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과천 도립 도서관. 운동화 차림에 가방을 멘 희끗한 머리의 중년 남성이 성큼성큼 걸어온다. 가방의 어깨 부분을 손으로 꼭 쥔 모습이 흡사 등교하는 학생 같다. 사시 최고령 합격자 오세범씨(57)다. 그는 2010년 1차 도전 15회, 2차 도전 8회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시 준비생 사이에서는 40세가 손익분기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험난한 준비 과정을 보상받으려면 최소 40세 이전에는 합격해야 한다는 것. 여기에 비춰보면 오씨의 손익계산서는 형편없는 손해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 역정을 돌아보면 사시 합격이 부와 명예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이자 새로운 인생의 출발임을 알 수 있다. 서울대 74학번인 그는 언어학자를 꿈꿨으나 당시 시대 상황으로 인해 예기치 않게 인생 항로를 변경했다.
“부모님이 모두 초등학교 교사셔서 항상 타인의 모범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요. 학생 시절 모범이라는 게 공부 열심히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 들어갔는데 한 달 만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고, 그걸 계기로 사회 현실에 눈뜨게 됐죠.”
그는 출세가 보장된 법대나 경제학과를 마다하고 언어학과에 진학해 학자의 길을 가려 했다. 하지만 정치적 탄압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유신철폐’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선배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모습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지식은 사회적 산물이고, 학자도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데 이어 교도소에서 구호를 외쳤다는 이유로 또다시 2년을 선고받았다.
“거창하게 운동한다는 것보다는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77년 구속될 당시 시위라는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어요. ‘학생 여러분 모여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순간 사복 경찰들이 달려들어 학생들을 연행해 갔죠. 78년 서울구치소에서 복역할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유신헌법 철폐, 긴급조치 해제, 민주열사 석방 구호를 외쳤다고 다시 징역 2년형을 받았고요. 그 두 사건으로 총 2년4개월 징역(복역 중 특사로 풀려남)을 살았는데, 제가 한 일이라곤 구호 몇 번 외친 것밖에 없어요(웃음).”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유신 정권은 막을 내렸지만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정치적 탄압은 여전했다. 그는 운동을 계속하다가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돼 또다시 1년을 복역했다. 그렇게 그의 20대가 흘러갔고 바깥세상에 나온 기쁨도 잠시, 대학에서 제적돼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단순노동을 전전하다가 이러느니 기술을 배우는 게 낫겠다 싶어 고압가스 자격증을 딴 뒤 1984년 제약회사에 취업했다. 결혼해서 자식 둘을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무엇보다 땀 흘려 일하는 보람이 컸다. 하지만 1987년 노조 총무부장이라는 이유로 그는 회사에서 해고됐다. 이후 복직투쟁을 할 때 만난 인연으로 김칠준 변호사(전 국가인권위 사무총장) 사무실에서 상담실장도 했고, 93년 내일신문사 창간 멤버로 기조실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 마흔을 넘기면서 사법시험 도전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신문사에 다니면서 생활이 안정되니까 거꾸로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은 인생을 그냥 언론사 간부로 살아가야 하나, 편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내 인생을 위한 최선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상담을 하던 때가 떠오르면서 사람 사귀기나 상담을 좋아하니까 변호사를 하면 재미있게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분쟁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며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평균 수명이 늘어나니까 40대에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어요.”
결혼 20주년 기념 마라톤 완주로 확신 생겨
1997년 1월1일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5년 정도면 승부가 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시간이 길어졌다. 치열하게 살아온 남편을 믿고 사시 도전을 격려해줬던 아내도 슬슬 지쳐갔다. 그가 처음 사시 도전을 시작했을 때 초등학생이던 두 딸이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고, 아내도 회사에서 구조조정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는 한동안 변호사 사무실에 취업해 다시 생계 활동을 했다.
“아내가 고생이 많았죠. 학습지 교사, 직장생활 등을 하면서 생계를 책임지며 가장 노릇과 주부 노릇을 병행했으니까요. 합격하고 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러다 폐인 되는 것 아니냐’고 주변에서 걱정도 많이 하고, 말리라는 말도 많이 했던가 보더라고요. 그 모든 반대를 아내가 온몸으로 막아주고 있었던 거죠.”
한창 두뇌 회전이 빠를 시기의 젊은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 대신 그는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으로 체력과 끈기를 키웠다. 공부할 때는 50분 공부하고 10분 쉬는 패턴을 유지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기를 했다.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 과로로 쓰러지기도 하고 허리가 아파 의자에 앉아 있기도 힘들더군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99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하루 1km로 시작해 지금은 3km씩 달리죠.”
그는 2005년 마라톤 완주도 했는데 여기에는 눈물 나는 사연이 있다. 그해는 그와 동갑내기 아내와 결혼한 지 20주년이자, 두 사람이 만 50세가 되는 해였다. 딱히 아내에게 선물할 것이 없었던 그는 마라톤 완주를 통해 아내에게 자신의 체력과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의 지점이라는 35km 지점부터 다리에 가래톳이 솟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계속 달리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승점에서 기다릴 아내를 생각하니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곁을 지나던 구급차 요원이 앰뷸런스에 탈 것을 권했지만 그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5시간32분 만에 42.195km 완주에 성공했다.
“마라톤 완주가 아내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걸 못하면 사시에도 못 붙을 것 같더라고요. 사시가 마라톤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뛰었는데, 나에 대한 확신을 갖는 큰 계기가 됐던 거 같아요.”
아빠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줬던 두 딸은 의사와 육군 소위로 각자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그는 사법연수원에서 2년 동안 공부한 뒤 변호사로 일할 계획이다.
“연수원을 졸업하면 우리 나이로 60세가 됩니다. 남들보다 시작이 늦긴 했지만 그간의 다양한 경험을 밑천 삼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변호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시생 차림’이 잘 어울리는 오세범씨. 앞으로 아픔 지닌 이들 편에 서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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