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창천동 언덕길에 들어선 넓은 부지의 3층 전원주택. 색연필로 그려놓은 듯 아기자기하면서도 웅장함을 동시에 갖춘 이 집의 안주인은 바로 탤런트 김나운(40)이다. 그가 이곳으로 이사 온 건 지난해 봄. 전원 생활을 꿈꾸던 중 마침 지인의 소개로 이 집을 장기 임대했다. 갈색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몇 발자국 안 가 바로 현관문이 나온다. 그 옆으로 넓은 정원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실내는 지상 1층에 지하 2층 구조로 보이지만 집이 비탈길에 세워져 있어 지하처럼 보이는 공간도 지하가 아니다. 1층부터 3층까지 햇살이 한가득 들어온다. 김나운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공간은 넓은 정원. 그중에서도 고추·가지·호박·방울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텃밭이다. MBC 아침드라마 ‘주홍글씨’ 촬영으로 바쁘지만 텃밭 가꾸기만큼은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남편 조수영씨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남편이 애지중지 아끼던 늙은 호박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강아지가 그걸 입으로 따서 공처럼 갖고 놀더라고요(웃음). 남편은 거의 울상이 됐죠. 비록 작은 텃밭이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인생을 배우는 것 같아요. 하루하루 자라나는 식물을 보면서 자연의 순리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처음 이사 와서는 몰랐는데 어느 날 보니 마당 한편에 매실나무가 있더라고요. 지난여름에는 매실을 돌려깎기로 씨를 다 빼낸 뒤 장아찌를 한가득 담았는데 짜지 않고 새콤달콤한 게 맛있어요(웃음).”
텃밭에는 호박·가지·방울토마토 등을 키우고 있다.
매실 장아찌, 복분자 엑기스 담가 먹는 베테랑 주부
집에서 직접 담근 거라며 내온 복분자 엑기스도 시중에서 파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깔끔한 맛이었다. 솜씨 좋은 주부들도 엄두 내기 쉽지 않은 발효음식을, 그것도 결혼 전에는 살림에 ‘살’자도 몰랐다는 그가 겁 없이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그의 실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방송계 ‘똑순이’로 정평 나 있는 그는 살림에 있어서도 ‘대충’은 없는 듯하다. 한번 손님을 초대할라치면 메뉴 선정은 물론이고, 식탁 데코레이션에 돌아가는 길 손님 손에 쥐여줄 선물까지 꼼꼼히 챙기느라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종종거린다고 한다. 피부가 예민한 손님을 배려해 순면으로 만든 누비 방석을 따로 주문했을 정도. 3층이나 되는 큰 집도 그 혼자 쓸고 닦으며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김나운은 “못된(?) 성격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해놓은 건 성에 차지 않는다”며 “성격이 이렇다 보니 몸이 힘들다”고 넋두리했다.
음식도 몸에 해로운 건 식탁에 일절 올리지 않는다는 게 그의 원칙이다. 친한 후배 연기자 이훈은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누나는 성격이 까다로워 누나가 만든 음식은 뭐든 믿고 먹을 수 있다”며 농담을 던진다고 한다.
“결혼 전에는 백화점 놀러다니는 게 유일한 낙이었어요. 세일 기간에 백화점을 못 가면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줄 알았죠(웃음). 그런데 결혼을 하니까 180도 달라지더라고요. 이젠 내 살림이잖아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그러다 보니 처녀 때 아파트 복도와 방 안까지 즐비하게 늘어놓았던 구두보다 예쁜 그릇, 인테리어 소품들이 눈에 들어와요. 살림도 하면 할수록 느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밥도 어떻게 하는 지 몰랐어요. 오죽하면 결혼을 얼마 앞두고 ‘스펀지’에 나갔는데 ‘밥이 몇 분 만에 되는 거예요?’하고 물었다가 (이)휘재씨가 손사래를 치며 ‘이 결혼은 무효’라고 말해 녹화장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죠. 예전에는 살림을 안 해서 몰랐는데, 제가 살림에 영 재주가 없는 건 아니었더라고요(웃음).”
어느덧 5년 차 주부인 김나운은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을 자본 삼아 최근 브랜드 ‘김나운의 The kitchen’을 론칭, 1차적으로 생면 사업을 시작했다. 연잎 성분이 함유된 국수면발과 멸치·새우·다시마 등 각종 해산물이 들어 있는 육수거리를 따로 포장한 ‘연잎생면’을 출시한 것. 제품개발에만 2년 가까이 공을 들였다고 한다. 제품이 완성될 듯할 때마다 그가 반론을 제기하는 통에 함께 일하는 직원들은 속 끓인 날이 많았다고. 공장은 물 좋고 공기 맑은 강원도 평창에 있으며, 먼 거리지만 그가 수시로 공장에 들러 국수 뽑는 장면을 지켜본다고 한다.
“요리가 쉬우면서도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고 싶었어요. 사실 그동안 홈쇼핑에 자주 출연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사업 제의를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마음에 확 와 닿는 게 없더라고요. 그러던 중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구수한 맛의 멸치국수는 누구나 좋아할 거란 생각이 들어 사업까지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일이 커지네요(웃음).”
심한 변덕, 깐깐한 성격 다 받아주는 고마운 남편
사업을 준비하면서 남편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김나운은 남편을 “천성이 다정다감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집 안일도 잘 도와준다는 남편은 이날도 취재진의 방문시간에 맞춰 수제햄버거를 완성하느라 주방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넉넉한 풍채에서 더욱 인간미가 느껴졌다.
