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회색 줄무늬 수트에 와인빛깔 블라우스, 하이힐을 신은 모습이 경쾌하고 화사하다. 인천 가천의과학대 집무실에서 만난 가천길재단의 이길여 회장(76). 한창때의 젊은이 같은 생동감, 환한 웃음이 곁에 있는 사람까지 활기차게 만든다.
먼저 집무실 밖의 탁 트인 공간에서 인터뷰 사진을 찍자는 제안을 했다. 사진 촬영 도중 캠퍼스 이곳저곳을 걷는 사이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운동이요? 전엔 매일 걷기를 했는데, 요즘엔 계단 오르듯 한 발씩 밟아 오르내리는 스테퍼(stepper)를 해요. 한 시간씩. 스테퍼가 운동량이 많아 좋더라고. 자리도 덜 차지하고.”
그는 하이힐을 신고 잘 걷는다. 사진기자가 요구하는 대로 포즈도 잘 취해준다. 웃으라고 주문하지 않아도 내내 웃고 있다. “활짝 웃어주셔서 좋아요” 하자, “기분이 아주 좋아서 그래요. 사진기자가 즐겁게 촬영하게 해주네요” 한다.
이 회장을 보고 간호복 차림의 꽃다발을 든 학생 여럿이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몰려든다. 그는 흔쾌히 응해준다. 옆에 있던 학교 관계자가 “좀 전에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한 간호학과 2학년생들”이라고 설명했다.
새로 지은 건물들이 많지만 널찍한 공간에 나무들이 곳곳에 자리해 캠퍼스는 차분하면서 편안한 분위기다. 작은 조롱박들이 지붕에 달린 오두막에서 포즈를 취한 이 회장은 둘러선 나무들을 정겹게 바라보았다.
“조그마할 때 양재동 화훼시장에서 사서 집에서 3~4년간 키워 이곳에 옮겨 심은 것들이죠.”
건강 비결은 매사에 좋게 생각하는 습관
가천의과학대 이사장실인 집무실에서 이 회장과 마주 앉았다. 가천길재단은 산하에 길병원과 가천의과학대, 경원대, 가천문화재단, 경인일보 등을 두고 있는데, 그는 경원대에서 총장으로 재직하고 다른 곳에서는 모두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야채 주스를 한 잔 마시고, 우유와 토마토 주스를 마시죠. 점심 저녁은 밖에서 먹는데, 가리는 거 없어요. 개하고 뱀만 빼고(웃음). 저 대식가예요. 지난번에 골프 치는데 혼자만 빵하고 두유를 먹으니까 같이 간 사람들이 젊은 사람 같이 먹는다고 하더라고.”
그는 최근 2년 반 만에 길병원에서 위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장기가 청년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활짝 웃는다. 아침 7시50분쯤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이 회장은 빽빽한 스케줄로 인해 밤 10~11시에 일을 끝내는 날이 적지 않다고 한다. 늘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는 그가 첫손에 꼽는 건강비결은 뭘까.
“매사에 좋게 생각하는 습관이죠. 왜 그런 얘기 있잖아요. 우산장수, 짚신장수 아들 둘을 둔 엄마가 날마다 걱정만 한다고. 비가 오면 짚신 안 팔릴까 걱정, 날이 개면 우산장사 망할까봐 걱정한다고요. 그런데 저는 정반대예요. 비가 오면 우산장수 아들 좋겠다고 하고, 맑으면 짚신장수 아들 좋겠다는 식이죠.”
이런 성격은 최근 그가 펴낸 자전 에세이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삶의 긍정적인 면에 시선을 고정시켜 열정을 쏟아붓고 꿈을 이룬 모습이 잔잔한 에피소드 속에 그려져 감동을 전한다. 특히 ‘깡촌 소녀 이길여’의 성장기와 ‘젊은 산부인과 의사 이길여’의 도전기 등은 마치 한편의 동화처럼 가슴 뭉클하게 아름답다.
1 2 미국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와 병원을 열고 한창 환자를 돌보던 젊은 시절의 이 회장.
3 이 회장이 ‘이길여 산부인과’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4 마흔이 넘은 나이에 떠난 일본 유학 당시 니혼대 연구실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한 이 회장(오른쪽).
5 ‘촌구석’에서 태어나 여자의 몸으로 서울대 의대에 당당히 합격했을 때의 모습(가운데).
6 이리여고 시절 친구와 함께한 이 회장(왼쪽).
7 군산도립병원 근무 당시 만난 퀘이커의료봉사단의 영국인 의사 골든은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행동으로 가르쳐줘 훗날 이 회장이 의사 생활을 하는 데 이정표가 됐다.
