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은 공부 잘하기. 어른은 돈 많이 벌기. 많은 사람들이 한두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세상, 점점 희미해져가는 꿈의 존재감에 힘을 불어넣는 이가 있다. 정신과 의사 채인영씨(55). 최근 ‘꿈PD 채인영입니다’(샨티)라는 책을 펴내고, 상담과 인터넷 카페 ‘우리는 꿈PD’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꿈을 찾아주고 자신만의 드라마를 쓰도록 돕고 있다.
경쟁 뚫고 좋은 대학 들어가도 다시 등수 매겨져
그가 근무하는 병원 ‘생각과 느낌’은 교육에 관한 한 대한민국에서 따라올 곳이 없다는 서울 강남 대치동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곳곳에 명문대 진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건물 외벽과 엘리베이터는 스타 강사와 강의 시간표로 도배돼 있다. 마치 ‘꿈이 밥 먹여주느냐, 정신 차리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그럼에도 채인영 박사가 이곳에 있는 건,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저는 중학생부터 진료하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학부모들을 상담하면서 ‘엄마들이 집단 노이로제에 걸린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자녀가 초등학교 4학년만 되면 꿈도 맘껏 못 꾸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함께 온 부모들이 저와 얘기하면서 스스로 꿈을 찾아가면 아이들도 변한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거예요. 아이들도 편안해하면서 자기 길을 가는 거죠.”
그는 최근 한 카페에서 본 학부모들의 대화 풍경을 소개했다. ‘아이가 명문 대학에 진학하려면 전교 몇 등 안에 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어느 학원에 보내야 한다’는 정보를 나누던 엄마들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더란다. 확률상 그중 한 아이만 유명 대학에 합격할 수 있으며, 자신들은 모두 경쟁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경쟁을 뚫고 어렵사리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해도, 그 안에서 또 일등부터 꼴등까지 등수가 매겨질 수밖에 없어요. 대학원에 진학해도, 사회에 나가도 마찬가지고요. 그걸 알면서도 그 틀 안에서 버티려는 이유는 그것만이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의 틀로 꿈을 이루려고 하는 한 항상 불안과 좌절에 시달리게 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되죠. 아이들을 한 두가지 잣대로 줄을 세울 게 아니라 때로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고 응원하면서 저마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앞선 세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남 엄마들의 대화 풍경과 사뭇 대비되는 그의 집 풍경은 이렇다. 신년 초가 되면 남편(나덕렬·삼성서울병원 신경외과 박사) 딸(28) 아들(24)은 물론, 동생네 가족과 치매를 앓고 있는 친정어머니까지 모두 한자리에 둘러앉아 자신의 꿈을 이야기한다. 어릴 때부터 예쁜 돌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던 딸은 대학에서 의류디자인을 공부한 뒤 보석 판매 회사 인턴사원으로 일하고 있고, 의사가 되고 싶다던 아들도 그 꿈에 한 발짝 다가서 있다. 매년 꿈이 조금씩 바뀌고 커지기도 하지만, 서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응원하고 격려하는 건 변함이 없다.
채 박사는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꿈을 이뤄가며 살라고 제안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갖고 태어난 재능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무척 좋아하게 만들고, 자신도 모르게 그 일을 향해 에너지를 쏟게 만들며, 그 일을 찾아 열심히 하면 하늘도 반드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채인영 박사는 경기여고, 서울대 의대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그가 남들 다 가는 세속적인 성공의 길이 아닌 꿈을 찾아주는 일을 하게 된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대학 졸업 후 개인병원을 열었는데 진료시간을 저녁 9시까지 연장할 만큼 환자가 많았다.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찾아왔다. 현대의학의 틀을 넘어 자유롭고 싶다는 꿈을 꾸던 차,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났다. 유방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2000년이었다. 그는 일체 치료를 받지 않고 30개월 동안 목숨 걸고 육체와 정신, 영성에 대해 공부했다. 그 과정을 통해 현대의학의 틀로만 이해하던 건강과 병, 치유의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고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남편도 그의 이런 결정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저는 현대의학을 존중하며 다른 분들께 저처럼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를 받지 말라고 권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현대의학은 보이는 걸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이를 통해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어요. 다만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불완전한 면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보이는 것만으로는 입증할 수 없는 아주 커다란 세계가 있다고 믿어요. 저는 의학을 불신했던 게 아니라, 외부의 치료가 아닌 면역력을 최대한 높여 제 스스로 치유의 주체가 되고 싶었던 거죠.”
