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Fifty Shades of Grey)’가 베일을 벗었다. 개봉 전 1억 부 이상 판매된 소설을 원작으로 했기에 영화로 인해 성에 대한 새로운 담론, 혹은 BDSM(Bondage·Discipline·Sadism·Masochism의 약자로 구속·훈육·가학증·피학증 등 네 가지 성적 취향)에 관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물론 글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적나라한 섹스 장면이 어떻게 스크린으로 옮겨졌을지에 대한 호기심도 넘쳐났다.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의 원작은 영화 ‘트와일라잇’의 광팬이던 영국의 주부 E L 제임스가 팬픽 사이트에 연재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동명 소설이다. ‘테스’ 같은 고전소설을 즐겨 읽으며 낭만적 사랑을 꿈꿔온 순수한 문학도(아나스타샤)가 젊고 섹시하며 심지어 값비싼 드레스와 노트북, 자동차를 선물하는 걸 즐기는 억만장자(그레이)를 만나는데, 그가 BDSM을 즐기는 남자라는 것이 기본 줄거리다. 첫사랑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배경에 몇 페이지 건너마다 등장하는 노골적인 성적 묘사 등으로 ‘엄마들을 위한 포르노’라고 불렸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영화 ‘트와일라잇’ 팬픽에서 출발해 전 세계적으로 1억 부 이상 판매됐다.
이런 정황들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우리나라에서의 흥행 성적은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다. 3월 17일 현재 누적 관객 수는 36만여 명, 평론가들도 “수갑과 채찍만 등장할 뿐 야하지도 흥미롭지도 않다”는 반응이 대세다. ‘엄마들의 포르노’라고 하기엔, 그들이 젊은 시절 침을 꼴깍 삼켜가며 봤던 ‘나인 하프 위크’가 선사한 관능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
하지만 원작의 그림자와 요란한 수식어들을 걷어내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꽤 흥미로운 19금 로맨스 영화다. ‘급히 옷이 찢겨져 나갔다. 피부는 땀에 젖고 숨 쉬기가 곤란해졌다’ 같은 구절이 자주 등장하는 할리퀸 소설을 몰래 숨겨 놓고 닳고 닳도록 봤던 여성들이라면 충분히 이 영화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전체 관객 중 여성의 비율이 66%, 3040연령 관객이 70% 정도에 달한다는 사실이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어쨌든 현재 스코어로 볼 때 이 작품은 에로 영화에 관한 한국 관객들의 까다로운 취향을 보여준 셈인데, 이런 점을 고려해서인지 제작사는 속편에서는 섹스 신의 수위를 더욱 높일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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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의 신데렐라 DAKOTA JOHNSON
유명 배우 멜라니 그리피스와 돈 존슨의 딸 다코타 존슨은 이 영화로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별이 됐다.
영화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놓은 평론가들도 다코타 존슨에 대해서는 찬사 혹은 후한 평점을 줬다. 심지어 영국의 ‘더 가디언’지는 “테일러존슨 감독은 다코타 존슨이라는 보물을 발견했다. 엄마인 멜라니 그리피스의 장점만 연상케 하는 그녀의 연기는 최근 대중문화의 가장 유치한 로맨스에도 신뢰감을 부여했다”고 평했다.
영화 개봉 후 다코타 존슨은 할리우드 최고의 잇 걸로 떠올랐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가 돼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DNA 속엔 이미 배우로서의 운명이 각인돼 있다. 다코타 존슨은 할리우드 유명 배우 돈 존슨과 멜라니 그리피스의 딸이다. 외할머니는 그레이스 켈리와 함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뮤즈로 꼽혔던 금발의 미녀 배우 티피 헤드런. 영화 ‘새’로 1964년 아카데미 신인여우상을 수상한 헤드런은 1970년대 사자가 등장하는 영화를 구상하기 위해 실제 사자를 데려다 집에서 키웠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애정에 각별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다코타 존슨은 아역배우 출신의 쌍둥이 애슐리 올슨·메리케이트 올슨 자매, 힐튼가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과 절친으로 소녀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에게선 우아함, 어머니에게선 재치를 물려받다
배우로서는 아홉 살 때 네 명의 의붓아버지 중 한 명이던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크레이지 인 알라바마’로 데뷔했고, 이후 10년 동안 전혀 활동하지 않다가 2010년 ‘소셜 네트워크’를 시작으로 몇 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극 중 억만장자를 만난 아나처럼, 다코타 존슨 역시 이 배역 하나로 하루아침에 유명 스타가 된 것. 이를 두고 부모의 후광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출연이 확정되기 전까지 그의 부모도 딸이 오디션을 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다코타 존슨은 최근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출연이 확정되기 전까지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나스타샤 역을 맡았다는 것을 안 뒤로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전적으로 후원했다”고 말했다. 할머니와 엄마에 대해선 “할머니처럼 우아한 여성은 드물 것이다. 어머니는 영리하고 재미있다. 나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대중적으로 주목받은 첫 작품이 농도 짙은 섹스로 시선을 모으는 영화라는 점은 커리어에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터.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그가 영화 출연을 결심한 이유는 이렇다.
