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난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에 사람들이 병원에서 돈을 주고 아이를 만들었다면 어떨까? 예를 들면 내 친구 잔느는 말이야 부모가 아이의 외모엔 돈을 많이 썼는데 성격에는 돈을 좀 아낀 게 아닐까? 나를 병원에서 만들었다면 돈을 좀 많이 들였을 것 같아.”
“거 참 흥미로운 상상이다. 잘 자. 비싼 아이!”
프랑스 파리에 거주한 지 올해로 15년 된 주부 이화열씨(45). 자기 속으로 낳았지만 중학생 딸의 엄청난 자신감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는 재경부 애널리스트인 파리지앵 남편과 함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딸 단비(13), 사물 작동원리를 관찰하기 좋아하는 아들 현비(8)를 키우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성균관대 의상디자인학과를 졸업한 이화열씨는 91년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중 정치광고회사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했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 정치광고 디자인을 그만둔 그는 혈혈단신 파리로 건너갔다. 프랑스어를 배우다가 국립타이포그라피아틀리에(ANCT) 국가연수생으로 뽑혀 수학하던 중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그곳에 정착했다.
“프랑스어가 모국어이고, 한국어가 엄마 나라의 말인 꼬마 파리지앵 둘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죠. 아이들이 ‘마망! 주템므’라고 말해주기보다는 서툰 한국어로 ‘엄마, 사양해’라고 말해주는 게 더 듣기 좋아요. 결혼 전에는 자유만 갈구하던 불완전한 어른이었는데 아이들을 키우며 한층 더 성숙해진 것 같아요.”
그는 아이들 덕택에 잊고 있던 유년을 다시 살게 됐고, 인생과 존재에 대한 인식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은 어른을 위한 인생의 마술학교와 같다고. 프랑스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라고 생각하는데 그 덕에 그는 “아이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이 더 많다”고 말한다.
독신 꿈꾸던 남자에게 덜컥 청혼한 한국 여자
이화열씨는 20대 후반,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고 그곳에 뿌리내리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살았다. 그는 늘 낳아준 부모는 바꿀 수 없겠지만 태어난 곳에서 벗어나 다른 인생 살기를 동경했다. 결혼을 하라는 압박이 들어오던 스물아홉에 나름대로 인정받는 경력을 버리고 플랜B를 실행하기 위해 파리행 티켓을 샀다.
“쉬운 일은 아니었죠.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버릴 카드를 확실히 알고 있었달까요? 그렇게 떠났는데 다행히 적응을 잘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적응력 하나는 타고난 것 같아요(웃음).”
프랑스어를 서너 달 배운 뒤 그는 겁 없이 국립타이포그라피아틀리에에 원서를 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운 좋게” 합격할 수 있었다. 프랑스어 실력은 더듬거리는 수준이었지만 수업을 따라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프랑스의 컬러그라피 거장인 알레르 보통을 만나 수학했고, 유명 컬러디자이너 장 필립 렁클로와 작업할 기회도 주어졌다.
한국에서 꿈꾸던 것 이상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같이 공부하던 친구의 소개로 남편 올라비에 르그랑씨를 만났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프랑스 사람이 아시아 작가를 안다는 게 의외였거든요. 이야기가 잘 통하는 느낌이었죠. 남편의 초대를 받아 처음으로 파리지앵의 아파트를 구경하러 갔어요. 특이하게도 세네갈 요리를 해주더라고요(웃음).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제 스카프를 놓고 왔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어요. 이후로 그 스카프를 되찾으려고 다시 만났는데 결국 아직까지 헤어지지 못하고 있네요.”
그때까지 남편은 ‘가능하면 적게 일하고, 가능하면 멀리 여행하고, 가능하면 후회 없이 연애하고 살자’는 신조를 갖고 평생 독신으로 살길 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화열씨의 청혼으로 계획은 변경됐다.
남편에게 어떻게 결혼을 결심했냐고 물어보면 항상 “그건 말이지, 정말 미스터리한 풍선껌 같은 이야기지!”라는 말을 한다고. 누군가 결혼에 앞서 상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때면 그의 남편은 “그럴 거면 때려치우라고 해. 사랑과 결혼은 고민이나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거야” 라며 감정에 충실할 것을 조언하는 쪽이라고 한다.
과년한 딸의 결혼을 걱정하던 이화열씨의 부모는 딸의 국제결혼을 선뜻 허락했다. 남편의 부모에게는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 사회에서는 성인이 된 자식의 결혼을 부모가 ‘허락’한다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만약 다민족 다문화 국가에서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식의 결혼을 반대했다면 ‘인종차별주의자’로 취급받았을 거예요.”
프랑스식 교육법? 아이를 독립적 존재로 대하는 것!
신혼생활을 즐기고 싶었지만 의도치 않게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다. 남편에게 말하자 진지하게 “아이에 대한 결정권은 너에게 있어”라는 말을 했다.
“남편은 아이에 대한 책임감을 버겁게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전 ‘생명을 지울 수 없으니 선택은 하나야’라고 말했죠. 며칠 지나지 않아 남편은 서재에서 책 한권을 꺼내줬어요. ‘생명과 육아’란 책이었는데 펼쳤더니 줄쳐 읽은 흔적이 있더라고요. 남편도 말은 안 했지만 두려우면서도 설 나봐요.”
