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연재 중인 일본 유명 만화 ‘유리가면’은 궁극의 작품 ‘홍천녀’의 주인공 역을 놓고 어린 두 여배우가 대결하는 내용을 그렸다. 주인공 마야는 평범한 생김새에 덜렁대는 소녀지만 무한한 잠재력의 소유자로 무대 위에서는 ‘무대광풍’이라 불리며 공연장을 지배한다. 배우 류덕환(25)도 그렇다. 무대 밖의 그는 호기심 많고 수다 떨기 좋아하는 20대 남자다. 길 가다 지나쳐도 배우인지도 모를 만큼 평범한 외모를 지녔지만 작품에서는 큰 존재감으로 각인된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2006년 개봉한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주인공 ‘오동구’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오동통하고 뽀얀 몸이 드러나는 게 부끄러워 가슴에 반창고를 붙인 채 씨름판에 올라온 소년. 이는 류덕환이 스무 살에 연기했던 캐릭터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사람들을 웃겼다 울렸다. 마음만은 소녀라 사모하는 일본어 선생님에게 고백하기 위해 트랜스젠더가 되고 싶어 하는 소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설정. 이에 당위성을 부여해 주제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든 것이 곧 배우의 역량이다. 영화를 위해 몸무게를 30kg이나 늘리며 열연을 펼쳐 그해 청룡영화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드라마 출연이 두려운 영화 또는 연극배우
5월 15일 OCN 드라마 ‘신의 퀴즈 3’ 제작발표회에서 류덕환을 만났다. ‘신의 퀴즈’ 시리즈는 시즌제 장르 드라마도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작품이다. 2010년 첫선을 보인 뒤 올해가 세 번째 시즌. 국내 드라마에선 잘 다루지 않는 희귀병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내용으로 알음알음 팬이 늘고 있다. 2011년에는 금요일 밤 11시라는 불리한 시간대임에도 케이블 TV에서는 좀처럼 나오기 어렵다는 시청률 3%를 기록하기도 했다. 류덕환은 이 작품에서 건방지고 돌발행동을 일삼지만 유머와 위트가 넘쳐 미워할 수 없는 한국대학교 법의학 사무소 촉탁의 한진우 역을 맡았다.
기자와는 지난 2월 말 연극 ‘서툰 사람들’ 무대 이후로 석 달 만의 조우. ‘서툰 사람들’은 장진 감독이 22세에 쓴 초기작으로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들어온 도둑이 집주인과 펼치는 한밤중의 대소동을 그린 희극이다. 그는 장 감독의 요청으로 2009년 연극 ‘에쿠우스’ 이후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올랐다. 그가 맡은 역은 물건을 훔치는 본업보다 남 걱정이 더 많은 도둑 장덕배였다. 체구는 작아도 무대 장악력만큼은 헤비급 선수. 그는 장진 감독 극본이 가진 특유의 능글맞은 말투와 재치를 살리며 시작부터 끝까지 사람들을 정신없이 웃겼다. 기자가 보러 간 때는 선배 배우인 예지원과의 무대였는데, 류덕환은 만만찮은 개성을 지닌 그에게 묻히지 않고 팽팽히 맞섰다.
류덕환의 스타일은 몇 달 사이 많이 변해 있었다. 연극 무대에서 최대한 도둑처럼 보이기 위해 기른 덥수룩한 머리와 지저분한 수염을 싹 정리했다. 그는 이번 ‘신의 퀴즈3’ 연출을 맡은 안진우 PD의 요청에 맞게 스타일을 바꿨다. 그래도 꽤 오래 길렀는데 아쉽지 않으냐는 말에 “수염이 어울리지 않아 지금이 훨씬 좋아요” 하며 웃는다. 이야기 내내 그의 눈이 빛난다.
류덕환은 4세 때 연극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데뷔했다. 낯선 사람만 봐도 누군가가 만지기만 해도 심하게 울어대던 아이는 어머니 정옥용 씨의 손에 이끌려 극단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배우로 살았다. 그의 어머니 정씨는 현재 서울유스뮤지컬예술단 단장이다. 그리고 15세 때인 2002년 옴니버스 영화 ‘묻지마 패밀리’ 중 ‘내 나이키’ 편을 시작으로 ‘웰컴 투 동막골’(2005), ‘천하장사 마돈나’(2006), ‘아들’(2007), ‘우리동네’(2007), ‘퀴즈왕’(2010) 등에 꾸준히 출연했다. 그러나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아역으로 몇 번 얼굴을 비친 것 외에는 인연이 없었다. 성인이 돼 유일하게 출연한 드라마가 ‘신의 퀴즈’다. 드라마 기피증이라도 있는 걸까?
류덕환은 드라마 섭외가 자주 오는 편이지만 솔직히 드라마는 겁이 난다고 고백했다. 그처럼 연기 내공이 있는 배우가 매일이 생방송인 연극이나 긴 호흡이 필요한 영화보다 드라마가 더 어렵다는 것은 의외다. 드라마가 싫은 것은 아닌데 단지 집중할 수 있는 작품을 더 선호한다는 그의 말도 왠지 변명처럼 들린다.
