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일상이던 1970년대, ‘일곱 살 난 소년이 일본에서 IQ 측정을 한 결과 210이라는 높은 수치를 받았다’는 기사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IQ 측정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소년은 7시간 동안 시험을 치르며 모든 문제를 맞혔고, 추가로 낸 미적분 문제도 술술 풀어내 지켜보던 일본 취재진을 술렁이게 했다. 영국 기네스협회는 소년의 이름을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으로 등재했고, 이후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연락을 받고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콜로라도주립대에서 공부하며 NASA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돌연 한국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삶을 꿈꾸던 그는 대입을 위해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순서대로 치렀다. 한국 생활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서툴렀던 그에게 언론은 ‘실패한 천재’라는 불명예 타이틀을 달아주었고, 차츰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드라마 같은 삶의 주인공은 현재 충북개발공사 기획홍보부장을 맡고 있는 김웅용씨(49). 4월7일 ‘루마니아 인터내셔널’ ‘주르날룰’ 등 루마니아 언론에서 ‘세계에서 가장 IQ가 높은 인물’ 3위로 그를 소개해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그날, 손꼽히는 명문대인 카이스트의 학생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올해만 벌써 네 번째 자살 소식이었다. 천재들의 자살을 과거 천재라 불리던 사람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김웅용씨가 있는 충북 청주로 향했다.
기자를 깍듯하게 맞이하는 그에게서 권위적인 천재 박사가 아닌 푸근한 이웃집 아저씨의 분위기가 풍겼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내하고 살아야 했던 유소년기 이후의 삶이 얼마나 평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최근 빗발치는 언론의 전화에 의아한 듯 기자에게 “왜 루마니아에서 그런 기사를 냈죠?”라며 되물었다. 이어 그는 “IQ 테스트 자체에 문제가 있고, 내 IQ도 의문스러운 수치”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IQ라고 하는 터먼 지수는 최고치가 ‘200’이에요. 그 이상의 수치는 있을 수 없죠. 제가 IQ 테스트를 받았을 때 한국은 먹고살기 힘들 때라 두뇌 측정 기관이 없었고, 일본에 건너가서 받아야 했어요. 거기서 낸 문제를 다 맞혔더니 ‘측정 불가’라고 나왔죠. 그 자리에서 일본의 수학자 야노 겐타로 교수가 미적분 방정식 문제를 냈는데 마침 아는 문제가 나와서 풀었더니 보너스로 10을 더 줘 ‘210’이라는 수치가 나온 거예요. 그런 식으로라면 지구상에 IQ 200을 넘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걸로 등수를 매기는지 모르겠어요.”
좌절 겪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오산
좋은 성적, 좋은 대학이 목표인 사회에서 ‘IQ 210’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입시라는 문턱 앞에 좌절을 겪을 필요도,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우수한 두뇌를 타고난 김웅용씨에게 좌절을 경험해본 일이 있냐고 묻자 “어떤 측면의 좌절을 말하는 건가요?”라고 되물었다.
“일반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제 나름의 좌절을 숱하게 겪었습니다. IQ 210을 받고 나자 부모님은 ‘한국에서 널 가르칠 방법이 없다’며 걱정하셨고, 그러던 차에 NASA에서 제안이 오자 곧 승낙하셨죠. 그때가 국민소득 80달러였으니 미국으로 가는 것도 일이었어요. 여의도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하와이에서 다시 기름을 넣어 2박3일 걸려 미국에 도착했어요. 서부 콜로라도주립대 대학원에서 3일간 물리학 공부, 동부 휴스턴 NASA 연구소에서 3일간 연구했는데, 여덟 살짜리가 먼 거리를 오가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으니 힘들 수밖에요. 미국 땅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그렇게 살다 보니 제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9년간 폐쇄된 연구소에서 한 일을 말하려면 한 달은 걸릴 거예요.”
김웅용씨가 유학 간 70년, 미국과 소련은 냉전 상태였다. 콜로라도대에서 핵물리학, 열물리학을 공부했던 그는 NASA의 연구소에서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무기를 개발하는 데 투입됐다. 더욱이 69년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해 그쪽 분야도 연구해야 했다. 문제는 연구 자체가 아니었다. 연구를 해도 팀에 소속돼 있다 보니 자신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모든 게 비밀리에 진행되는 통에 학회에 나가 결과를 발표할 수도 없었다. 가능한 선에서 외부 활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선임 연구소장에게 제지를 당하자 그는 점점 견딜 수가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김웅용씨. 사진은 그가 일본방송에 어머니와 함께 출연했던 모습이다.
