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여자와 남자가 만나 부부가 되고 아이가 태어난다? 그런데 내겐 엄마, 아빠가 없습니다. 내가 여자와 남자 사이에서 태어나기는 한 건가? 언니 말처럼 진짜 알에서 태어난 건 아닐까?”
한쪽 얼굴이 검붉게 물드는 오타모반 증후군을 안고 태어난 아이는 눈을 뜨기도 전에 버려져 혜천원에서 키워졌다. 알에서 태어난 아이, 김희아(40) 씨 이야기다. 안면장애가 있는 김씨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 건 그가 KBS ‘여유만만’의 ‘나도 스타 강사다’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최종 4인에 뽑혀 결선에 진출한 그는 얼굴 한쪽을 덮은 큰 점 때문에 ‘사과 반쪽’ ‘아수라 백작’으로 불리던 유년 시절, 스물다섯 살에는 반대쪽 얼굴마저 상악동암에 걸려 함몰되는 시련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삶에 감사한다는 이야기로 방청객과 MC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누군가 물었다. “그리 슬픈 이야기를 어쩜 그렇게 울지도 않고 하세요?”라고. 그가 답했다. “사십 년 동안 너무 울어서 그렇지예.”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김씨는 담당 PD의 추천으로 KBS1 ‘강연 100℃’에도 출연했다. 프로그램 기획 의도에 꼭 맞는 그의 강연으로 녹화장의 온도가 한껏 높아진 것은 물론이다. 이후 그는 ‘감사하는 삶’을 주제로 전국을 누비며 행복을 전파하고 있다.
인생 밑바닥에서 ‘감사’라는 화두를 찾다
이랜드그룹 사원을 대상으로 한 초청강연이 있던 날 그와 만났다. 1백50여 명의 청중 앞에서 차분하지만 유창한 말솜씨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이 여느 전문강사 못지않았다. 강의가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는 “보육원에서 있던 시절에는 여행을 제대로 다녀보지 못했다”며 “강연을 하며 전국을 누비는데, 우리나라에 참 예쁘고 좋은 곳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아이들은 엄마가 TV에 나오면서 덩달아 자기들도 TV에 나오니 참 좋아하더라고요. 엄마를 쳐다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빛이 예전과 많이 달라져서 좋대요. 힐끔거리지 않고 다가와서 악수하고 손잡아주는 모습을 보니까요. 저도 그런 남들의 시선에서 많이 자유로워졌죠.”
어릴 적 남들이 손가락질할까봐 꿈을 물으면 ‘현모양처’라며 대충 둘러댔지만, 본디 그의 꿈은 TV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조금 늦었지만 드디어 꿈이 이뤄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늘 나중에 TV에 나와 강연할 거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러던 와중에 누군가 ‘여유만만’의 오디션 프로젝트를 보고 제 생각이 나더라며 알려줬죠. 지난해 11월 오디션에서 1등한 덕에 무대에 설 수 있었어요. 꿈이 있었기에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3월에는 ‘여유만만’ 제작진의 도움으로 오른쪽 얼굴에 피부 이식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반대쪽 얼굴의 큰 점은 수술받지 않기로 했다고.
“반대편 얼굴은 기능이 워낙 떨어져 수술해 덜 아프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점이 있는 쪽은 수술하고 싶지 않았어요. 전 이걸 복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삶에서 감사의 이유이자 시작이었죠. 이 점 덕에 인생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고 남편을 만나고 두 아이를 얻은 거잖아요. 사람들이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저는 이 점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이 점이 저니까요.”
그가 “삶에서 감사한 부분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 썼다”는 책 ‘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에는 김씨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 한 남자가 등장한다. 남편 박상묵 씨다. 김씨는 스물네 살 되던 해 한 살 위 박씨와 소개팅으로 만났다. 운수업에 종사하는 박씨는 당시 수험생이었다. 김씨가 마음에 들어 연락처를 물은 건 박씨였는데, 정작 연락은 김씨가 먼저 했다고. 스스로도 얼굴에 반점이 있는 자신을 좋아해줄 남자가 세상에 있을까 생각하던 그였다. 남편은 김씨의 어디에 반한 걸까.
“아마도 남자의 로망인 긴 생머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때는 통굽 신발을 신고 허리도 잘록했죠. 나중에 듣기로는 저더러 ‘여배우 닮았다’라고 했대요(웃음). 제가 크고 높아 보였다고 나중에 말하더라고요. 얼굴에 점은 있었지만 그때도 제가 한 ‘도도’ 했거든요. 아마 그 당당함을 좋아한 것 같아요.”
김씨는 “남편은 그때까지 나를 마음에 든다고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남들이 욕할지는 몰라도 제 눈에는 대구의 장동건”이라며 까르르 웃었다.
