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께서 다음 주 안에 탈고하실 것 같고요, 체력이 많이 저하돼서 한 이틀 쉬고 연락드리겠다고 하십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탁구의 성공과정을 그린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를 보면서 집필 작가가 궁금해졌다. 시청자에게 희망이란 꿈을 안겨준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약속이 잡히지 않았다. 두세 차례 연락해보았지만 다음 주 안으로 탈고한다는 문자를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그러던 차에 보조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월요일(9월13일)에 인터뷰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우수진 보조작가와 함께 나타난 강은경 작가(39). 카페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자 아기 사슴이 떠올랐다. 나이 들며 억세질 법도 한데 고뇌하며 글 쓴 시간이 많아선지 맑아 보인다. 그런 그에게 그간 만들어온 드라마를 내려놓는 심정부터 물었다.
“행복하죠. 이 드라마에 이름을 얹은 모든 사람한테 선물 같은 드라마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거든요. 희한하게 섭섭하지는 않아요.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드라마에게) ‘이만큼 사랑받았으니까 됐어~ 잘 가~’라고 말하게 되더라고요. 후련한 것도 있죠. 작가생활 14년 만에 이렇게 취재를 많이 해서 쓴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웃음).”
1년3개월간 30부작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빵을 접하다 급기야 빵을 거부하는 스트레스증후군까지 얻게 됐다니 후련할 만도 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런 집념 있는 작가를 보자 그 스스로가 성공신화의 주인공 김탁구가 아닐까 궁금해졌다. 치열한 세계에서 살아온 만큼 남다른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법도 했다.
친구들의 속내 들어주던 ‘이상한 사명감’ 많던 중학생
“전혀 아니에요. 공무원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2남2녀 중 막내로 평탄하게 살았어요. 경제적으로 힘들어져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에 있던 큰오빠가 저를 맡아주신다기에 건너가 대학에서 컴퓨터 공부하며 아르바이트 하느라 고생하긴 했는데, 그때 그 3년 반을 빼면 일이 술술 풀렸거든요. 스물네 살 때인가. 외로움에 지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한국에 돌아와 방송작가인 친구 아버지께 제 글을 보여드렸는데 드라마 작가를 해보라고 권하셔서 한국방송작가협회에 갔고, 또 거기에서 6개월 정도 있다 김종학·송지나 선생님 계신 프로덕션에 뽑혀 일을 시작했어요. 데뷔작인 ‘백야 3.98’이 좀 저조하긴 했지만 이후 쓰게 된 ‘호텔리어’ ‘오! 필승 봉순영’ ‘달자의 봄’ 정도는 무난하게 선방했어요. 제 작품 중에 안 된 건 최근에 한 ‘강적들’ 정도가 아닐까 싶어요(웃음).”
자신이 겪은 시련은 시련도 아니라고 말하는 강은경 작가. 그런 그가 시련 극복기를 실감나게 쓴 배경은 뭘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보며 거성가(家) 이야기 구도를 잡았다는 그가 답했다.
“만약 제가 복잡한 가정사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면 그건 아마 친구들 덕분일 거예요. 학창시절에 친구들이 제게 어려운 가정사를 많이 말하는 편이었는데, 당시 저는 이상한 사명감이 있어서 그런 친구들의 아픔을 해결해주기 위해 고심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극 중 유경이처럼 아버지한테 학대당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정말로 예쁘게 생겼던 그 아이가 여름에도 긴팔만 입고 다니니까 마음이 안 좋았어요.”
살아온 과정이 탁구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없는 작가를 보노라니 사랑하는 방식이라도 주인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강 작가는 이마저도 고개를 저었다. 다만 탁구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2007년 강 작가의 반려자가 된 남편의 모습이라고 했다.
“강요하지 않고 꾸준히 바라봐줬어요. 일할 때 못 만나는 거 아니까 집 앞에 뭐 갖다놓고 가고,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려도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그런 점에 감동해 남편이 보여준 모습을 탁구에게 많이 부여했던 것 같아요. 결혼한 지금도 한결같은 면이 있거든요.”
그의 말을 듣고 김탁구와 강 작가의 닮은꼴은 없다고 결론지을 찰나, 이번엔 작가가 의외의 말을 꺼낸다. 사람이 아닌 드라마가 탁구 같다는 것이다.
