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니었-으-면 당신 결-혼 모-옷 했-어.”(남편)
“무슨 소리, 당신이야말로.”(아내)
결혼 13년째. 아직도 서로가 서로를 구제했다며 아옹다옹한다. 연애시절 에피소드를 묻자 부부는 약속한 듯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음보를 터뜨린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방 2개가 딸린 조그마한 자택에서 만난 송양미(43) 박종일씨(39) 부부. 뇌성마비 1급, 지적장애 2급 장애인 남편 박씨가 느릿느릿 말을 잇는다.
“내-가 이 사람 첫-눈에 보-고 좋아-했어요. 그-래서 쫓-아 다녔어요.”
두 사람은 96년 수원의 한 교회 청년부에서 만났다. 당시 송씨는 30세, 박씨는 26세. 청년부 내 유일한 장애인이었음에도 누구보다 밝고 씩씩한 박씨에게 송씨는 인간적 호감을 느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침을 흘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옆에서 누나처럼 보살폈다. 신발이 벗겨지거나 휠체어가 턱에 걸릴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를 도왔다. 홀어머니 아래서 20세가 될 때까지 학교 한 번 못 가고 방에 갇혀 산 박씨에게 그런 아내는 처음 만난 슈퍼우먼이자 마돈나였다.
“저는 가정경제를 책임지던 어머니 대신 여덟 살 때부터 동생들을 돌봤어요. 밥도 하고 청소도 해야 했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 챙기는 게 습관이 됐어요. 그래서 남편에게도 잘해준 건데, 남편은 저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하더군요(웃음).
남편은 그때도 자기는 정상인 아내를 맞을 거라고 큰소리쳤어요. 그런 당당한 모습이 멋있었어요. 건강한 사람처럼 살고 싶다며 횡단보도에서 좌판을 깔고 비누, 좀약 같은 것을 파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죠. 하지만 이 사람이랑 연애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집, 교회, 일터…. 송씨가 가는 곳 어디고 박씨가 나타났다. 반년 동안 매일같이 그림자처럼 “양-미 누-나”를 부르며 자잘한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당시 미용실 동료들은 박씨가 밤낮 실어나르는 떡볶이, 군밤, 과자, 우유 등에 간식 걱정이 없었다고. 박씨는 기어코 송씨를 ‘더 잘’ 따라다니기 위해 없는 살림을 쪼개 전동 휠체어까지 샀다.
꼭 맞잡은 부부의 손. 세월이 흐르며 사랑은 깊어졌고 손마디는 굵어졌다.
“제가 보고 싶다며 집과 미용실로 찾아와서 목발을 짚고 몇 시간씩 기다리곤 했어요. 미용실이 2층인데 바깥에서 하염없이 창문을 올려다봤죠. 그러다가 넘어지고, 머리가 깨져 피가 나고. 처음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런데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제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만 하라고 소리치고 윽박질러도 ‘누나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보고 싶어서 오는 거다’라며 막무가내였죠.”
“결혼 안 해주면 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으름장
그런데 이상했다. 그만 하라고 모질게 대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송씨는 미안함인지 안타까움인지 원인을 곰곰이 생각했다. 며칠 동안 생각해도 아리송했다. 동료 미용사에게 “장애인인 어린 동생이 따라다녀서 마음이 아프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좋아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고민해서 아픈 사람은 없다. 다시 마음을 들여다봐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사람을 멀리 해야지 마음먹고도 지금 시어머니 되신 분이 아프다고 알려오면 죽을 쒀서 달려가게 되더라고요. 남편이 겨울에 여름바지 입고 있는 걸 보면 골덴 바지를 사 입히게 되고. ‘세상에 이렇게 따뜻한 바지가 있느냐’라는 말에 안쓰러워 또 챙기게 되고. 혼자 낑낑대며 장사하는 게 마음 아파 노점에 찾아가서 거스름돈 주는 것도 돕고. 마음과 달리, 아니 어쩌면 마음도 원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토닥토닥하면서 계속 만나게 됐죠.”
언젠가는 박씨가 택시를 대절하고 집으로 찾아왔다. 제부도에 놀러가 바다를 보자는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물이 차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송씨는 이 사실을 몰랐고, 옛날 제부도에 산 적이 있는 박씨는 이 점을 노렸다. 화내는 아내에게 박씨는 “결혼 안 해주면 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송씨는 깜짝 놀라 엉겁결에 “결혼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소설이나 TV에서 보던 사건을 내가 겪는구나 하는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고 한다.
“근-데 수원-에 와-서는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웃음).”
96년 9월 추석. 박씨가 “우리집에 데려다달라”며 송씨의 손을 잡아끌었다. 홀어머니만 계시던 집에는 박씨의 누나 셋이 모여 있었다. 박씨는 이미 가족에게 소개할 작정으로 선전포고를 한 뒤였다. 워낙 적극적인 남편의 태도에 송씨도 용기가 생겼다. 하지만 양가의 반대는 걱정 이상이었다. 송씨의 어머니는 “이제 내 딸은 죽은 걸로 알겠다”며 울었고 박씨의 세 누나는 “왜 우리 동생이랑 결혼하려 하느냐”며 의심했다.