류덕환은 신하균, 정재영, 류승룡 등과 함께 장진 사단의 일원으로 꼽힌다. 장진 감독과의 인연은 영화 ‘묻지마 패밀리’를 촬영했던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단편 ‘내 나이키’에 출연한 그는 장 감독의 눈에 딱 들어 계속 호흡을 맞춰왔고 2007년 장진의 ‘필름있수다’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드라마 출연이 겁난다는 그의 말에 장진 사단의 형님들은 이것저것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
“형들이 ‘20대에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해야 더 나이 들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 말에 이제는 마음을 열고 다양한 도전을 하려 하지만 쉽진 않네요(웃음).”
그는 ‘신의 퀴즈’ 캐스팅 제안이 왔을 때도 드라마라는 소리에 대본조차 펼쳐보지 않았다. 주변의 성화로 첫 에피소드를 읽다가 제발로 한진우가 됐다고 털어놓는다. 극본에서 박재범 작가의 힘이 느껴져서 선택했다고. 박 작가가 만들어낸 한진우는 류덕환만의 캐릭터 분석을 통해 그의 향기가 물씬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고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첫 시즌이 끝나자 ‘신의 퀴즈 ’팬들이 ‘신의 퀴즈 2 제작 청원운동’ ‘류덕환 재출연 청원운동’을 시작했다. 처음 케이블 TV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단 말에 “어떤 이유가 있겠지” 하고 지켜봤던 그의 어머니도 시즌 1이 끝나자 청원운동에 동참했다. 많은 이들의 요청 덕에 류덕환은 한진우라는 캐릭터와 함께 지금까지 오게 됐다.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아들’ ‘우리동네’(왼쪽부터)는 아역배우 류덕환을 성인배우로 이끌어 준 작품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내공은 최불암 선생님 수준”
이번 시즌에서 그는 시즌 1과 2에서 러브라인과 파트너십을 함께 보여줬던 강경희 형사(윤주희)가 미국 연수를 떠났다는 설정하에 다른 파트너와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새로이 ‘신의 퀴즈’ 팀에 합류한 배우는 안내상(48). 그는 20년간 현장을 뛰며 사건을 해결한 베테랑 형사 배태식 역을 맡았다. 이번이 류덕환과의 첫 작품이다. 안내상은 그에 대해 “나이는 어리지만 내공은 최불암 선생님 수준”이라 평했다. 또한 그는 대본 리딩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캐릭터 분석력을 보고 슬슬 하다가는 묻힐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덕환 씨는 캐릭터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녹여내요. 연기할 때 순발력도 뛰어나죠. 대본을 받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읽자마자 이미 캐릭터에 푹 빠져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살아남으려면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아침에 나온 대본으로 오후에 촬영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외우는 것도 벅찰 텐데 이미 어떻게 연기할지 다 생각해놓는 거죠.”
연극도 아직 진행 중인데다 영화 대본에 드라마까지 그의 머릿속은 대본으로 꽉 차 있다. 지난 시즌 1, 2 때도 브리핑 신이 많아 외워야 할 대사, 전문 용어들까지 풀어내야 했다. 희귀병과 관련된 드라마라 매 회 듣도 보도 못한 병명이 등장한다. 시즌 3에서는 20글자에 육박하는 ‘관절이완 및 협지성 척추골단골간단이형성증’이란 병명까지 등장했다.
“모르는 병들은 모두 찾아보고 이해하려 노력해요. 시청자들은 어렵구나 하고 그냥 넘길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의학박사 한진우를 연기할 수 있으니까요. 전문적인 내용이어서 좀 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려고 손동작도 만들어 표현하려 하죠.”
그는 대사 외우는 건 어렵지 않지만 한 번에 촬영을 끝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도 외울 대사가 많아 끝난 건 빨리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어 그래요”라고 툴툴댄다. 함께 자리에 있던 박재범 작가가 이 말을 듣고 “이번 시즌엔 대사 분량을 더 늘렸다”고 엄포를 놓는다. 류덕환의 입에서 농담 반 진담 반 “아이고, 나 죽겠네”란 말이 나온다. 그의 넉살에 분위기는 다시 또 화기애애해진다.
그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다. 배우로서 바쁘더라도 학과 공부에 소홀하지 않는다. 졸업이 까다로운 학과지만 그는 지난해 4.5점 만점에 4.33점을 받았다. 그런 점수를 받고도 장학금을 못 탔다며 아쉬워하는 모습이 딱 욕심 많은 대학생이다. 요즘은 영화 연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올해에는 KT에서 주관한 ‘제2회 올레 스마트폰 영화제’에 참여해 임필성 감독의 지도를 받아‘장준환을 기다리며’라는 제목의 첫 단편영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드라마 촬영과 더불어 구혜선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장편영화 ‘복숭아나무’의 막바지 촬영에 힘을 쏟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조승우와 함께 몸이 붙어 태어난 샴쌍둥이 역을 맡았다.
류덕환은 작품에서‘인간 류덕환’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길 바란다.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인간적인 부분이 많이 노출되면 관객들이 캐릭터에 덜 몰입할 거라는 생각에서라고. ‘신의 퀴즈’시청자들이 그의 이름 대신 “한진우다!”라고 불러주는 것이 배우에겐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신의 퀴즈3’에서 한진우는 1편의 ‘타나토스’, 2편의 ‘브렌텍 제약’에 이어 이를 능가하는 ‘임타고니스트(적대자)’를 만나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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