“부모님이 좋은 곳이라며 가라고 해서 갔는데 막상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1년에 한 번씩 휴가를 얻어 보름 동안 한국에 나와 쉬는 게 유일한 낙이었죠. 9년째가 되자 사춘기가 왔고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생겼어요. 고민 끝에 NASA 연구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몰래 한국으로 돌아왔죠. 연구소요? 당연히 난리가 났죠. 부모님도 ‘할 수 있는 일을 거기서 찾아야 한다’며 어서 돌아가라고 성화셨지만 절대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의 나이 열여덟. 지식을 전달하는 일을 하고 싶어 카이스트에 원서를 냈다. 무난히 통과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그의 착각이었다. 카이스트는 그에게 학위를 입증할 수 있는 증명서를 요구했고, 대학은 물론 초·중·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던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볼 때였나, 수학시험을 준비한답시고 공업수학책을 보고 있었는데 다들 성경책 같은 걸 보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수학의 정석’이란 책이었죠. 시험지를 받자마자 1분 만에 한 문제씩 척척 푸는 학생들이 신기했어요. 전 공식을 암기하기보다 과정을 일일이 적으면서 풀어 한 문제에 10여 분이 걸렸거든요. 어렵사리 합격을 하고 체력장을 보는데 어디선가 제 소식을 듣고 기자들이 나타났어요. 턱걸이·달리기 등 뭔가 하려고만 하면 사진을 찍어대서 정신도 없었고, 운동은 젬병이라 찍힌 사진도 엉망이었죠. 언론에 ‘천재가 바보가 돼서 돌아왔다’는 기사가 났고 어딜 가나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통에 서울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어요.”
청주에서의 대학 생활은 지친 인생의 빛
충분히 서울시 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김웅용씨는 아무런 연고도 없고,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청주를 선택했다. 청주는 가족이 있는 서울과 가깝고 무엇보다 평화로운 정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대학 생활은 끝없는 연구와 사람들의 시선에 시달렸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됐다.
“통기타·봉사·수화 등 동아리를 일곱 개씩 들어 활동했을 만큼 자유와 젊음을 만끽했어요. 친구들과 떠난 무전여행은 지금 생각해면 꿈만 같아요. 배낭 하나 메고 기차에 올라타 ‘여기 괜찮다!’ 그러면 다 같이 우르르 내려서 인심 좋은 분들께 좀 재워달라고 하기도 했죠. 오이밭에서 서리도 했는데 지금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죠(웃음). 친구들 만나면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요즘 세대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며 우리는 참 운이 좋았다고 하죠.”
그는 인생을 통틀어 ‘친구’라는 존재를 대학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미국에서는 자신을 ‘나이 어린 동료’로만 여기는 이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정규 교육과정을 받지 못했던 터라 친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처음으로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들이 생기자 그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고 한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이 전혀 없으니까 친구들은 저를 ‘좀 모자란 애’로 여기며 잘 챙겨줬어요. 은행에서 등록금을 내거나 학과 업무를 보거나,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지식들이 있잖아요. 전 그때까지 그와 비슷한 걸 경험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한번은 영화를 보러 갔는데 어떻게 표를 끊는지 모르니까 친구들이 ‘너는 참’ 그러면서 자세히 알려줬죠(웃음). 늘 제게 뭔가 기대하고 우러러보는 사람들과 지내다가 저를 모자라게 보는 친구들이 생기니 재미있기도 하고 일상생활 자체가 즐겁더라고요.”
대학에서 그는 일생의 반려자도 만났다. 봉사 동아리를 같이 하던 아름다운 여성과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박사 과정을 끝낸 후 부부가 됐다. 연세대·성균관대·경기대 등에서 시간강사를 하다 2006년 충북개발공사가 생기면서 입사했고, 그 사이 아들 둘도 얻었다. 천재의 아이는 얼마나 똑똑할까. 하지만 그는 “평범하다”며 웃음 지었다.
