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따가워진 햇살로 이마에 땀이 맺히던 5월 한낮, 김경란 아나운서(32)가 시원하게 웃음 지으며 카페로 들어왔다. 그는 경쾌한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봄 개편 이후 5개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만 피곤한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6개월째 새벽 4시에 잠들었다가 오전 10시쯤 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뱀파이어 같은 생활을 한 지 꽤 돼서 이젠 익숙해졌어요(웃음). 오후 2시는 제게 굉장히 맑고, 활기 넘치는 시간이에요.”
올 초 그는 아나운서로서 큰 변화를 겪었다. 2007년부터 진행하던 KBS ‘뉴스9’ 앵커에서 물러난 것. 아나운서라면 한번쯤 꿈꿔봄직한 9시 뉴스 앵커를 그만둘 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는 “말 그대로 시원섭섭했다”고 말했다.
“저보다 앞서 9시 뉴스를 진행한 정세진 선배가 떠나면서 ‘좋은 점도 많지만 힘들고, 고독할 것’이라고 조언해줬어요. 그때는 와닿지 않았는데 1년, 2년 하다 보니 선배의 말을 이해하게 됐어요. 많은 사람이 주시하는 사안을 전한다는 점에서 보람도 있지만, 표정 하나하나에도 피드백이 오는 등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았죠. 사생활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요. 그런 짐을 벗어서 홀가분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잘할 수 있겠다’ 싶을 때 그만두게 돼 아쉬웠죠.”
지난 일을 후회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그는 결과적으로 2년 동안 최선을 다한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개편을 맞아 ‘스펀지’ ‘사랑의 리퀘스트’ ‘클래식 산책’ 등 다양한 성격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것에도 감사한다고.
막연히 방송 동경하던 아이에서 아나운서가 되기까지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방송을 좋아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방송반 활동을 하면서 등굣길 라디오 방송을 만드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고.
“대본을 쓰고, 음악을 선곡해 하나의 방송을 만드는 작업이 신났어요. 그때는 PD든 아나운서든 방송 관련 일이면 무조건 좋아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에 전념하느라 방송반 활동을 못했죠.”
공부를 하면서 점차 방송의 꿈은 잊혀갔고 진로를 결정할 때가 다가왔다. 국문과에 가면 문학·예술 등 다양한 장르를 심도 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이화여대 인문학부에 원서를 넣었고 무난히 합격했다. 학교생활에만 충실한 모범 학생이었을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나름대로 즐거운 대학생활을 보냈다”고 말했다.
“매주 화요일에 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위해 봉사를 했어요. 어렵거나 불편한 점을 덜어드리려 애썼죠. 끝나면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주말에는 광화문·경복궁 등을 돌아다니며 놀았죠. 4년을 그렇게 보냈는데 돌아보면 그 시간을 충분히 잘 즐긴 것 같아 만족스러워요.”
졸업을 앞둔 4학년 1학기, 접어두었던 방송의 꿈을 다시 떠올린 그는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아 자신이 없던 그는 경험을 쌓고자 부산 MBC 아나운서 공채에 무작정 원서를 냈다.
“어쩜 그렇게 당찰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남들은 현직 방송인처럼 차려입고 화장에 머리까지 철저히 준비를 한 뒤 시험장에 들어가는데 전 특별한 준비 없이 바지정장을 입고 들어갔어요(웃음).
IMF 금융위기가 진정된 후 오랜만에 진행된 공채 시험이라 1천 명 정도 지원했던 기억이 나요. 다들 현직 아나운서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잘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운이 좋았던지 1차·2차를 차례로 통과하더니 덜컥 최종합격을 했어요.”
전혀 합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그는 미리 신청해놓았던 여름 계절학기 수업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부산으로 향했다. 1년 동안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생활이 힘들었지만 경험을 쌓을 수 있어 마냥 행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지는 바람에 2000년 여름,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돌아왔을 때 한마디로 ‘백수’였어요. 아침에 눈뜨자마자 학교 도서관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공부를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는데 그래야 마음이 편해졌죠. 늘 앉던 자리 맞은편에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누가 오래 앉아 있나 은근히 신경전을 펼칠 정도였어요. 그때 절 봤다는 회사 후배가 ‘사시준비생인 줄 알았다’고 말해 한참 웃었어요(웃음).”
입사 후 그가 처음 맡은 방송은 ‘쇼 파워비디오’라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예능에 어울리는 이미지라는 PD들의 평가 덕분이었다고 한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사람이 좋아서였어요. 좋은 사람들과 만나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감동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었죠. 그런 의미에서 전 복이 많았어요. 입사 전에 ‘좋은나라 운동본부’ 같은 프로그램을 꼭 진행하고 싶었는데 하게 됐죠. 사람과 사람 사이 연결고리가 돼서 희망과 위로를 준다는 점이 좋더라고요.”
그는 입사 이후 동기들보다 예능 프로그램 진행을 많이 맡았다. 더불어 뉴스 프로그램도 꾸준히 진행해 상반된 장르를 모두 소화하는 전천후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 “어디서도 김경란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진행자는 프로그램을 빛나게 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김경란이 하나의 프로그램에서 색깔을 드러내면 다른 곳에서 진행할 때 그 이미지가 연관돼서 떠오를 거예요. 전 ‘스펀지’를 진행할 때도, ‘시사 360’을 진행할 때도 튀려고 하지 않아요. 프로그램이 잘되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죠.”
그는 입사 후 몇몇 아나운서가 이름을 알린 뒤 방송사를 떠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경우를 곁에서 지켜봤다. 그들을 보며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냐고 묻자 “한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사실 프리랜서 제의가 들어온 적도 있어요. 하지만 반갑기보다는 ‘나한테 왜?’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죠. 예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아나운서가 아니었으니까요. 회사를 나가면 정말 앞이 깜깜할 것 같아요(웃음).”
“결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 서두르지 않기로 했어요”
성실히 커리어를 쌓는 동안 나이는 어느덧 서른을 넘었다.
“올 초까지만 해도 ‘난 결혼할 때가 됐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어서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변을 보니까 여러 가지 상황이 다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결혼하면 싱글인 지금 이때를 그리워할 테니 즐겁게 보내자’는 생각으로 살아요.”
나이에서 오는 압박감은 있지만 집에서도 결혼을 재촉하지 않는 편이라고. 몇 번 소개팅에 나가기도 했는데 인위적인 만남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에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다리다 보면 좋은 인연이 나타날 것이라 믿는다고.
“이상형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에요. 솔직히 외모를 전혀 보지 않는다고 할 수 없지만 느낌이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마음이 따뜻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면 금상첨화겠죠(웃음).”
시간이 날 때면 그는 음악을 들으며 집 근처 한강 둔치를 즐겨 걷는다고 말했다. 또 책 욕심이 많아 집안 곳곳에 책을 놓아두고 틈틈이 읽는다고. 최근에는 김연수·김경욱 등 젊은 한국작가들의 소설에 매료됐다고 한다.
올해로 방송생활 9년 차가 된 그는 현재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 충실하면서 한편으로는 미래를 고민한다고 말했다.
“저도 제 미래가 궁금해요. 하고 싶은 공부도 있고, 어떤 일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도 있죠.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게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 뭐라고 말할 수 없네요. 사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지금 주어진 일부터 열심히 하자는 쪽으로 돌아서요(웃음).”
그는 몇 년 뒤 행복해지기를 꿈꾸기보다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 출근 전에 커피를 마시며 인터뷰를 하는 것도 행복하다고.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준비해야 하는 심야 생방송 프로그램을 위해 먼저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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