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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특집기획 | 세계의 여성 리더

프랑스 정계의 떠오르는 여성 주자 플뢰르 펠르랭 김종숙

글&사진·전승훈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뉴시스 제공

2014. 10. 17

태어나서 3일 만에 길거리에 버려져 프랑스로 입양된 플뢰르 펠르랭. 2012년 아시아계 최초로 프랑스 장관이 된 그는 실용적이고 소신 있는 정책으로 프랑스 정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입양아라는 낙인을 다양성이라는 훈장으로 승화시킨 그의 용기 있는 삶.

프랑스 정계의 떠오르는 여성 주자 플뢰르 펠르랭 김종숙
둥그렇게 말아 올린 검은색 머리에 빨간 립스틱, 미니스커트와 하이힐…. 시크한 동양계 패션모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사진의 배경이 프랑스 대통령 집무실인 엘리제궁의 앞뜰이다. 바로 프랑스 내각회의에 참석하는 플뢰르 펠르랭(41·한국명 김종숙) 장관의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한국계 입양아 출신으로 2012년 아시아계 최초로 프랑스 장관이 된 플뢰르 펠르랭. 그가 꽃(fleur)을 의미하는 자신의 이름처럼 프랑스 내각의 꽃으로 활짝 피어나고 있다.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정권 출범 당시 중소기업 및 디지털경제부장관에 발탁된 그는 2014년 4월 통상관광국무장관을 거쳐 지난 8월 문화부장관에 임명됐다.

프랑스에서 문화부장관은 매우 상징적인 자리다. 1958년 드골 대통령이 재집권한 후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문화부라는 부서가 생겼다. 1930년대 불가리아에서 문화부가 처음 생겼지만, 사실상 내각의 주무 부처로서 문화부가 자리 잡은 것은 프랑스가 세계에서 최초였다. 미국에는 지금도 문화부장관이 없다.

드골 정권 당시 초대 문화부장관으로서 10년간 재직했던 작가 출신 앙드레 말로는 ‘문화 대국’ 프랑스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모든 이를 위한 문화(Culture pour tous)’라는 기치를 내걸고 문화예술의 대중화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1980년대 프랑수아 미테랑 정권에서 10년간 문화부장관으로 재직한 자크 랑도 루브르박물관 피라미드 조형물,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건축 등 강력한 문화 행정으로 프랑스 문화의 큰 그림을 그렸다.

펠르랭 장관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문화부장관이라는 뜻으로 ‘컬처2.0 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올랑드 정권 초기 중소기업 및 디지털경제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프랑스의 디지털 역량을 강화하는 ‘프렌치 테크(French Tech)’를 이끌어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펠르랭은 연극, 영화, 문학, 문화유산 보호와 같은 전통적인 문화부의 영역뿐 아니라 인터넷 불법 다운로드 규제를 위한 법안 같은 디지털 산업 현안에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마뉘엘 발스 총리가 제청한 이번 두 번째 개각에서 최고 스타로 떠오른 여성 장관은 나자 발로드-벨카셈 교육부장관(36)과 플뢰르 펠르랭 문화부장관이다. 프랑스 여성 잡지인 ‘마담 피가로’는 외모와 능력으로 주목받는 두 여성 정치인을 “올랑드 내각의 최고 경주마”로 꼽았다. 특히 잡지는 펠르랭 장관에 대해 새로운 업무에 대한 학습 능력이 출중한 ‘황금 두뇌(Cerveau en or)’ ‘공부 벌레’라고 칭송했다. 영어와 독일어까지 능통한 펠르랭 장관은 프랑스의 정치계뿐 아니라 유럽연합(EU) 차원에서 중요한 일을 할 여성 정치인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날카로운 가시 지닌 장미꽃 같은 정치인

프랑스 정계의 떠오르는 여성 주자 플뢰르 펠르랭 김종숙

프랑스 부르고뉴의 고성에서 만난 펠르랭 장관. 중소기업 및 디지털경제부 장관, 통상관광국무장관 등에 이어 문화부장관 등 요직을 거치며 프랑스 정계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1973년 출생한 지 3일 만에 버려져 생후 6개월 만에 프랑스에 입양된 펠르랭 장관. 그에게 한국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펠르랭은 인터뷰에서 “부모와 자식 간 생물학적 혈연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며 “한 사람의 정체성은 자라온 환경, 문화에서 오기 때문에 나는 동양인이 아닌 프랑스 사람이다”라고 말해왔다. 그는 설령 자신을 낳아준 생부모가 자신을 찾더라도 만날 생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관이 된 후 그에게 한국과의 인연은 커다란 기회로 다가왔다.