“처음엔 다소 주저한 것이 사실이에요. 하지만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 끌렸어요. 그리고 제 마음 어딘가에 용기가 자리하고 있나 봐요. 이 영화를 좋아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싫어할 사람들도 있을 텐데 전 그 모두를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해요.”
키이라 나이틀리의 남자친구로 유명세를 치른 제이미 도넌. 지금은 배우 아멜리아 워너(오른쪽)와의 사이에서 딸을 둔 자상한 가장.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과연 어떤 배우가 남다른 성적 취향을 지닌 섹시한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를 맡을 것인가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SF 영화 ‘퍼시픽 림’의 찰리 허냄이 캐스팅됐지만 크랭크인을 한 달 앞두고 하차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허냄은 개인적인 스케줄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사실은 ‘그레이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원작 팬들의 반대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제이미 도넌(33)은 조르지오 아르마니, 크리스찬 디올, 캘빈클라인 등의 런웨이에 섰던 톱 모델 출신. 모델치고 그리 큰 키(183cm)는 아니지만 적당한 근육질의 몸매, 파란색 눈동자, 젊은 시절의 콜린 퍼스를 떠올리게 하는 매력적인 외모 등 섹시 어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췄다.
2009년에는 신민아와 캘빈클라인진 커플 화보도 촬영한 적이 있다. 2006년 ‘마리 앙투아네트’를 시작으로 몇 편의 영화에 단역 및 조연으로 출연했던 그는 2013년 드라마 ‘더 폴’에서 연쇄 살인마 역을 맡아 2014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아일랜드 출신인 도넌은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전부터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의 남자친구로 파파라치들의 집중 관리 대상에 올랐다. 두 사람은 2003년부터 2년 정도 교제했다. 이후 케이트 모스와도 염문설을 뿌렸던 도넌은 2013년 배우 아멜리아 워너와 결혼,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영화 개봉 직전 영국의 한 언론이 “아멜리아가 이 영화에서의 베드신을 매우 불편해하는 바람에 도넌의 속편 출연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보도했지만 도넌 측은 사실 무근이라고 밝혔다. 두 사람은 지난 2월 초 영국 런던에서 열린 영화 시사회에 다정한 모습으로 동반 참석했다.
키이라 나이틀리, 케이트 모스와 스캔들
기존 영화의 어떤 남자 주인공보다 특별한 성적 취향을 지닌 크리스천 그레이의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영화 속에 나오는 ‘고통의 붉은 방’과 유사한 비밀스러운 공간도 실제로 방문해 보았다는 도넌은 매거진 ‘엘르’와의 인터뷰에서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솔직한 생각도 밝혔다.
“당신의 친구나 직장 동료들 중에도 이런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 기꺼이 회초리를 맞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죠. 개인적으로 선호하진 않는다고 해서 화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로 커리어에 날개를 단 도넌은 당분간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가 될 전망. 시에나 밀러, 브래들리 쿠퍼와 함께 출연한 코미디 영화 ‘존 웰스 프로젝트’, 스릴러물 ‘더 나인스 라이프 오브 루이 드랙스’ 등이 개봉을 앞둬, 그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섹스 판타지 자극하는LUXURY COLLECTION
욕망은 판타지를 자극하는 훌륭한 촉매다. 그레이가 갖고 누리고 선물하는 모든 것들에 관능의 코드가 숨어 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다지도 탐나더냐?”는 이수일의 질문에 쿨하게 “아니요”라고 답할 수 있는 심순애는 얼마나 될까. 보석(같은 값비싼 물건 혹은 그런 걸 살 수 있는 능력)에 여성의 마음을 홀리는 최음 효과가 있다는 걸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잘생긴 그레이가 더 섹시해 보이는 것은 그가 성공한 억만장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연출한 여성 감독 샘 테일러존슨 감독은 온갖 럭셔리한 브랜드를 동원해 고급진 화면을 연출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그가 공들여 준비한 영화 속 럭셔리 컬렉션을 소개한다.
