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마이더스’ 주인공 김희애가 화제다. 마흔넷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우아한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은 홀로 빛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곁에도 누군가가 있다. 정윤기 인트렌드 대표(42)가 그 주인공. 국내외 패션브랜드 홍보를 주 업무로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건 역시 스타일링이다. 과연 1993년 광고대행사에 찾아가 무작정 “스타일링이 광고 효과에 중요하다”며 일을 달라고 요구한 ‘남성 스타일리스트 1호’답다.
정윤기는 김희애 룩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듯했다. 아이템을 한번 걸치기만 해도 ‘완판(완전히 판매)’시키는 힘을 가진 배우로 그만큼 스타일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그는 드라마 캐릭터를 분석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김희애씨는 작품을 하기 전에 헤어스타일을 세 번이나 바꾸고, 옷도 백 벌 넘게 입어봤어요. 결국에는 클래식하면서도 ‘클린’한 스타일을 택했는데 많은 룩을 레이어드하지 않고, 원피스면 원피스, 투피스면 투피스로 딱 떨어지게 입죠. 액세서리로 원 포인트만 주고요.”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김희애에게 올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작년만 해도 드라마 ‘아테나’의 정우성·수애·최시원·차승원, ‘대물’의 권상우·고현정 등의 스타일링을 동시에 맡아 쉴 새 없이 일하느라 신체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돼 버렸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비타민으로 영양 보충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삶의 패턴이 달라진 건 아니다. 요즘에도 하루 평균 5, 6개 스케줄을 소화한다. 인터뷰가 진행된 3월15일만 해도 패션쇼를 보고, 백화점에서 VIP 고객 대상으로 열린 스타일링 강연에서 스타 스타일링을 마친 뒤에야 겨우 짬을 낼 수 있었다. 그런 짬짬이 이탈리아 신발 브랜드 ‘아쉬’와 콜래버레이션(협업) 하고, 홈쇼핑을 통해 신개념 멀티숍을 운영하고, 케이블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는 인터뷰 중간에 비타민 한 알을 입에 넣으며 “이것 없이는 못 산다”며 싱긋 웃었다.
여배우들과 2시간 통화하고 새벽녘에 잠들어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고 집에 들어가면 녹초가 돼 쓰러질 것 같지만 그는 여배우들과 2, 3시간씩 통화한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늘 수면부족 상태지만 그들의 위로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기 때문이다. 때로는 힘들어서 ‘엉엉’ 소리 내 울다 잠들기도 하는데, 지난밤에도 하루 일과를 보내는 것이 힘들어 한바탕 울면서 감정을 정화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여지없이 ‘어쨌든 옷이 있어 행복한 하루를 보내지 않았느냐’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는 자신이 옷을 사랑하듯 다른 사람들도 옷을 좋아하길 바란다. 인터뷰 도중 대뜸 대중에게 옷 잘 입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잠들기 전 다음 날 입을 옷을 꼼꼼히 챙겨둔다는 정윤기는 “출근 전날 10분만 투자해 스타일을 점검하면 옷 입는 기쁨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본인이 입고 싶은 대로 마음껏 입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대신 상하의 색깔을 세 가지 이상은 섞지 마세요. 색이 많으면 복잡해 보이거든요. 위아래 모두 검정 옷을 입으면 상복 같지만 블랙 앤 화이트로 입고 블루 컬러로 포인트를 주면 예쁘죠. 색깔 톤만 잘 맞춰도 옷을 잘 입는 것처럼 보인다는 걸 기억하세요. 그리고 체형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체형이 좋지 않은 저도 스타일만큼은 포기하지 않잖아요(웃음).”
더 나아가 스타일리시한 주부를 꿈꾸는 이들에게 ‘잇 아이템’으로 롱 재킷, 카디건, 팬츠, 7cm 힐 구두, 플랫폼 슈즈(앞코에서 발꿈치까지 높은 굽을 댄 구두)를 추천했다.
“7cm 굽의 구두를 신으면 허리가 딱 세워지면서 스타일리시해 보여요. 플랫폼 슈즈도 마찬가지죠. 스카프를 해서 엘레강스한 느낌을 살리는 것도 좋고요. 아우터는 좋은 상품으로, 이너는 싼 걸로 믹스해 입으면 오래 입을 수 있죠. 백과 슈즈는 가능한 한 럭셔리한 느낌이 나는 것을 고르고 스타일에 따라 다른 구두를 신는 게 좋고요.”
