 꿈꾸며 살았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귀가 열리면서 ‘나는 세계적인 소프라노는 될 수 없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껏 최선을 다해왔기 때문에 포기가 쉽게 되더라고요. 연기도 마찬가지예요.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는 연연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여요. 그래서인지 인기에 대한 욕심이나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는 야망이 없어요(웃음). 그저 연기하는 게 좋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캐릭터에 대한 틀과 편견을 깨는 것 또한 연기자로서 그가 추구하는 바다. 강한 캐릭터에 대한 부담감도 털어버린 지 오래. 그는 “강한 이미지는 삶 자체라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 예쁘고 단아한 이미지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게 좋았다면 기상캐스터를 계속하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올해로 4년째 청소년 쉼터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김혜은은 청소년 상담을 할 때도 진취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하곤 한다. 그는 “뭔가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가장 예쁘다. 희망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꿈을 찾아주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납득할 수만 있다면 어떤 캐릭터도 겁내지 않고 도전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는 김혜은. 앞으로 그가 보여줄 ‘고품격 파격’에 기대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글·김유림 기자|사진·지호영 기자, jtbc 제공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