가죽 제품은 생로랑, 넥타이는 특별 제작
그레이의 몸에 착 감기는 명품 하우스의 맞춤 양복 같은 슈트는 영화 의상 디자이너 마크 브리지스가 직접 제작한 것이다. 벨트, 지갑, 브리프케이스, 여행 가방 등 가죽 제품은 모두 생로랑. 그레이 캐릭터를 잡을 때 염두에 두었던 인물은 축구 선수 출신 패셔니스타 데이비드 베컴과 마초의 정석으로 꼽히는 모델 데이비드 간디. 그레이와 대비되는 아나의 다소 촌스러운 듯 평범한 청바지, 카디건, 플라워 프린트 셔츠, 원피스 등도 모두 브리지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 물론 영화의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실크 넥타이 또한 그가 무게까지 고려해가며 깐깐하게 소재를 골라 직접 재단한 것이다.
아우디 자동차, 오메가 시계
남성에게 자동차와 시계는 성공의 척도. 그레이가 타고 다니는 은색 세단 아우디 A8는 국내 시중가 1억5천만원 정도로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서 드림카로 불리는 최고급 차량이다. 그레이가 아나에게 대학 졸업을 기념해 선물한 자동차는 스포트백으로 출시된 최신형 아우디 A3로 가격은 4천만원 상당.
영화 속에서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바람에 눈 밝은 이들에게만 보였을 그레이의 시계는 둘 다 오메가 제품으로, ‘씨마스터 아쿠아 테라 크로노그래프 GMT’와 ‘스피드마스터 문와치 Co-Axial 크로노그래프’. 가격은 각각 8백13만원, 2천9백90만원 상당.
1 레이의 손목에서 빛나는 시계는 오메가 씨마스터 아쿠아 테라 크로노그래프 GMT. 2 그레이의 사무실에 걸려 있던 에드 루샤의 그림 ‘브라더, 시스터’.
붉은 방이 있는 그레이의 펜트하우스 내부는 세트. 하지만 외관은 실제 미국 시애틀에 있는 ‘에스칼라(Escala)’라는 최고급 아파트로, 매매가가 70억원에 육박한다. 내부 인테리어에는 포르투갈 가구 브랜드 ‘보카도로보(Boca Do Lobo)’, 샹들리에 브랜드 ‘코켓(Koket)’, 조명 브랜드 ‘딜라이트풀(Delightfull)’ 등 요즘 뉴욕에서 뜨는 명품들이 총동원됐다. 그레이가 연주했던 거실의 그랜드 피아노는 ‘파지올리(Fazioli)’라는 이탈리아 장인 브랜드로 3억원을 호가한다.
또한 사진·영상 아티스트 출신인 테일러존슨 감독은 그레이의 사무실과 펜트하우스의 미술품 컬렉션을 위해 그의 예술계 인맥을 두루 활용했다는 후문. 영국 런던 골드스미스대 출신인 그는 광고계의 거물 찰스 사치의 후원을 이끌어낸 영향력 있는 그룹 ‘젊은 영국 미술가(Young British Artists)’ 소속으로 활동한 바 있다.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데미안 허스트도 이 그룹의 일원이었다. 영화에서는 에드 루샤의 ‘브라더, 시스터’, 존 발데사리의 ‘내셔널 시티’, 롭 프루이트의 ‘판다’ 등이 등장한다.
Toys IN RED ROOM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덕분에 미국과 유럽에선 섹스 토이 업계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이런 물건도 있었나?’ 싶은 영화 속 신기한 장난감들.
사진 · 김도균 | 소품협찬 · 토이스토리
변두리 어두컴컴한 가게나,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변에서 은밀하게 거래되던 성인용품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선 상당히 비중 있는 소품으로 등장한다. 섹스가 이루어지는 크리스천의 레드룸을 꽉 채우는 것들은 바이브레이터나 딜도 정도가 아닌 수갑, 눈가리개, 채찍 같은 SM 토이들이다. 영화는 실제 성인용품 시장에도 영향을 미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개봉 후 유럽과 미국에서는 섹스 토이 매출이 급증했으며, 최근 미국의 한 쇼핑몰은 SM 토이들을 한자리에 모은 기획 코너를 선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과거에는 변태 행위로 치부됐던 BDSM이 이 영화로 인해 더 이상 금기 행위가 아닌 로맨틱한 성행위로 인식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레이와 아나스타샤의 사랑을 무작정 따라 하기에 앞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섹스 전 안전과 강도의 적정선 등에 관해 당사자 간에 꼼꼼하게 합의를 해두지 않으면 자칫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워싱턴포스트’는 성인용품으로 인한 부상으로 응급실을 찾은 미국인들이 2007년을 기점으로 두 배로 늘었고 사고의 대부분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원작이 출간됐던 2012년과 2013년 사이에 집중됐다고 보도했다.
■ 디자인 · 최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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