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호정(44)을 대한민국 최고 미인 배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깡마른 몸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까칠한 이미지마저 도회적이고 세련된 여성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선배 연기자 이재룡과 이른 나이(26세)에 결혼을 하고, 신혼 초‘거짓말’(은수) ‘청춘의 덫’(영주)에서 배종옥, 심은하와 남자 주인공을 놓고 옥신각신할 때까지만 해도 ‘유호정’ 하면 세상물정 모르고 곱게 자란 부잣집 외동딸 이미지가 떠올랐다. 당시엔 그가 청순과 팜파탈을 오가는 연기파 배우, 혹은 걸치는 것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트렌드 리더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초여름엔 매실청, 겨울에는 김장 꼭 담가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유호정은 기자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인생 궤적을 그렸다. ‘로즈마리’ ‘인생이여 고마워요’ ‘앞집여자’ 등에서 그는 살면서 흔하게 마주칠 법한 평범한 주부의 모습을 보여줬다. 몇 차례 공식·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난 유호정의 실제 모습 역시 화려하기보다 차분하고 사려 깊은 쪽에 가까웠다. 아내, 그리고 엄마라는 이름이 가져온 변화다.
그는 여름과 겨울엔 매실청과 김장을 담그고,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 모아 음식 대접하는 걸 좋아하며, 혼자 사는 후배들에겐 밑반찬을 챙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유호정이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다루는 올리브 채널 ‘올리브쇼’의 MC가 됐다는 소식에 참 잘 어울리는 옷을 입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이중화 CP는 “연예인들에게 살림 잘하는 동료를 수소문한 끝에 유호정 씨를 알게 됐다. 실제로 만나 이야기해보니 자신만의 레시피 북을 갖고 있을 정도로 수준급 요리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 인테리어나 패션에 관한 철학이 뚜렷하고 본인만의 스타일이 있었다”고 그를 발탁한 배경을 설명했다.
예쁘고 연기 잘하는 배우가 살림까지 잘한다니 질투가 날 지경이다. 그러나 정작 유호정은 MC 도전이 처음이라 떨린다며 자세를 낮췄다.
연예가에서 소문난 살림꾼 유호정이 ‘올리브쇼’로 처음 MC에 도전한다.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익숙할 거라고 생각하시지만 저는 아직도 많이 어색하고 불편해요. 그럼에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주부로서 공감하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과 그동안 쌓은 살림 노하우를 시청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생각에서였어요. 남편도 좋은 기회니까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줬고요.”
유호정은 집 안 구석구석을 직접 페인트칠하고, 재봉틀을 돌려 쿠션과 소파 커버를 만들고 액자나 인테리어 소품을 DIY로 만들어 집을 꾸민 이야기를 일지 식으로 정리한 책을 펴내기도 햇다. 손끝이 야무지기도 하지만 살림은 마음이 없으면 못하는 일이다. 유호정이 꾸민 집에는 무엇보다 가족을 향한 따뜻한 사랑이 녹아 있었다.
“취미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집 안 꾸미는 것을 즐겨요. 말끔하게 정리해놓고 있으면 뿌듯하고,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물론 살림만 하는 분들만큼은 아니지만 관심도 있고 노력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남편과 아이들이 집에서 만든 김치를 좋아해서 매년 김장을 꼭 담고요. 아, 곧 다가오네요. 6월에는 매실청을 만들어 1년 내내 요리에 활용하죠. 또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가능하면 간식은 건강식 위주로 집에서 만들어 먹이려고 노력하고요.”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싶어
워킹맘의 가장 큰 고민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뭐든 남의 손에 맡기지 못하고 직접 해야 하는 성격인 유호정은 한때 남편과 번갈아 작품 활동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남편이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바쁜 연예계 생활과 두 아이 엄마 노릇을 완벽하게 병행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 이제 열세 살, 열한 살이 된 아이들은 크게 엄마 손을 탈 나이는 지났지만 학교 공부며 학원 오가는 것이며 여전히 신경 쓸 부분이 많다.
“그래도 저는 작품을 하지 않을 때는 한 달이나 두 달씩 쉴 수 있어요. 아이들도 그것에 익숙해져 있고요. 하지만 그런 휴식 기간이 없는 보통 일하는 엄마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어요. 일하면서 아이 키우는 건 정말 많이 힘들어요.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하겠다고 느낄 때가 정말 많아요.”