“결혼하고 20kg이나 불었어요. 저도 살이 많이 쪘고요. 얼마 전 박원숙 선생님이 ‘나운아, 드디어 좋은 소식 있구나?’하고 물었을 정도죠(웃음). 결혼하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김나운은 남편의 가장 큰 장점으로 “언제나 늘 같다는 점”을 꼽았다. 그가 아무리 짜증을 내고 말도 안 되는 일로 투정을 부려도 늘 그를 감싸준다는 것. 결혼 전 어른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남편의 모습도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병석에 누워계신 외할아버지의 용변을 다 받아냈을 만큼 효심이 깊다고. 이들 부부는 이번에 이사를 하기 전까지 시외할머니를 모시고 살기도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할머니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채 안 걸린다.
“결혼하기 얼마 전에 시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평생 두 분이 함께 사셨는데, 할머니 혼자 쓸쓸하게 지내실 걸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지 않더라고요. 제가 먼저 할머니 집에 들어가서 살겠다고 했더니 시어머니가 저를 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셨어요(웃음). 딸인 당신을 두고 외손주며느리인 제가 모시겠다고 하니 의아해할 수밖에요. 그러다 지난해 할머니가 분가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어요. 그러면서 ‘나 때문에 너희한테 아기가 안 생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는 말씀을 처음으로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듣고 죄송한 마음에 많이 울었어요.”
부부에게 아기는 여전히 간절히 바라는 귀한 선물이다. 한때는 누군가 아기 얘기를 물어오면 마음의 상처를 받곤 했는데 이제는 조바심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의학의 힘을 빌리려 한 적도 있으나 예민한 그의 체질이 문제였다고 한다. 김나운은 “병원에서 호르몬 반응이 이렇게 큰 경우는 드물다 했다”며 웃어넘겼다.
“아직은 자연임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변해 시술받으러 병원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뜻하지 않게 아기가 생겼다며 울상을 짓는 여자들을 보면 참 안타까워요. 후배들 중에도 그런 친구가 있어서 혼쭐을 냈어요. ‘배 속에 아기가 다 듣고 있는데 그런 말 하면 못쓴다고,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사람도 있다’고 하면서요. 지난번 ‘엄마가 뿔났다’ 할 때는 김수현 선생님께서 ‘촬영 중 임신해도 얼마든지 좋다’고 하셨는데, 이번에도 담당 PD가 ‘아이가 생기면 어떻게든 상대남을 만들어 볼 테니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주위에 마음 써주시는 분들이 많아 늘 감사해요.”
‘살림꾼’김나운은 냉장고 안도 밀폐용기로 깔끔하게 정리해뒀다.
그가 아이를 간절히 원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남편은 그에게 어떤 부담감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가 속상해할 때면 “아이 없이 우리 둘이 재미있게 살아도 좋을 것 같다”며 그를 위로한다고. 얼마 전 김나운이 입양 관련 프로그램을 보면서 남편에게 슬쩍 입양에 대한 의사를 물어봤는데, 그 또한 “당신이 원하면 상관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대신 이들에게는 귀여운 불독 세 마리와 마르티즈가 있다. 덩치가 큰 불독은 집 맨 아래층 베란다에서 생활하는데, 베란다와 연결된 침실에서 부부가 잠을 잘 정도로 불독을 자식처럼 끔찍이 여기고 있다. 그중 한 마리는 현재 내셔널챔피온으로 일본에서도 장가보내달라 요청할 정도로 ‘유명인사’라고 한다. 심각한 피부병으로 버려졌던 유기견 마르티즈는 하루 종일 김나운 뒤꽁무니를 쫓아다닌다고. 그는 “사람 말귀를 다 알아듣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하다”며 강아지들이 예뻐 어쩔 줄 몰라했다.
그가 ‘엄마가 뿔났다’ 이후 2년 가까이 연기 활동을 중단한 데는 남모르는 사연이 있다. 지난해 3월 갑자기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마음 한쪽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던 그였기에 갑작스런 부고는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얘기를 꺼내자마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그는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하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요즘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경상도 남해가 고향인 아버지는 극히 가부장적인 분이었다고 한다. 김나운은 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결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컸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한 줌 재로 변한 아버지의 유골을 받아들었을 때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후회와 인생의 덧없음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가슴에 원망으로 가득했던 아버지와 지난해 영원한 작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양로원에 계셨는데 남편이 저 대신 자식 노릇을 많이 했어요. 저와 같이 아버지를 모시고 일본에도 다녀왔는데, 여행에서 돌아와 바로 다음 날 갑작스레 돌아가셨어요. 마침 그날 아침, 제가 출연한 아침방송을 보시고는 바로 자리에 누우셨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돌아가시기 전 남편한테 유언을 남기시길, 제가 나이도 많고 하니 빨리 병원에 다니면서 아기 만들 준비를 하라는 거였대요.”
김나운은 당분간 연기와 사업을 병행할 테지만 둘 중 우선순위를 정하라면 연기가 먼저라고 말했다. 직업인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연기야말로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란 점에서 평생 놓치기 싫은 일이라고 한다.
“결혼생활이 아무리 행복해도 가끔은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조용히 빗소리를 듣고 싶을 때요. 그럴 때 저의 유일한 탈출구는 연기인 것 같아요. 가장 잘할 수 있고, 잘하고 싶은 분야가 연기인 만큼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
꾸밈없는 소탈한 연기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김나운. 그는 자신의 인생 또한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열매처럼 소박하길 바란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