지난 7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고성(古城) ‘클로 드 부조’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플뢰르 펠르랭 장관을 만났을 때였다. 시원한 초록색 원피스 차림의 펠르랭 장관은 현지 기업 관계자와 부르고뉴 와인 제조업자들과 인사하기 바쁜 가운데에서도 시간을 쪼개 한국 특파원들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자신이 프랑스 정부에서 한국과의 ‘핫라인’으로 통한다고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실제로 농림부장관이 한국과 육류 수출 협상을 하기 전에 주한 프랑스 대사보다 먼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펠르랭은 “농림부장관이 내게 전화를 해서 ‘당신은 한국에서 스타 아니냐’며 도움을 청했다”고 웃음 지었다.

그는 지난해 월드 스타 싸이와 함께 칸에서 만나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려 화제를 모았다. 펠르랭 장관은 “우리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적었다.

펠르랭은 프랑스 내각에서 ‘할 말은 하는 장관’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 4월 세계 최대 관광 대국 프랑스의 관광 정책을 총괄하는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외국인 관광객에게 불친절한 프랑스인들에게 뼈아픈 자성을 촉구했다. 프랑스에 환상을 품고 관광 온 외국인들이 파리의 지저분한 길거리, 영어가 통하지 않는 레스토랑에서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진다는 ‘파리 신드롬(Paris Syndrome)’까지 거론했다. 그는 중소기업 및 디지털경제부장관 시절 프랑스의 ‘느려터진 인터넷 속도’를 비판하며 한국의 IT 정책을 적극적으로 배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펠르랭은 또한 좌파 사회당 내각에서 ‘이념’보다는 ‘실용주의’를 내건 보기 드문 정치인이기도 하다. 전임 오렐리 필리페티 문화부장관이 구글의 디지털문화원 개관식에 ‘문화 침략’을 이유로 참석을 거부했지만, 펠르랭은 통상관광국무장관 자격으로 참석했다. 또한 그는 미국 온라인 DVD 사이트인 ‘넷플릭스’의 세금 회피 논란에도 “프랑스에 투자하는 기업을 막는 세금 제도가 있다면 어떻게 일자리 창출을 하겠는가”라며 전향적인 의견을 표했다. 그는 “나는 평등, 정의와 같은 좌파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주의자다. 동시에 나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펠르랭에 대해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는 “초대받지 않은 회의에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참석하는 배짱 있는 여성”이자 “가장 날카로운 인물”로 묘사했다. 프랑스 주간지 ‘누벨옵세르바퇴르’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장미꽃”이라고 평가했다.

주간지 ‘파리 마치’는 펠르랭을 프랑스 정계의 ‘패셔니스타’로 꼽았다. 그녀 개인 스타일리스트인 이자벨 뒤베른(패션 컨설팅 회사 ‘10 Vendome’의 설립자)은 “펠르랭은 패션을 무기로 삼는다”고 말했다. 펠르랭은 해외 방문 시에는 크리스토프 조프리나 라빈 카이루즈 같은 젊은 디자이너의 옷을 즐겨 입는다. 지난 2월 백악관 만찬에서는 구치의 롱 드레스를 입었다. 파리에서 업무 중일 때 그는 생 로랑의 검은색 가죽 스커트와 디올의 바(Bar) 재킷, 자라에서 구입한 심플한 스타일의 소품을 섞어서 입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프랑스 정계의 떠오르는 여성 주자 플뢰르 펠르랭 김종숙
입양아에서 장관으로… 운명을 역전시킨 ‘황금 두뇌’

프랑스 정계의 떠오르는 여성 주자 플뢰르 펠르랭 김종숙

1974년 입양 당시 프랑스 공항에서 엄마 품에 안긴 펠르랭.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한복을 사다주며,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해 알려줬다.

펠르랭의 양부모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모두 병사했고 대신 부부는 한국에서 펠르랭 장관과 그의 동생을 입양했다. 양아버지인 조엘 펠르랭은 핵물리학자였다. 그는 입양 직후부터 펠르랭이 아주 똑똑한 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그가 두 살이 되자 알파벳부터 악보, 도형, 색상 같은 다양한 것을 가르쳤다. 펠르랭은 네 살 무렵 한겨울에 다리를 다쳤다. 침대에만 누워 있어야 하는 그에게 어머니는 “글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펠르랭은 두 달 반 만에 글자를 배워 글을 읽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선생님이 그의 실력을 보고 월반을 시켰다.