“기자들은 꼭 그걸 묻더라고요. 큰아들은 축구를 굉장히 잘하고, 달리기도 곧잘 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어릴 때 잔병치레를 많이 하기에 유아 스포츠단에 보내 운동을 시켰더니 크면서 그쪽으로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둘째는 손으로 뭔가 만드는 걸 좋아해요. 나중에 예술 쪽으로 나가길 기대하고 있죠. 아이들 엄마는 안심이 안 되는지 기본적인 건 해야 한다며 학원에 보내기도 해요.”
학교에서 아이들 혼자 할 수 없는 숙제를 내줄 때는 그가 도와주는데 다양성이 결여된 교육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고. 한번은 학교에서 페트병으로 물로켓을 만들어오라는 숙제를 내줬는데 그가 비닐봉지로 만들려고 했더니 아들이 “꼭 페트병이어야 한다”고 했다는 것. 어떤 용기로도 물로켓을 만들 수 있고, 용기에 따라 다른 결과를 경험해볼 수도 있는데 한 가지로 단일화시킨 것이 그는 못내 안타까웠다고 한다.
“정답을 만들어놓고 아이들에게 쫓아오라고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 창의성을 강조하는데, 들여다보면 선을 그어놓은 경우가 많아요. 아이들의 다양성을 인정해줘야 하는데 물론 그러다 보면 관리가 안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국가적인 인재를 키우길 바라면서 규정을 만들어놓고 따라오게 하는 우리 교육 환경에도 일부분 문제가 있어요.”
명문대생 압박, 상상 못할 만큼 클 것
김웅용씨는 99년 카이스트에서 대우교수 자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때 적을 뒀던 사람으로서 지금의 카이스트 학생 자살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카이스트 주변 음식점은 낮 동안 조용하다가 새벽 2시부터 문을 열고 불야성을 이뤄요. 학교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술을 마시려는 게 아니라 저녁까지 각자 공부하다 그 시간이 돼서야 밥을 먹으러 나오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새벽 대여섯 시에 잠들면 점심시간쯤 일어나 또 밤새 공부를 하죠. 한 명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요. 그 아이들을 향해 함부로 나약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봐요.”
그는 이어 카이스트만의 등록금 제도가 주는 압박감을 일반대학과 비교해서 설명했다. 일반대 학생들은 모두 등록금을 내고 들어와 그중 학점이 좋은 학생은 장학금을 받지만, 카이스트 학생들은 모두 장학금을 받고 들어와 그중 학점이 떨어진 학생은 돈을 반납해야 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든 없든 받은 장학금을 반납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이중의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카이스트 학생들은 전 과목이 우수한 게 아니라 몇 개 과목에서 특출 난 이들이기 때문에 ‘평균’을 내는 것은 독이 될 수밖에 없다고.
“어떤 학생은 큐브를 1분 만에 맞추고, 어떤 학생은 불어·독일어 동시통역을 기가 막히게 해요. 다들 자기 분야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평균이 높은 사람을 우수하게 평가하잖아요. 아무리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라도 어학 성적과 합해서 평균을 내버리면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죠. 노벨상 받은 사람들을 보면 과학 분야는 특히나 공동수상이 많아요. 혼자서는 각각 1백씩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함께하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3백까지 창출할 수 있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사태의 책임을 학교에게만 지울 수는 없다고도 했다. 징벌적 장학금 제도가 생기기 전부터 카이스트에는 자살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경쟁 사회에 사는 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김웅용씨는 카이스트 학생 자살 사태에 대해 “한 사람, 한 제도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고 정리했다.
좋은 머리를 타고나 보통 사람의 인생 속도보다 10배는 빨리 내달려야 했던 김웅용씨. 대학 이후부터 삶의 속도를 늦춘 그는 “앞만 보기보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꾸 제게 행복하냐고 물어요. 그런데 저는 NASA에서 일할 때보다 여기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 동료들과 소주 한잔할 때가 훨씬 행복해요. 충북 지역을 개발하면서 용지를 확보하고 환경단체 이야기도 듣고 주민과 소통해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일궈냈을 때 쾌감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그렇게 일하고 집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죠. IQ나 성적,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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