“외모도 헌칠하지만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었어요. 아픈 부분을 감싸주고 사랑해줬죠. 결혼해서 지내다가도 배우자가 아프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잖아요. 연애 중이었는데도 제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줘서 멋있고 존경스러웠어요.”
첫아이를 임신하며 본격적인 결혼생활을 시작한 부부. 임신을 한다는 건 여자에서 엄마가 되는 경이로운 일이지만, 김씨의 머릿속엔 “아이 얼굴에 점이 있으면 어쩌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아이가 배 속에 있는 열 달 내내 손가락, 발가락 10개가 제대로 있을까가 아니라 점만은 닮지 않고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어요. 나중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저를 닮은 얼굴에 점이 없는 예쁜 아이더라고요. 나도 이렇게 점이 없었더라면 더 많이 사랑받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울컥했죠.”
딸을 키우면서도 풀리지 않던 궁금증이 있었다. 바로 ‘엄마’라는 존재가 주는 느낌이었다.
“첫째 예은이가 일곱 살 때 일이에요. 소꿉놀이를 하던 중에 예은이가 ‘내가 엄마 하고 싶어요’라고 하기에 역할을 바꾸기로 했죠. 제가 딸한테 ‘엄마 배고파’ 했는데 우리 딸이 ‘우리 아기 배고파? 엄마가 맘마 줄게’ 하더라고요. 그 말은 정말 아이 입에서 나온 느낌이 아니었어요. 부모가 어른이 된 자식을 다독이는 느낌이었죠. 제일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딸에게서 듣다니…. 내가 아프다고 하면 엄마는 어떻게 말했을까 싶었어요. ‘엄마 나 아파’라고 했더니 다시 딸이 ‘우리 아기 아파? 엄마가 안 아프게 지켜줄게’ 하더라고요. 펑펑 울었어요. 딸은 제가 진짜로 아파서 우는 줄 알았대요.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아이가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 불쌍하다’ 그러더니 꼭 끌어안고 울더라고요.”
그렇다면 김씨는 어떤 엄마일까. 그는 “집에선 딸 둘과 저까지 셋이서 같이 어지럽힌다”며 “엄해 보여도 약한 엄마다. 소리를 질러도 아이들이 겁을 안 먹더라”라고 했다.
“저는 아이가 ‘이거 하면 안 돼요?’라고 물으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안 되는 거야’라고 말해줘요. ‘이거 했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해요?’라고 하면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자고 말해주죠. 아이가 컵을 깨면 제일 먼저 엄마한테 혼날까봐 걱정하거든요. 그럴 땐 ‘컵은 깼지만 다치지 않았으니 고맙다’고 말해줘요. 안 다친 걸 감사하는 거죠. 어떤 게 감사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어요.”
누구에게나 트라우마가 하나쯤 있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의 상처는 유독 깊이 아로새겨져 쉬이 아물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훈장 같은 흉터를 지니고 꿋꿋이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신앙의 힘도 있었지만 제 후원자이던 진 리그니 구세군교회 사관님의 편지가 큰 힘이 됐어요. 그분이 써준 편지에 ‘사랑하는 희아야’라고 쓰여 있는데 아직도 수십 통을 가지고 있어요. 제 재산 1호죠. 우울할 때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랑하는 희아’ 부분만 반복해서 읽었어요. 그 덕에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지금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장애 극복한 롤모델 되고파
“삶에서 롤모델을 가져보지 못했다”는 그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아마 저와 같은 환경이나 처지에서 성공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을 롤모델로 삼았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외모를 가졌잖아요. 평범한 부모 밑에서 잘 자란 ‘엄친딸’을 롤모델로 삼을 만한 힘이 없었어요. 세상에 많은 아픈 사람들이 주눅 들어 구석에 박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놀림받고 있어요. 사랑을 하고 싶어도 무섭고 거절당할까 두렵죠. 그랬던 본보기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방송사에서 하는 후원 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프로그램은 ‘이 사람이 이렇게 아프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에서 그치거든요. 저는 그 이상을 보여드리고 싶고, 그런 방송의 이후가 되고 싶어요.”
살기 위해 찾았던 ‘감사’는 그에게 꿈과 희망, 용기를 줬다. 그는 “우리가 흔히 ‘감사’한 것 하면 건강, 많은 재산, 좋은 직장 등을 떠올리는데 거기서는 감사보다 ‘겸손’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진정한 감사는 아픔과 고난, 시련 뒤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보다 더 나은 것만을 추구하고 행복을 찾으려 하면 영원히 불행하다”라며 “아픔 뒤의 감사함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앞으로의 꿈은 딸들로부터 “나도 엄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듣는 것. 그는 “부모가 없는 대신 대한민국이 키워준 제가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받은 감사와 사랑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 참고도서·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김영사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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