그는 베르사유에 있는 프랑스-독일어 중학교 입학시험을 높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그는 남들보다 2년이나 빠른 열여섯 살에 대입 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에 합격했다. 열일곱 살에는 명문 비즈니스 스쿨인 에섹(ESSEC)에 입학했고, 스물한 살에는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에 입학했다. 이후 프랑스 최고 엘리트 양성 기관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후 프랑스 감사원에서 10년간 일했다.

프랑스 언론들은 한국의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에서 프랑스 최고 엘리트로 변신한 펠르랭의 ‘인생 역전’을 두고 “공화국(프랑스를 지칭)의 산물”이라고 극찬했다. 펠르랭은 자신이 공부를 열심히 한 동기에 대해 “학업에 충실해야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제 부모님은 생활이 여유로운 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학업에 성공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과외 선생님을 붙여주시며 공부만 하라고 재촉하지 않고 여가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저는 학교란 사회적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고, 지적 호기심도 굉장히 많았어요.”

펠르랭은 20대부터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정의와 평등 같은 ‘좌파의 가치’를 배우면서 자랐던 것이 정치를 하게 된 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펠르랭은 정치에서 한 번도 단계를 뛰어넘으려 하지 않고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갔다. 그는 스스로 전력을 다해 자신의 이력서를 채워나갔다.

첫 데뷔는 2002년 대선 당시 리오넬 조스팽 후보 캠프의 공보팀 말단 직원이었다. 이후 2007년 대선에서는 세골렌 루아얄 후보의 대선 캠프에서 IT정책보좌관으로서 디지털 경제 전문가로 발탁됐고, 2012년 올랑드 대선 캠프에서는 대(對)언론업무와 온라인 선거운동을 총괄했다. 그는 더 이상 ‘상부의 메시지’에 한정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올랑드의 최측근으로 분류됐다. 결국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대선에서 승리한 바로 다음 날 펠르랭을 엘리제궁으로 불러들여 새 내각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펠르랭이 정치계 스타로 등극하기 전에 빼놓을 수 없는 이력이 ‘21세기 클럽’ 회장이라는 직함이다. 이 클럽은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 출신 경제, 언론, 정치 분야 엘리트들의 모임이다. 플뢰르는 이 클럽의 회장으로서 이데올로기 다툼이 아닌 실용주의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쇄신 모임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사업 중의 하나는 저소득층 아이들을 시앙스포 등의 고등교육기관에 초청해 은행, 금융, 의학, 고위 공직 등 다양한 분야의 직업을 소개하고 이런 일을 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일이었다. 프랑스 본토와 해외 1백 개 도시에서 5천여 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가족은 나의 힘

프랑스 정계의 떠오르는 여성 주자 플뢰르 펠르랭 김종숙
펠르랭의 남편인 로랑 올레옹(45)은 그의 강력한 후원자다. 남편도 ENA를 졸업하고 현재 프랑스 최고 행정법원인 콩세이데타(국사원)의 판사로 재직 중이다. 올랑드 정부 초기 여성 장관인 마를리즈 르브랑슈 국가개혁·지방분권·공공사업장관의 부비서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던 올레옹은 당시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24시간 여성 장관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 언론은 공직과 정치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두 사람을 올랑드 대통령과 전 부인 세골렌 루아얄 같은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커플로 예측하고 있다.

두 사람에겐 세 아이가 있다. 펠르랭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하나, 남편이 전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둘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부부를 위해 아들들은 유모가 키우고, 열 살 된 딸은 펠르랭의 친정 부모가 키운다. 그러나 펠르랭은 “나는 권력욕에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은 아니다. 일과 가정의 균형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말했다.

그의 여권에는 ‘플뢰르 펠르랭 김종숙’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가 ‘김종숙’이라는 이름을 빼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에 한국에서 한복을 사다 주기도 했다. 펠르랭은 “아버지가 1970년대에 한국을 방문해 ‘종숙’이라는 이름은 ‘완벽한 여자’라는 뜻이라 듣고 와서 내게 말씀해주셨다”고 회고했다.

펠르랭 장관은 지난해 4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과 만났다. 특히 그는 서울의 광장시장을 방문했을 때 수많은 군중이 몰려 함께 사진을 찍고 인사를 해주었던 경험을 잊지 못한다.

“프랑스도 아닌데, 거리에서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따뜻하게 대해주니 정말 놀라웠어요. 한국에는 1970년대 많은 아이를 외국에 입양아로 보내 일종의 집단 죄의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다음 번엔 딸 베네리스를 한국에 데려가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고 싶어요.”

펠르랭 장관은 입양아라는 낙인을 ‘다양성’이라는 훈장으로 승화시킨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에게 경제 위기 속에서 힘겨워하는 청년 세대를 위한 격려의 말을 부탁하자 이렇게 말했다. “내 삶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절대로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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