“저는 탁구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우리 드라마는 탁구였어요. 탁구가 거성가에서 쫓겨나 설움 속에서 자랐듯이 드라마 자체도 설움 받으며 시작했거든요. 신인배우 두 명을 주연으로 캐스팅하다 보니 반대하는 분들이 정말로 많았죠. 톱스타가 없어서 그랬는지 협찬은 물론 협조도 해주지 않아 인맥을 동원해야 겨우 취재할 수 있었고요. 시청률이 좋은 편이라 위기가 없을 법도 하지만 탁구처럼 드라마도 매번 어려움에 부닥쳤어요. 주인공이 초반에는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고 중반에는 여러 배역과 호흡 맞추느라 NG를 많이 내는 바람에 촬영이 지연됐거든요. 마침 제가 빵 거부증이 생기는 바람에 빵을 먹어보지 못한 채 대본을 쓰느라 고생했죠. 그래도 다행인 건 보조작가가 많이 도와줬다는 거예요. 이 친구가 찍어온 동영상이나 가져온 자료를 보고 공부하면서 썼거든요.”
순수함과 열정으로 작가 마음 움직인 ‘탁구’, 윤시윤
그럼에도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드라마를 만들어간 사람들의 긍정적인 마음가짐 덕분이다. 긍정의 결정체는 바로 김탁구, 윤시윤이었다. 작가는 ‘지붕 뚫고 하이킥’을 보며 식모를 짝사랑하는 준혁 학생을 보고 ‘(자신의 연기를)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느끼곤 그를 캐스팅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제작진에서 캐스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윤시윤이 바꿔놓았다.
“캐스팅할 수 없게 돼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갔는데 그 친구가 자기는 대본을 6부까지 봤다면서 작가인 저만 아는 해석을 하는 거예요. 탁구가 깡패들에게 ‘너희 착하게 살아라’하고 말하고 ‘내 이름은 높을 탁 구할 구’ 하면서 씩 웃으며 재기 넘치게 끝나는 신을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더라고요. 그런 감정을 배우가 느껴준 게 고마웠죠. ‘엄마와 떨어져 12년 동안 시장통 굴러다니며 깡패처럼 살고 있지만 엄마가 해준 말을 하는 탁구를 보곤 짠했다’는데, 그러곤 얘기를 더 나누다 보니 이 친구가 탁구란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마음을 굳히고 ‘그럼 우리, 사람들의 걱정과 우려를 장작으로 삼아 불을 지펴보자’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시윤이가 그러더라고요. ‘선생님, 걱정과 우려 말고 저를 믿어주시면 제가 그 믿음을 장작으로 삼아보겠습니다’라고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탁구의 긍정적인 마음을 설명해놓고 정작 저는 잊고 있었는데 시윤이에게는 이미 그런 마음이 있더라고요.”
다행히 “중력에 의해 탁구라는 캐릭터와 윤시윤이라는 캐릭터가 서로 당기는 것 같아” 탁구 캐스팅은 결정됐지만 이후에도 캐스팅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다. 그런데도 작가는 걱정이 되기는커녕 긍정적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신인배우들로 진행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유명배우와 하다 보면 서로 고마운 줄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만성화돼 서로 고마운 줄 모르면 작품 하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1년 넘게 쏟아붓는데 기분 나쁘게 끝내고 싶지 않거든요. 그 배우의 인생과 나의 인생에 서로 도움이 되는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어요.”
물론 강 작가가 신인배우의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었던 건 전인화·전광렬·장항선 등 걸출한 중견배우가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인공이 신인배우라는 소식을 듣고도 작가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줬다. 작품 진행에 문제가 생기자 한번은 (탁구 아버지 역을 맡은) 전광렬이 “내가 대본 보는 눈이 있다. 내가 된다고 하는 작품은 (잘) 된다”며 작가를 격려했다. 신인배우에게는 큰 힘이 돼주기도 했다. 첫 대본 연습 때 윤시윤을 보곤 전광렬이 다가가 애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열한 번째 작품을 하는 저도 그런 신인은 처음 만났어요. 신인이라면 머뭇대며 대본을 읽기 마련인데 시윤이는 고민하지 않고 준비한 대로 최선을 다하더라고요. 물론 프로처럼 잘하지는 않았죠. 그렇지만 진심을 담아 연기하는 게 기특해 보였는데, 선배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거예요.”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신인은 신인이었다. 급기야 작가는 직접 연기 지도를 하기로 했다. 드라마가 방영을 시작하기 전에는 전체 리딩을 매 회 한두 번씩 하지만 시작하고 나서는 서너 번 정도 진행하며 배우의 감정선을 일일이 설명한 것이다. 연습하자고 조르는 배우를 보면 안 할 수 없었다.