유방암 계기로 꿈PD 소명 확신
그는 항암치료 대신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에 오르며 영상화 훈련을 했다. 거친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만 들리는 깔딱 고개를 오르면서 암을 치료하는 기분 좋은 면역세포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암을 치료하는 면역세포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어요. 키가 크고 다소 뚱뚱한 체형에 회색 수염이 기분 좋게 얼굴을 덮고 있는 그 할아버지는 조그만 바나나 보트를 타고 몸 구석구석을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그날그날 만들어진 암세포를 잡아채 회색 자루에 담아가곤 했어요. 일하는 모습이 얼마나 즐겁고 유쾌한지 저절로 웃음이 나왔죠. 수술하기 전에는 암세포들이 수술할 부위를 향해 질서정연하게 몰려오는 상상을 했고요.”
그는 훗날 최면을 배우고 나서야 그것이 일종의 몰입, 최면 유도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하버드대 의대 출신 앤드루 웰스 박사 등 대체의학자들은 현대의학으로 치유하기 어려운 여러 질병을 최면을 통해 치유한 임상 사례를 내놓고 있다. 채 박사는 수술 후 정기적으로 전이 검사를 받고 있는데 최근까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건강도 되찾고 꿈도 이룬 그는 이후로 꿈을 찾지 못한 사람, 하고 싶은 일과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달라서 우울해하는 사람, 또 경쟁 사회에서 스트레스와 두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꿈을 찾아주고 스스로 꿈을 이뤄가도록 돕는 꿈PD가 자신의 소명임을 확신하게 됐다.
“꿈을 잘 모르겠어요. 찾아주세요.” “제 꿈은 돈이 안 되는 일인데 시작해도 될까요?”
사람들이 채 박사에게 자주 하는 질문이다. 점쟁이가 아닌 이상,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어떤 결정을 내려주기보단, 그 사람이 천재성을 찾는 일을 도와 꿈에 다가서게 하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천재성을 지니고 있어요. 천재성이란 다른 사람의 능력과 비교해서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능력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입니다. 재미있어서 시간만 나면 하게 되는 일, 또 그 일을 잘해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은 일,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게 천재성이거나 천재성을 찾는 열쇠죠.”
그는 꿈은 있지만 ‘나는 ~해서 안 돼’라고 손놓고 있는 이들에게도 해결책을 제시한다. ‘나는 ∼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비록 ∼하지만’이란 말로 이야기를 풀어 자신만의 신화를 만들어보라는 것이다. 신화는 모두 공통된 얼개를 지니고 있다. 비록 이러이러한 점에서는 부족하지만 좋아하면서도 잘하는 것을 찾아서 했거나 하늘이 도와 꿈을 이루더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비(록 힘든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하(면) 하(늘이 돕는다) 법칙’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렇다면 그의 ‘비록’은 무엇이었을까.
“저의 ‘비록’은 가난하다는 것과 키가 작다는 거였어요.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지금은 가난하지 않잖아요’ ‘키가 작아도 귀여우신데요, 뭐’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웃음). 예전에 우울증 환자를 상담하다 보면 ‘선생님처럼 다 갖춘 분이 제 고통을 어떻게 알겠어요’라고 말하는 분도 있고, 암에 걸려 이제는 고통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제 이야기를 하면 ‘선생님은 정신과 의사니까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잖아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 자신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런 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단점을 솔직히 내보이는 순간, 더는 단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천재성 찾아주는 ‘비좋아하하’ 법칙
“어릴 때 아버지가 경희대 교수라 사립인 경희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친구들 중 저희 집이 제일 가난했어요. 어쩌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대문에 걸려 있는 문패를 보고 우리가 세 들어 사는 걸 알까봐 전전긍긍했죠. 좀 더 커서는 작은 키를 커버하려고 굽이 아주 높은 구두를 신고 그걸 또 감추려고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그런다고 그게 가려지겠어요. 감추면 감출수록 자신만 힘들지.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 성격이 뭐가 문제인지, 뭐가 부족한지 다 알아요. 단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드러내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단점을 솔직히 말하라고 해요. 선을 볼 때도 ‘단점 리스트를 만들어 첫날 다 이야기해라. 단점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진짜 당신 짝이다. 그 다음부터는 좋은 모습만 보일 테니 관계가 나빠질 일도 없다’라고 이야기하죠.”
그는 또 ‘비록(단점)’이 있는 사람이 성공해야 큰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리어카 끌다가 검정고시로 공부해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가 시키는 대로 공부해 좋은 스펙을 갖게 된 사람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스타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죠.”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풍족해지면서 부족함이 없고 어려서부터 중요한 결정을 부모가 대신해준 탓에 꿈에 둔감한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학벌이나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의 브랜드, 직업과 재산이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지 않는다.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되다 보니 자신의 느낌을 신뢰하기는커녕 나중에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자신의 것인지 남이 주입한 것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채 박사는 이들도 자신을 돌아보고 꿈을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한다.
“알맹이 없는 삶은 아무 재미도 의미도 없잖아요. 살아온 배경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나는 누구인가’ ‘이 땅에 왜 왔는가’라는 고민을 하면 좋겠어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통해 퍼즐을 맞추듯 자신의 꿈을 이뤄 행복해지는 걸 보는 게 제 마지막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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