‘여자의 설움’ 맛본 어린 시절,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 되리라” 결심
전북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 이른바 ‘깡촌’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자의 설움’을 톡톡히 맛봤다. 첫딸에 이은 둘째는 꼭 아들이기를 바라던 집안 어른들은 그가 딸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실망했고, 그의 어머니는 ‘딸 낳은 죄인’이 됐다. 더욱이 자궁외임신으로 수술을 해 더 이상 아이를 못 낳게 되면서 시어머니에게 모질게 구박당하는 며느리가 됐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며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아서인지 그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 말문이 터지자 ‘마을에서 가장 말 잘하는 아이’로 통할 만큼 활달한 모습으로 변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그를 껴안고 ‘두고 봐. 이 아이를 어느 아들 못지않게 훌륭한 딸로 키우고 말 거야’라고 다짐, 또 다짐했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 그 또한 ‘내가 남자였으면…’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래, 딸이 아들보다 낫다는 걸 보여주고 말 테다.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돼 세상 남자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거야.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될 거야!’ 이를 악물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스스로 최면을 걸듯 되새겼다.
그는 악착같이 공부했다. 초등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1등을 하자 주위 사람 모두 눈을 비비며 놀라워했다. 줄곧 1등을 달렸다. 여자라고 해서 못하는 것도 없었다. 반장을 도맡았고 말 타기 대장도 했다. 여학교에 다닐 때도 그는 수석을 놓치지 않으며 공부에 매달렸다. 집집마다 호롱불을 쓰던 시절, 마을에서 전깃불이 들어오는 곳은 방앗간뿐이었다. 그는 저녁상을 물리기 무섭게 책 보따리를 들고 방앗간에 달려가 공부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 밖에 나와 서 있던 어머니가 “무섭지 않냐? 귀신 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하면 그는 “그까짓 게 뭐 무서워? 아까 공부한 거 큰 소리로 외우면서 오면 금세 오는데 뭘!” 모녀는 늘 똑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마주보고 웃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하시데요. 다른 아이 같으면 밤길이 무서워 돈을 줘도 가지 않았을 텐데, 어린 것이 공부하겠다고 방앗간까지 매일 오가는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했다고.”
천덕꾸러기 딸이 꿈을 이루도록 뒷바라지해준 어머니
그는 초등학생 시절 이미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소꿉친구가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그땐 아이가 죽으면 가마니에 말아 지게에 지고 가서 논두렁에 묻었죠. 지금은 나와 죽음이 얼마 멀지 않다고 느끼지만 고만할 땐 상상도 못할 일이잖아요? 어린 가슴에 충격을 받았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죠.”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급성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의사가 되겠다는 꿈은 확고부동한 목표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평소 감기 한번 걸리는 일 없이 건강하셨죠. 그런데 서른다섯밖에 안 된 젊은 아버지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며 몸져 누운 지 닷새 만에 돌아가셨어요. ‘일본에서 병이 났더라면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 시신 앞에서 목 놓아 울던 삼촌의 말이 오래도록 귀에 울렸죠.”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가세가 기울자 친할머니는 “길여의 학업을 그만두게 하자”고 나섰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전교 1등하는 아이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다”며 끝까지 막아섰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6·25가 터졌을 때도 그는 방공호에 들어가 촛불을 켜놓고 공부했고, 1951년 치열한 전쟁 와중에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당시엔 여자가 의대에 진학하는 게 오히려 흉이 됐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걱정 말고 공부하라’며 다독여주셨죠. 의대에 다닐 때는 편지에 늘 ‘엄마 사는 재미는 너 공부하는 거 보는 거다’라고 써보내주셨어요. 또 아직 괜찮으니까 편안하게 하숙하면서 공부하라고 돈을 보내주시고, 힘든 내색 한번 안 하셨죠.”
그는 대학 졸업 후 인천에 자성의원을 열었다. 환자들을 보느라 바쁜 와중에 여기저기서 맞선자리가 들어왔다. 딸에게 간섭하는 일 없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던 어머니가 그때부터는 틈만 나면 “선 봐서 결혼하라”며 성화였다. 하지만 “선 볼 시간 있으면 환자 한명 더 볼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던 그는 선진 의료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서른두 살 때였다. 처음에 유학을 만류하던 어머니는 섭섭한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딸에게 “내 걱정 하지 마라. 네가 훌륭한 의사가 돼 잘 살면 바랄 게 없으니 돌아오지 마라”는 말을 했다.
1 총장으로 있는 경원대 학생들과 함께한 이 회장.