마음으로 지도할 수 있었던 건 서로 간의 소통이 있었던 까닭. 집필 중에는 배우와 연락하지 않는 강 작가가 웬일인지 탁구와는 수시로 연락했다. 시작은 한 통의 문자였다. 한창 캐스팅 문제로 어려움이 많던 시기에 ‘시작할 때는 아이처럼 시작했지만 (드라마가) 끝나 있을 때는 멋진 배우가 돼 있겠습니다’라고 보낸 윤시윤의 글이 마음을 움직였다. 수시로 잘해보겠다며 다짐하는 그를 보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처음으로 드라마가 방영되고 나서 전화가 왔는데 ‘제가 저렇게 태어났군요’ 하면서 울먹대며 ‘정말 잘할게요, 선생님. 정말 잘할게요, 선생님’ 그러더라고요. 돌이켜보니 그 친구가 제게 가장 많이 한 말이 ‘잘할게요’였어요.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안 예쁘겠어요?”
8부에서 엄마를 납치해간 ‘바람개비’를 찾은 탁구가 빵과 화해를 하는 장면을 보자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작가는 그 이후에는 배우의 역량에 맡겼다. 그러나 중간 중간 위기가 찾아올 때나 배우가 필요로 할 때는 정성을 들였다.
“간절히 원하는데 뿌리칠 수 없었어요. 아침 8시나 9시에 촬영장에서 전화가 오면 잠든 지 서너 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자지 않은 척하면서 간단하게라도 배역의 상황을 설명했죠.”
“시윤이와 내가 탁구와 팔봉 선생으로 살았던 시간”
소통은 그가 자처한 측면이기도 했다. 세상에 큰 스승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극 중 팔봉 선생이란 멘토에게 탁구가 가르침을 받는 관계를 설정해둔 것이다. 평소 존경하는 대상은 있지만 팔봉 선생과 탁구만큼 밀착된 관계를 맺지 못한 작가는 그런 스승의 존재를 만나보고 싶고, 스스로도 그런 모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팔봉 선생이란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가르쳐달라는 손길을 쉽게 내칠 수 없었다. 그러곤 강 작가와 윤시윤의 대화는 팔봉 선생과 탁구와의 대화로 거듭났다. 작가가 윤시윤에게 “네가 너 자신을 좀 더 믿어줘라” “네가 너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고 한 말이 팔봉 선생의 대사가 된 것이다.
“언젠가 팔봉 선생님이 ‘어차피 인생은 들판의 꽃과 같아서 지고 나면 있던 자리도 알지 못하거늘 그래도 내 인생 끝자락에 너를 만나 참으로 즐거웠구나, 탁구야’라는 대사를 하는데 그 말은 정말 제가 시윤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그 친구를 만나고 나서 열정을 회복했다고 해야 할까. 청춘으로 돌아갔다고 해야 할까. 원래 제가 대본 이렇게까지 쓰지 않는데 우리 젊은 배우들이 못하는 건 내가 커버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썼거든요.”
물론 강 작가가 배우에게 모든 걸 지원하진 않았다. 현장 스태프들도 팔봉제빵점 제빵사들처럼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드라마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응원이 하나 둘 모여 드라마가 성공했다고 믿는 작가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된 것 또한 “시청자들이 탁구를 응원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응원하면 그 사람을 자꾸 보게 되거든요. 이 착한 아이가 착한 마음 변치 않고 험난한 세상을 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모아졌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작가가 착하게 살아가는 탁구의 삶에 응원을 보내는 이유는 뭘까.
“언젠가부터 착하다는 말이 바보 같다는 말과 같아졌잖아요. 그런데 저는 사람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해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진리가 유치하긴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게 진짜 사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탁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제야 작가가 기자와의 약속을 지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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