“미용일을 하느라 당시 속눈썹도 붙이고 머리도 노랗고 차림새가 화려했어요. 누님들이 계신 줄 모르고 일하던 차림 그대로 갔는데, 장애인인 동생과 결혼하겠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 행색도 마음에 안 드셨대요. 저희집에는 그냥 장애인이라고만 말씀드리고 인사를 하러 갔어요. 식구들은 그냥 몸만 살짝 불편하겠거니 했나봐요. 그런데 휠체어를 타고 말도 제대로 못하니 다들 충격을 받았죠.
그날 이후 어머니는 몇날며칠을 누워계셨어요. 친정어머니는 매 맞는 결혼생활을 하다가 제가 열아홉 살 때 이혼하셨어요. 2남2녀 중 둘째인 저는 스물넷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죠. 남편같이 듬직히 여기던 딸인데, 실망이 크셨나봐요. 그런 와중에도 저는 남편이 행여 상처받을까봐 걱정이었죠.”
97년 1월 치른 결혼식에 결국 처가 식구들은 오지 않았다. 송씨의 오빠는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갔다. 두 사람을 축복하러 온 같은 교회 지인만 가득했다. 결혼 이듬해 아이를 낳고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는 마음을 풀었지만, 지금도 집에 오시지 않고 부부가 찾아뵙는 것도 반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엄마는 인기가 그렇게 없었어? 장애인이랑 결혼하게?”
학교 문턱에 가본 적도 없는 박씨는 결혼 후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아이가 학교에 가게 되면 부모의 학력을 적어내야 하는데 아빠가 무학이면 창피할 것 같았다. 송씨가 설득해 남편은 초등학교 검정고시부터 준비했다. 가정교사를 불러 덧셈·뺄셈과 가나다라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졸린 눈을 비벼야 했지만, 그때까진 그나마 양호한 시간이었다. 3년 만에 시험을 통과한 뒤 수원북중학교에 입학하자 악몽 같은 나날이 시작됐다.
“아이 아버지는 학교에 가본 적이 없어서 계속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줄 몰랐대요. 등하교를 하고 3층 교실까지 기어 올라가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혼자서 화장실을 못 가 외출증을 끊어 학교 앞에 있던 미용실에 와서 볼일을 봤죠. 한창 개구쟁이 짓을 할 열네 살의 아이들은 ‘침 흘리는 바보’라며 돌을 던지며 괴롭혔고요.”
속상해하는 남편을 이해하면서도 “학교를 꼭 마쳐야 한다”며 독하게 등을 떠밀었다. 독립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옷 입는 것도, 휠체어에 오르는 것도 혼자 하도록 연습시켰다. 새벽 5시부터 3시간 동안 준비해서 매일 지각하길 6년. 박씨는 2006년 2월 수원 농생명과학고의 졸업장을 받았다.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인 사무엘군(12)은 엄마와 아빠를 꼭 반씩 닮았다. 엄마가 일을 나가면 아버지를 위해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것은 물론, 휠체어도 척척 빼올 만큼 속이 깊다고. “밝고 낙천적인 성격에 아빠를 잘 돕는 착한 아들”이라고 송씨가 자랑을 한다.
“아이에게 늘 장애인은 잘못이 아니라 불편할 뿐이라고 가르쳐요. 사무엘은 장애인과 통합교육을 하는 학교에 다녀요. 장애아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면서 장애인을 돕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 학교에 보냈죠. 열 살 때부터 아이가 아빠의 장애를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엄마는 인기가 그렇게 없었어? 장애인이랑 결혼하게?’라고 묻더군요. 이따금 특강을 하러 오는 의사·변호사 아빠들보다 자신의 아빠가 멋지지 않다는 걸 안 거죠. 그럴 때마다 ‘아빠는 열심히 사는 분이니 존경해라. 아빠 마음을 위로해줘야 한다’고 타일렀어요.”
송씨는 박씨를 “아이 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한 남편”이라고 표현했다. 일단 남편은 한번 고집을 부리면 웬만해선 꺾을 수가 없다. 예컨대 컴퓨터에 필요한 CD가 있으면 1~2주 동안 말 그대로 ‘노래를 부른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아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목욕하는 것.
“꼭 월말 돈 많이 나갈 때 뭘 사달라고 해요(웃음). 결혼생활을 하다 보니 서로 부딪힐 일도 있죠. 남편은 고집이 세고 저와 연락이 안 닿으면 굉장히 불안해했어요. 그런 점이 불만이었지만, 지금은 다 이 사람 개성이라고 생각해요. 남편은 왼쪽 뇌의 장애가 심해서 감정조절이 잘 안돼요. 화나지 않아도 화난 사람처럼 말해서, 아이도 아빠한테 그런 점은 고치면 좋겠다고 말하죠.”
송씨는 얼마 전 세계사이버대학에서 선교학과 사회복지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85년 고등학교를 마친 지 20여 년 만에 남편과 아이를 돌보느라 접어뒀던 학업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그는 내년쯤 가족과 함께 캄보디아로 가서 미용 봉사활동을 할 계획이다. 송씨는 인터넷 홈쇼핑으로 가정경제를 돕고 싶다는 남편을 위해 홈페이지 제작 공부도 병행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결혼할 사람은 한눈에 알아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동생처럼 잘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한편 가슴이 콩닥거렸거든요.”
송씨의 고백에 “나-는 지금-도 당-신 보-면 가슴 뛰-어”라고 답하는 남편. ‘천생연분’이라는 말은 이 부부를 위한 단어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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