2 백령도와 대청도 등 서해 섬지역 주민들의 진료를 담당한 백령길병원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3 이 회장은 해마다 가천의대 졸업생들의 목에 직접 청진기를 걸어준다.
4 길병원의 무의촌 무료 진료 모습. 그가 무의촌을 찾으면 평생 병원 한 번 가본 적 없고 의사 얼굴 처음 본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5 자유롭고 활기 넘쳤던 미국 유학시절. 당시 이 회장은 동료들과 함께 종종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6 지난 89년 길병원에서 인천의 첫 네 쌍둥이로 태어난 슬·설·솔·밀 자매와 함께.
7 이 회장은 백령길병원을 운영하면서 ‘심청효행상’을 제정해 전국 초중고 여학생 가운데 효성이 지극한 이들을 뽑아 시상했다.
“제가 떠난 날 어머니가 고향마을 나무 밑에서 주저앉아 홀로 우셨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들었어요. 주위 사람들에게 딸이 원하는 일이 있는데 내가 방해하면 되겠느냐고 하셨대요.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죠.”
그는 유학생활 5년 만에 어머니의 나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날 속시원하게 눈물보따리를 풀어놓은 그의 어머니는 평생을 딸 걱정, 딸 뒷바라지에 매달려 살았다.
“유학 후 밀려드는 환자들 돌보느라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잠도 편히 못 자는 저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으셨죠. 자리에 누우셨을 때도 어머니는 ‘나는 네가 있어 죽을 때가 돼도 이리 호강하는데 너는 어떻게 하냐. 누가 있어 훗날 널 거둘까’ 하며 제 걱정을 하셨어요. 평생 아낌없이 베풀기만 하고 가신 어머니는 지금도 제 인생 최고의 스승이죠.”
이 회장은 미국 뉴욕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Mary Immaculate Hospital)에서 인턴 과정을, 퀸스종합병원(Queen’s Hospital Center)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다. 그는 “뉴욕은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자란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안겨준 동시에 두꺼운 껍질을 벗게 해준 도시였다”고 회고한다. 뉴욕 생활 5년 간을 그는 ‘인생의 황금기’로 꼽는다. 선진 의료시스템과 의료기술을 배운 것은 물론 세상을 크고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는 것이다. 또한 “이때 무슨 일이든 거침없이 실행하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했다”고 덧붙인다.
유학시절 청혼 거절하고 귀국해 ‘환자들과 결혼’
이 회장은 처음으로 뉴욕에서의 짧은 로맨스도 공개했다. 퀸스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칠 무렵, 어느 날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한국 남자가 꽃을 들고 찾아왔다. 식료품점에서 그를 보고 점원에게 근무지를 물었다고 했다. 두 살 많은 교포 사업가였다. 그는 예쁜 원피스에 브로치를 다는 등 한껏 멋을 내고 차문을 열고 닫아주는 매너를 지닌 그 남자와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겼다고 한다. 주말엔 뉴욕 외곽의 공원으로 피크닉을 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나란히 누워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새벽 이슬을 맞을 때까지 춤도 췄다.
그 남자의 청혼을 거절한 날 그는 밤새 울었다고 한다. 이미 그는 귀국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제 머릿속엔 가난하고 못 배우고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수많은 환자들이 절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는 “내가 의사가 된 것과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게 된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단언한다. 때문에 “혼자 살아온 삶에 한 점의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고.
귀국 후 그는 처음 병원 문을 열었던 그 자리에 ‘이길여 산부인과’를 차렸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사가 거의 없을 때여서 소문이 퍼지자 병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여자라는 점도 환자를 몰리게 하는 데 한몫했다.
밤낮없이 밀려드는 환자를 보기 위해 그는 근 10년 동안 하루를 한 끼 식사로 때웠다. 병실이 부족할 때는 병원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방에도 환자를 들였다. 당시만 해도 병원비를 안 내고 도망가는 환자들 때문에 병원들은 반드시 보증금을 받아야 수술을 해주고 입원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보증금 없이도 수술을 해주었고 무료진료권을 나눠주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내성 있는 균이 드물어서 페니실린이나 마이신 주사만 놓아줘도 병이 낫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지만 의식주 해결이 안 될 때니 병원비가 없어 그냥 집에서 죽을 날 기다리는 경우도 허다했죠. 자궁외임신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 생명을 잃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는 ‘의사 얼굴을 하느님 보듯 하는’ 환자들을 한시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2층 수술실로 올라갈 때 그의 언니는 그 순간을 포착해 달걀노른자를 넣은 우유를 마시게 하려고 쫓아왔다. 하지만 우유 한 잔 먹을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좀 더 많은 환자를 보기 위해 진찰실에서 바퀴 달린 의자를 사용했다. 시간을 절약하려고 침대 3개를 놓고 의자를 밀면서 다녔는데, 방향이 조금 엇나가면 벽에 부딪히거나 침대 모서리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지만 순간순간이 행복했어요. 이제 다 나았다는 소리를 매일같이 수백명에게 듣는 게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겠어요.”