단비를 낳으러 분만실에 들어갔을 때 의사가 무통분만 주사를 그의 등에 놓자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고 한다. 의사가 “르그랑씨, 정말 분만에 참관할 수 있겠어요? 밖에서 물 한잔 마시고 오세요”라고 말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고. 이후로도 남편은 그의 손을 잡고 힘내라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남편이 너무 시끄러워서 ‘잠깐 입 좀 다물어줘. 집중이 안 돼’라고 말하고 단비를 낳았던 기억이 나요(웃음). 이곳에서도 남편이 탯줄을 자를 수 있도록 하는데 남편도 저도 원하지 않아서 의사의 손에 맡겼어요. 단비라는 이름은 아이가 우리 부부의 인생에서 단비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붙여줬죠. 프랑스 이름은 각각 에믈린·오헬리앙인데 전 그냥 집에서 단비·현비라고 불러요.”
자녀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프랑스에서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이화열씨는 프랑스식 교육법이라는 것은 딱히 없지만 모두 아이를 독립적인 존재로 대하며 예의 바르게 키우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그 역시 아이에게 숨어 있는 인격을 발견해 바른 방향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열중하고 있다.
“여기서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부모가 아이의 삶과 자신들의 삶을 분리시키려 의도적으로 노력해요. 아무도 어떤 교육방식을 갖고 자식을 길들이려 하지 않죠. 또 독립적으로 대하는 것과 버릇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명확해서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는 호되게 야단을 쳐요. 올바른 사랑을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절대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는 대개 아이들이 유치원 때부터 사설 교육시설에 맡겨지지만 프랑스에서는 국공립 교육시설이 잘돼 있어 대부분 그곳을 이용한다. 이화열씨도 파리시에서 지원하는 음악·무용·연극을 가르치는 음악원인 콩세르바투아르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다. 이곳은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배울 수 있고,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교육방식으로 아이들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현비는 이곳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단비는 승마를 좋아해 다른 곳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둘 다 하고 싶은 분야를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책임감을 갖고 임한다고.
하루는 승마대회가 있는 줄 모르고 이사 간 친구네 집에 잠옷파티를 가기로 한 단비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친구를 너무도 보고 싶어 하던 터라 이씨는 “승마 대회에 한번쯤 빠져도 엄마 아빠는 뭐라고 하지 않아”라고 말했는데 단비는 문제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단비는 ‘승마대회에 나가고 싶은 건 나라고!’하더니 결국 참여했어요. 자신의 일을 결정하는 건 아이 자신이라는 걸 남편도, 아이도 분명히 알고 있었죠. 이게 한국과 프랑스 사고의, 교육방식의 차이인 것 같아요.”
부모가 자식의 인생에 꿈이나 기대 걸지 않아
프랑스는 두 달의 여름 바캉스, 크리스마스 바캉스 2주, 부활절 방학 2주 등 쉬는 날이 많다. 대부분 이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알차게 보내려고 한다. 이씨는 주로 시부모가 있는 부르고뉴 시골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다. 아이들은 도시보다 시골을 좋아해 올챙이와 도롱뇽을 손바닥에 놓고 만지작거리고, 정원에서 꽃을 가꾸는 등 신나게 지낸다고.
“여기 사람들은 짧기만 한 인생을 절대 직장과 학교에서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세 살배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인생을 말하죠. 행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 기를 쓰고 경쟁하지도 않고 남보다 빨리 뭔가 이루려고 조급해하지도 않아요. 하루는 현비와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제가 뒤 페이지를 넘겨보려고 했더니 ‘엄마! 예습은 반칙이야’라고 말하더라고요(웃음). 모두가 ‘학교는 배우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리 학습해가거나 하지 않아요.”
그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이 다른 아이보다 뒤처지는 것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들 현비의 시험지에 사인을 하다가 쉬운 문제를 틀린 것을 보고 이씨가 “이렇게 쉬운 걸 틀렸어?”라고 하자 아이는 “엄마, 알아? 틀리면서도 배우는 거야”라며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남편 역시 느리게 가더라도 스스로 알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루는 그가 남편에게 아이 수학 숙제를 봐달라고 하자 공식을 설명하기보다 원리를 깨치게 해야 한다며 몇 시간이고 질문만 하더라고. 빨리 배우고 익히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한국식 교육법에 익숙해져 있던 그에게는 답답한 일이지만 이제는 왜 그러는지 알 것 같다고 한다.
“남편은 빵을 만드는 기술자가 되더라도 아이 자신이 행복한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해요. 부모가 자식의 인생에 자신의 꿈이나 기대를 걸지 않는 거죠. 아이들도 남과 비교하기보다 자신의 목표치와 노력한 결과를 비교해요. 현비의 꿈은 건축가인데 수학시간에 자로 도형을 그리는 시험을 잘못 보고 나서 혼자 ‘건축가가 되려면 도형을 꼼꼼하게 그려야 하는데 어쩌지?’라고 중얼거리더라고요(웃음).”
이화열씨는 파리에서의 소소한 일상과 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감정들을 모아 최근 책 ‘마망 너무 사양해’를 냈다. 그는 이 책이 교육에 관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프랑스 교육환경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책은 더더욱 아니라고 한다.
“아이를 키우며 제가 더 많이 배웠어요.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알고 솔직한 저 자신과 대면하게 됐죠. 한국의 독자들도 책을 보고 가족의 사랑과 대화가 그 어떤 교육보다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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