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파트 독서실로 향했어요. 하루 2백자 원고지 10장으로 써야 할 분량도 정해뒀죠. 어머니에게 전화가 오면 ‘나 도서실이야’라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곤 냉큼 전화를 끊었어요. 결혼도, 직장생활도 하지 않고 혼자 그러고 있는 딸을 지켜보는 어머니 마음이 어땠을지(웃음).”
김설원씨(39)의 ‘실연한 여자의 동선’이 2천만원 고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41회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심사를 맡은 문학평론가 하응백씨, 작가 송은일씨는 농담반 진담반 “글을 보니 작가의 성품이 착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만난 김설원씨는 생각한 대로 선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김씨는 서른 되던 해 처음 소설을 썼다. 원래 읽고 쓰기를 즐겼지만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계기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불쑥 찾아왔다.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기분이 솟구치던 어느 날, 한 신문에서 신춘문예 당선자의 소감을 본 것이다.
“당선소감을 읽으면서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길로 대전에서 하던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죠. 원래 한번 마음먹으면 ‘지르는’ 스타일이거든요. 당시엔 뭔가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작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습작기를 거쳐 완성한 첫 작품으로 그는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중앙문단 등단 길은 멀고도 멀었다. 읽고 생각하고 쓰고 고치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열심히 달릴수록 등단은 멀어지는 듯했다. 2년, 또 2년…. 시간이 흐르면서 넘치던 패기와 배짱 대신 답답함과 초조함만 늘어갔다.
“금방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오만했어요. 다른 당선작을 읽으면서도 오점만 찾아내려 애썼거든요. 지금은 의도하지 않아도 칭찬할 만한 점을 먼저 찾는데 말이죠. 하지만 힘들어도 멈출 수 없었어요. 이미 소설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거죠.”
응모한 작품이 당선에 실패할 때마다 불을 끄고 가만히 침대에 누웠다. 깜깜한 어둠 속에 그렇게 있노라면 몸과 마음이 우울함에 밀려 침대 밑으로 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소설 그만 써야지’라고 다짐하면서도 소설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캐릭터는 어떨까, 어제 들은 이야기를 가공하면 어떨까.’ 절망이 찾아와도 소설을 생각하면 힘이 솟았다. 소설로 쓰러졌다 소설을 딛고 일어나길 반복하는, 진정 중독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슬럼프는 찾아왔다.
“이름난 작가는 아니지만 저는 스스로 소설 쓰기를 직업이라 생각했어요. 책을 사볼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경제적 활동을 제외하곤 오롯이 소설을 쓰기 위해 노력했죠. 불안정했지만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었기에 좋았어요. 그런데 30대 후반이 되자 나이에서 오는 중압감, 가족에 대한 미안함 등이 생기면서 힘들어지더군요. 30대 대부분을 소설가가 되겠다고 흘려보냈는데 내가 혹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때 장편에 도전하기로 결심했어요. 그간 갈고닦고 습득한 소설의 모든 것을 총정리하자는 마음이었죠.”
습작 기간 길어지면서 나이에서 오는 중압감, 가족에 대한 미안함 느껴
김씨는 그간 1년에 중편 1개, 단편 3개 정도를 써왔다. 길어야 3백 장의 작품을 쓰던 그로서는 1천 장이라는 장편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간 배운 소설의 모든 것을 끄집어낸다는 생각으로 작품에 열의를 쏟았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탄생한 첫 장편이 바로 ‘실연한 여자의 동선’.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응모하기 전 소설을 프린트해 펼쳐놓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 소설이 마치 스스로와 싸워온 지난 시간의 결정체 같았기 때문이다.
김씨의 당선작 ‘실연한 여자의 동선’은 소통과 사랑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주인공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자를 뽑는 시험을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어머니를 잃은 뒤 함께 살던 의부와도 떨어져 살게 되지만 주인공은 씩씩하다. 작품은 단절에 태연한 주인공을 내세워 오히려 단절의 절실함을 얘기한다.
“주제, 인물, 문체 모두 소설에서 중요하지만 전 특히 인물이 살아 있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염상섭 선생님의 소설을 보면 인물이 전부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그 인물을 보면 풍속 등 시대상을 고스란히 알 수 있지요. 시간이 흘러도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고민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지금 어딘가 상처받고 웅크린 인물을 끄집어내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고 싶어요. ‘실연한 여자의 동선’ 주인공 정수처럼요.”
여느 문인처럼 김씨도 문학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읽은 동화와 명작이 지금의 든든한 문학적 바탕이 됐다. 그는 또 지나가는 모든 사람과 사물에서 소설의 의미를 찾는다. 친구와 나눈 이야기, TV에서 본 장면, 탁자 위에 놓인 종이컵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금세 소설로 재구성할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얘기만 들으면 소설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씨가 문학을 가까이하게 된 배경과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응모하게 된 것 모두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가 교육열이 강하셨어요. 초등학교 2, 3학년 때인가 한 출판사 주최로 독후감 대회가 열렸는데, 어머니가 대신 독후감을 써 보내셨죠. 그 글로 상을 타게 됐고 그 회사 사장님까지 학교를 방문했어요. 시골 학교 아이가 어쩜 그렇게 글을 잘 쓰냐는 거죠. 그 뒤로 학교 문예부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모든 글짓기 행사에 제가 학교대표로 나서야 했어요. 글을 잘 써야만 하는 입장이라 그때부터 부지런히 읽고 쓰기 시작했죠. 이번 여성동아 공모도 작품이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아 응모할 생각을 못하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적극적으로 권유해서 도전하게 됐고요.”
김씨는 “등단을 목표로 걸어온 지난날은 벼랑 앞에 선 기분이었고, 지금은 거기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난 기분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오히려 더 불편하다고 한다. 어깨 위의 책임이 더 무거워졌으니 더 좋은 소설을 선보여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이번 당선은 제게 부담과 두려움과 희망을 동시에 준 인생의 중요한 페이지예요. 겨우 문학고시를 통과했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걸 잘 알아요.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는 시험을 끝으로 정해진 길을 가면 되지만 문학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저는 소설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품위 있는 향수라고 생각해요. 그 향수를 맡으며 혼자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저처럼 책을 나만의 향수라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누군가가 제 소설을 읽고 그런 느낌을 갖는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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