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선수 박찬호(40)가 2012년 11월 30일 기자회견을 열어 전격 은퇴를 발표했다. 자신의 결혼기념일, 그것도 야구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홀(서울 플라자호텔)에서였다. 박찬호는 그의 이름과 그를 상징하는 등번호 61이 새겨진 유니폼 13장을 기자회견 테이블에 전시한 뒤, 이를 보며 하나씩 회상하며 웃음 짓다 눈시울을 붉히는 등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코리안 특급은 19년간 이어온 야구 선수로서의 삶과 이별했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에 야구를 시작해 공주중, 공주고를 졸업하고 당시 140km에 달하는 빠른 공을 던져 투수 유망주로 각광받았던 박찬호. 한양대에 입학한 뒤 1994년 그는 LA 다저스의 눈에 들어 메이저리그로 직행했다. 계약금은 무려 1백20만 달러(한화 약 13억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너리그로 강등돼 인고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1996년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두며 주목받았다.
LA 다저스의 푸른 유니폼을 입고 화려하게 꽃핀 박찬호의 전성기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맞닿아 있다. 1997년 선발 고정 등판을 시작해 2000년 최고의 시즌을 보낼 때까지 박찬호는 시름에 빠진 한국인들의 희망이자 자부심이었다. 그가 등판하는 날이면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새벽잠을 설쳐가며 응원했다. 이후 그는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한 뒤 필라델피아 필리스, 뉴욕 양키스 등을 거치며 17년간 메이저리거로 활약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오릭스 버팔로스, 한국의 한화 이글스의 유니폼을 입으며 한·미·일 3개국의 마운드를 지켰다. 그는 메이저리그 4백76경기에 등판해 1백24승 98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4.36을 기록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총 23경기 5승 10패 평균자책점 5.06의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기자회견에서 박찬호는 전날 은퇴를 발표한 뒤 야구계 선후배들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웃었다. 아내 박리혜(38) 씨와 결혼기념일 저녁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메시지가 와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은퇴식 당일 부인 박씨는 개인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않았다. 박씨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 요리연구가로, 아버지 박충서 씨는 일본 부동산계의 큰손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2005년 11월 30일(현지 시간 11월 29일) 미국 하와이 빅아일랜드의 포시즌호텔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애린(7), 세린(5) 자매가 있다. 그는 자신을 지켜봐준 팬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한국 야구 역사상 자신만큼 운이 좋은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며 입을 열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멋모르고 야구를 시작했는데 참 재미있었어요. 친구나 선배보다 잘해보겠다는 경쟁심에서 출발했고, 그러다 보니 우승도 하고 대회 나가서 상도 받았죠. 이 감격을 더 느끼기 위해 야구를 계속하다 보니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꿈도 가지게 됐습니다. 시골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게 됐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영예도 얻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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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메이저리그 직행이 확정된 박찬호(왼쪽 두 번째)가 1994년 입단 기자회견에서 클레어(왼쪽) 당시 다저스 부사장, 동료선수가 된 드라이포트(오른쪽 두 번째), 토니 라소다(오른쪽) 다저스 감독과 손을 한데 모은 뒤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2 90년대 후반 전성기 때 박찬호는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직구 구속과 탁월한 위기 관리 능력을 자랑했다. 3 뉴욕 양키즈에서 활약한 2010년. 재기에 성공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부진이 길어져 같은 해 메이저리그 생활을 청산하게 됐다.
은퇴 후엔 야구 행정가 도전할 계획
미국, 일본을 거치며 박찬호의 소원은 한 달이든 일 년이든 한국 무대에서 선수로 뛰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의 소원은 이뤄졌다. KBO와 프로 구단들의 협의를 통해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2012년 시즌을 뛸 수 있었다. 그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던 연봉도 구단에 백지위임해 옵션 포함 계약금 6억원과 프로야구 선수 최소 연봉 2천4백만원을 아마 야구 발전 기금으로 쾌척했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약속한 시간은 1년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한국 야구를 경험한 박찬호는 큰 아쉬움을 남긴 채 오렌지색 유니폼을 벗게 됐다.
“여러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1년 동안 홀로 적응하는 데도 바빠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팀이라는 것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구성되는 것인데, 제가 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고, 성적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시즌 끝나고 단장님과 동료들이 ‘내년에도 함께 뛸 거라 믿고 있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1년간 뛰겠다는 나름의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은퇴 이유에 대해 “한국 야구에 도움 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향후 계획 역시 야구 발전을 위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자신을 있게 해준 많은 이들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뜻에서였다.
“오랫동안 야구를 했고, 특히 야구 기술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배워오고 경험했던 부분들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한국 야구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프로그램을 더 공부해 유소년 야구 캠프나 대회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그는 앞으로 미국에서 자신이 메이저리그에서 배운 것들, 특히 한국 야구와 접목시키면 좋은 것들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계획이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산업 야구’로, 이러한 개념을 한국에도 적용시키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은퇴 발표 전 박찬호는 신생 팀 NC 다이노스 코치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딱히 어느 팀에 소속돼 일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기회가 된다면 차후 한화 이글스에서 일하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박찬호는 아직까지 세부 계획은 확정된 것이 없다면서 당장은 두 딸 애린, 세린의 학교 문제 때문에 미국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박리혜 씨가 두 자녀를 미국에서 공부시킬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연말은 미국에서 보낸다는 것만 분명히 밝혔다.
“내게 수고했다, 장하다 말해주고 싶어”
19년간 쉴 틈 없이 달려온 박찬호는 “수고했다, 장하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래전부터 아침이나 자기 전에 거울을 보며 거울 속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던 것 같아요. 끊임없는 도전을 하고, 지금까지 목표하고 계획했던 것도 많았거든요. 제가 복이 많아서 좋은 분들이 주위에서 제 꿈을, 목표를 잡을 수 있게 해주고 실현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박찬호는 야구를 학교에 비교했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야구 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자신이 책으로는 배우지 못할 현실을 야구를 통해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또한 야구를 통한 만남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해준 계기가 됐다고 여겼다. 야구를 통해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는 것도, 전성기와 슬럼프 그리고 대기록을 달성하면서 배우고 얻을 수 있던 게 많았다고.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하는 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처럼 박찬호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고, 또 아름다운 모습으로 야구 선수의 삶과 이별했다. 그리고 새로운 봄이 찾아오면 꽃이 피듯 그의 제2의 인생도 아름답게 필 것이다. 이것이 선후배 야구인들이 그에게 아쉽다는 말보다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넨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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