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골든타임’은 종합병원 응급실을 무대로 생과 사, 그리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의학계의 현실과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드라마다. 생명이 위독한 환자를 앞에 두고 병원의 손익을 따지고 자리 다툼을 하는 의사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이성민(44)이 연기하는 응급의학과 최인혁 교수는 그런 속물 의사들의 대척점에 있다.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환자가 우선이다. 3~4일 동안 밤을 새며 수술하느라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병원 문을 나서다가도 응급 환자가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고 다시 들어가는 의사, 살아난다 해도 병원비를 못 낼 게 뻔한 환자도 일단 살려놓고 보는 의사가 바로 최인혁이다. 올곧은 성품 때문에 동료 의사들 사이에선 ‘왕따’지만 시청자들이 보기에 그는 실력과 인간미를 두루 갖춘 그야말로 이상적인 의사다.
최인혁 캐릭터가 판타지에 가깝다면 그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 시청자들이 열광하게끔 만든 것은 오롯이 이성민의 공이다. 그는 머리로 고뇌하며 몸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이번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몸무게를 7kg이나 감량했다. 집을 떠나 두 달 동안 부산에서 올 로케이션을 하고, 바쁜 촬영 스케줄에 24시간도 모자랄 정도지만 화면 속 그의 눈빛은 뜨겁다.
“최인혁이라는 인물은 매사 빨리 움직여야 하는 사람이에요. 굼뜨면 큰일 나죠. 발걸음을 재촉하고, 동작을 좀 더 민첩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경상도 출신이니까 사투리로 대사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대신 생동감을 위해 말을 빨리 하려고 했어요. 수술 장면도 빨리 진행되는 편이라 스스로를 계속 빠른 템포로 움직이게 했죠.”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가 전작 ‘브레인’에서는 최인혁과 정반대인, 처세와 줄타기에 능한 신경외과 과장을 연기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드라마틱한 변신을 감상하는 것도 드라마 마니아들에게는 새로운 재미가 될 것이다. 그는 “‘브레인’ 때 내가 했던 악역을 다른 선배들이 한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때 선배들에게 당하기만 하던 신하균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며 웃었다.
이런 이성민의 호연에 힘입어 초반 한 자릿수 시청률로 고전했던 ‘골든타임’은 현재 매 회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며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성민은 이데일리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인기를 실감하느냐는 질문에 “부산에만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아내가 ‘동네 아줌마들이 (최인혁 때문에) 난리가 났다’고 분위기를 전해주더라. 나는 덤덤한데 주위 사람들이 더 축하해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작품을 통해 그의 미친 존재감을 말하지만, 그의 진가가 나이에 비해 다소 늦게 알려진 만큼 무명 시절의 고생도 만만찮았다.
배우 이성민에게 연기는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경북 봉화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연기를 시작했다. 대학에서 연극영화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꿈을 포기하는 대신 그는 대구에서 극단 활동을 시작했다. 1992년 대구연극제 신인연기상을 받을 만큼 잠재성이 있는 배우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대구에만 있을 수 없었다. 2001년 전국연극제 최우수연기상을 받기도 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대학로 명문 극단인 차이무에 합류했다. 송강호, 강신일 등 걸출한 배우들을 배출하며 대학로 스타 등용문으로 이름을 떨친 차이무를 통해 이성민은 연극판에서 연기 잘하는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연극판에서 인정을 받자 드라마와 영화판에서도 러브콜이 왔다. 2007년 ‘대왕세종’을 시작으로 영화 ‘체포왕’, 드라마 ‘파스타’ ‘브레인’ 등에 연달아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고, 15년간의 무명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전작 ‘파스타’(왼쪽)에서 이성민은 주연 이선균을 밝혀주는 밉지않은 어둠이었다면, ‘골든타임’(오른쪽)의 그는 작품을 빛내줄 여러 빛들 중 하나가 됐다.
동료를 빛나게 하는 조연에서 스스로 빛을 내기까지
그는 잘생긴 배우는 아니다. 오히려 오다 가다 만나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평범한 얼굴이다. 이성민은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당시 개성 없는 외모 때문에 고민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 외모가 지금은 장점이 됐다며 웃어 보인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얼굴 덕에 어떤 역도 소화할 수 있는 천의 가면을 지니게 된 셈이다.
미워할 수 없는 악역으로, 비열한 인간으로, 푸근한 아저씨로 매 작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안방극장에서 활약을 하는 이성민은 주연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이라는 평을 얻으며 드라마 연출자와 제작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파스타’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데 이어 ‘골든타임’에서도 호흡을 맞추게 된 권석장 PD는 제작발표회 당시 그와 다시 만날 수 있어 기뻤다며 캐스팅 소감을 밝혔다. 권 PD는 이성민에 대해 “아직 잠재돼 있는 능력에 비해 알려진 것이 너무 적은 연기자라 생각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권 PD는 이어 “최인혁이라는 캐릭터는 카리스마 있고 선 굵고 직진만 알지만 뒤에서는 고통이나 아픔도 진솔하게 표현해야 하는 역이다. 연기자로서 이성민이 충분히 소화해줄 거라 믿었다”고 말했다.
배우가 자신의 재능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작품을 만나는지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맡은 배역을 어떻게 요리할지는 배우의 몫이다. 반대로 배우를 어떻게 쓰는지는 연출자의 몫이다. 각자의 노력이 잘 어우러져야 시너지 효과가 발생해,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이성민은 자신을 선택한 연출가와 그의 의도를 믿고 임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 역을 위해, 작품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깨닫고 연기한다.
최인혁은 아웃사이더 의사다. 자신의 신념만 믿고 달려왔다. 이성민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연기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무명 시절을 거쳐 이 자리까지 왔다. 둘은 닮은꼴이다. 일 이외의 것은 서툴기만 하고 수줍음이 많다. 최인혁을 맡은 이성민의 모습에서 연기가 아닌 진실이 느껴지고 그에게 열광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래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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