국내 남성 스타일리스트 1호인 정윤기는 스타들과의 진실한 소통을 스타일링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사진은 그가 스타일링한 여배우들의 모습.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링 비결로 ‘당사자의 스타일 잘 알아내기’를 꼽으며, 옷을 잘 입기 위해서는 “본인의 스타일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혜영의 럭셔리 룩, 김혜수의 파워 숄더, 김정은의 청담동 며느리 룩 역시 스타에 대한 그의 애정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은 아니지만 신뢰 속에 일하다 보면 진솔한 만남으로 이어져 자연스레 친구가 되곤 하는데, 이렇듯 “사람을 잘 아는 것이 스타일링할 때 유리하다”고 한다. 정윤기의 친구는 70%가 스타로, 인터뷰 날도 최지우와 저녁식사 약속이 돼 있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의 스타일링을 도맡아 하는 정윤기도 새로 배워야 할 게 있을까. 그는 “내 스타일링 중 10%는 워스트 드레서로 꼽힌다”며 이를 발전의 디딤돌로 삼는다고 했다. 해외 컬렉션에 가고, 백화점은 1주일에 한 번, 동대문은 적어도 2주일에 한 번은 들르는 것도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한시도 여유를 부리지 않아요. 무슨 일을 하든 감각을 열어두죠. 생활의 발견을 해보는 거예요. 오늘처럼 인터뷰를 위해서 패션복합공간 ‘텐 코르소 코모’에 온 것도 그런 활동 중 하나죠. 이 일은 한 번만 잘못해도 감각을 잃었다는 소리를 듣거든요. 베스트 드레서와 워스트 드레서는 과하다, 과하지 않다는 미세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스타일리스트는 긴장해야 해요.”
책은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자극제. 유일한 낙이 서점에 가서 음악 들으며 책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한 달 평균 60권의 잡지를 읽는 한편 옛 ‘보그’를 들추며 시대의 흐름을 관찰한다. 오드리 헵번을 뮤즈로 여기는 정윤기다운 선택이다.
동대문은 2주일에 한 번, 백화점은 1주일에 한 번
최근 클래식 아이템에 꽂혀 있다는 그는, 따지고 보면 유치원생 때부터 클래식 애호가였다. ‘보타이(나비넥타이)’를 좋아해 늘 하고 다니고, 뿔테 안경을 고집하는 이유도 “클래식 아이템을 선택하면 적어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걸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스타일링할 때 노력이 50% 정도라면 나머지는 제 느낌과 끼로 하는 거죠. 중학생 때 교복자율화가 돼 옷을 자유롭게 입을 수 있었는데, 그때도 대충 입기 싫었어요. 남들한테 조언해주는 것을 좋아해, 친구들이 저와 같이 가서 옷을 사면 실패하지 않았죠. 위로 누나가 셋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누나들이 보던 ‘보그’나 ‘논노’ 같은 잡지를 보며 나도 모르게 감각을 키운 것 같아요. 인천에 살았는데도 참고서 산다고 용돈을 받아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에 와서 옷을 샀어요. 끼가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일찌감치 부모님께 제 의지를 보여드렸던 거죠.”
예나 지금이나 남들을 ‘어떻게 입히면 좋을까’ 고민하며 살아온 정윤기.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내듯 그의 손길 속에 스타들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헌신적으로 일만 하다 보면 간혹 허탈감이 들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는 “왜 없겠느냐”며 “5년 주기로 친해지는 스타들이 바뀔 때마다 말할 수 없이 외로워진다”고 털어놓았다. 한때 외로움을 달래려고 연애를 해볼까도 생각했으나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살면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감정을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현재 스타일리스트로서 최고의 시기를 보내고 있기에 휴식은 10년 뒤로 미뤘다는 그에게 이루고 싶은 꿈이 남았는지 물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조차 환자복 대신 캐릭터 잠옷을 입었다는 그의 대답이 자못 궁금했다.
“직접 대중과 만날 수는 없지만 스타일링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옷 입는 즐거움을 전하고 싶어요. 저는 한국의 패션을 움직이는 하나의 작은 점일 뿐이잖아요.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점이 아닌 별이 되고 싶어요(웃음).”
|
||||||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