유호정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신이 하기로 한 이상 조금씩 부족해도 인정하고 넘어가는 여유를 갖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아이들을 못 챙겨준다는 생각이 들면 죄책감이 들어요. 그 대신 함께 있을 땐 정말 잘해주려고 노력하죠. 집에서 요리를 많이 하게 된 것도 아이들과 놀이 차원에서 시작한 측면도 있어요.”
아이들과 씨름하다 보면 자기관리는 뒷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호정은 여전히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에게 인사차 건네는 빈말이 아니다. 이날 촬영을 나왔던 사진기자들도 그의 미모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사실 일을 안 할 때는 저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관리를 안 해요. 평상시에는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되도록 편안하게 지내다 새로 작품을 시작하면 그제야 급하게 관리에 들어가는 편이죠. 저는 적당한 긴장감을 위해서, 그리고 동안 유지를 위해서 꼭 일을 해야 해요(웃음). 그리고 30대까지만 해도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관리를 했는데 40대가 되니 건강에 신경 쓰게 되더라고요. 먹고 바르는 것도 이왕이면 몸에 좋은 걸로 하게 되고 디톡스에도 관심을 갖게 됐죠.”
그러고 보니 요즘 안방극장에서 김성령, 오연수 등 40대 여배우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여전한 외모와 한층 물 오른 연기력, 굴욕 없는 몸매와 과감한 패션,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당당함 등으로 무장한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또래의 ‘40대 워너비 스타’를 바라보는 유호정의 시선이 궁금하다.
“일단 40대 여배우가 할 수 있는 배역이 많아진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그전까지는 엄마 역이 고작이었는데, 연기 반경이 넓어진 것은 확실해요. 하지만 저희가 더 노력해야 하는 부분도 있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에요. 성령 언니 작품을 모니터링하다 보면 ‘어쩌면 저렇게 날씬하고 예쁠 수 있을까’ 감탄하다가도 ‘저 몸매를 만들고 유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안쓰럽기도 해요. 그걸 따라 하려니 고통스럽기도 하고요. 배우들은 늘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책임감이 있지만 무리한 다이어트나 시술은 지양하고 싶어요. 물론 끊임없이 노력하는 배우가 되고 싶지만 그런 외적인 부분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건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여배우의 늘어가는 주름도 자연스럽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알뜰 살림 고수 신애라, 쿨한 오연수, 가족에게 헌신적인 김남주
유호정이 사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삼성동 일대는 차인표·신애라 부부, 손지창·오연수 부부, 김승우·김남주 부부 등 연예인이 많이 살고 있어 일명 ‘스타촌’이라고 불린다. 특히 유호정, 신애라, 오연수, 김남주 등은 같은 동네에서 신혼부터 시작해 육아와 살림, 재테크 정보까지 나누는 끈끈한 이웃이 됐다. 김승우와 김남주가 결혼에 이를 수 있도록 다리를 놓은 이도 바로 유호정이다. 이들은 각각 부부 공동 명의로 집 근처에 수십억원 상당의 빌딩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연예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풍경은 어떨까. 유호정은 “여느 이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까이 살면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고 도움도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신애라 씨는 알뜰 살림의 고수예요. 좋은 물건을 싸게 사는 방법을 알고 싶으면 신애라 씨에게 정보를 얻죠. 또 그렇게 절약한 돈을 의미 있게 쓸 줄도 알고요. 오연수 씨는 보기와 달리 굉장히 쿨한 성격이에요. 학원에 아이들을 데려다주는 일을 비롯해 할 거 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편안하게 아이들을 잘 키우죠. 김남주 씨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저보다 어리지만 김남주 씨한테 배우는 점이 많아요. 아이들한테 헌신적으로 잘하고 남편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해서 그런 점은 본받고 싶어요. 함께 모여 살면 이렇게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나이대가 비슷해서 누군가 바쁘면 스케줄 없는 사람이 대신 아이를 학교나 학원에 데려다주고, 밥도 챙겨 먹이고 그런 점이 좋더라고요.”
유호정의 칭찬 한마디에 신애라, 오연수, 김남주 등 중년 여배우 세 명이 한꺼번에 현모양처 타이틀을 달게 됐다. 스타라는 후광 덕분에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배경 없이도 그 자체로 밝게 빛나는 사람이 있다. 일과 살림을 지혜롭게 병행하는 유호정에게는 주변까지 환하게 밝히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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