이길여 회장은 사업가로서 아무리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도 꼭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망설임없이 결정하는 ‘배포’를 보여 주위에서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이렇게 환자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그의 ‘젊은 날’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이 회장은 핑크빛 잠옷 얘기를 들려줬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사왔는데, 한 번도 입지 못했다고. 잠옷을 갖춰 입고 침대에서 제대로 잘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온 지 10년쯤 지나니 살이 쪄서 어깨 부분이 껴 그만 입을 수 없게 됐다고 한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인지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지금 봐도 예뻐요. 소매 없는 원피스에 가운을 걸치게 돼 있는데, 한동안 벽에 걸어놨다가 지금은 장롱에 넣어두었죠.”
이 회장은 ‘핑크빛’을 가장 좋아하는 색상으로 꼽는다.
병원일에만 파묻혀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지내던 그는 두 번째 도전을 감행했다. 마흔세 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는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따왔다. 특히 그는 일본에서 인생의 전기가 될 만한 세 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고, 귀국해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첫째 결심은 종합병원을 만들겠다는 것, 둘째는 의료 취약지역에 병원을 세우겠다는 것, 마지막으로 좋은 의사를 많이 기르기 위해 교육에 힘쓰겠다는 것이었다.
78년 먼저 그는 그간 모은 돈으로 대사업을 벌였다. 의료법인 길병원을 만들어 종합병원을 설립한 것. 민간으로서는 최초 의료법인으로, 개인 소유의 것을 사회에 내놓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병원이 완공되기까지 무수한 소문이 나돌았다. “이길여가 병원을 짓느라 부도를 냈다” “완전히 망했다”에서 “이길여가 빚에 몰려 자살했다”는 소문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정작 그는 실패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직 경인지역 최대 병원으로 길병원을 키우겠다는 의지밖에 없었다.
큰 ‘배포’로 사업 펼쳐 주위에서 혀 내두르게 만들어
이길여 회장의 병원 운영방식은 그야말로 저돌적이다. 병원을 확장해나갈 때 그는 매번 5년을 승부를 내는 기간으로 삼았다고 한다. 새로 일을 벌일 때 그는 5년짜리 부금을 들고 수지타산을 맞춰보아 적자를 감당해낼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곧바로 뛰어드는 방법을 취해왔다. 길병원(동인천) 설립을 시작으로 82년 양평 길병원, 87년 중앙 길병원, 88년 철원 길병원, 93년 남동 길병원 등을 차례로 열어 거대한 ‘의료왕국’을 이룩했다.
그는 아무리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도 꼭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망설임 없이 바로 결정하는 ‘배포’를 보여 주위에서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최근 6백40억원을 들여 뇌과학연구소를 건립하는가 하면 6백70억원을 투자한 암·당뇨연구원도 개원했다. 내년엔 22층 규모의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춘 암센터를 완공해 길병원이 ‘동북아 허브 병원’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든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한편 그는 ‘의료사업’이 ‘봉사’를 겸해야 한다는 뜻이 굳다. 적자를 감수할 생각으로 양평·철원 등 의료 취약지역의 병원을 인수했을 때는 직원들의 반대를 단호히 물리치기도 했다. 학비가 전액 무료인 가천의과학대를 설립할 때도 마찬가지.
“어릴 때 어머니께서 ‘다른 사람에게 덕을 베풀면 후대에 받는다’고 하셨죠. 걸인에게 좋은 옷을 주셔서 제가 불평을 하면 너희대에 다 잘살 거라고 하셨던 말씀이 안 잊혀요. 그래서 직원들에게 그랬죠. 좋은 일 하면 후대에 그대로 받는다는데 나는 자식이 없으니, 여러분의 자녀가 나중에 다 복받을 거 아니냐고요.”
이 회장에게 직원 5천여 명의 대한민국 대표 공익법인인 가천길재단을 이끌어온 리더십은 어떤 것인지 물었다. 그는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답한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헌신이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것. 자신의 성공비결로 첫손에 꼽는 게 ‘열정’이라고 밝히는 이 회장은 70여년간 살아온 인생에 대한 정의도 명쾌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살다 가는 것은 정말 복받은 거예요. 정자 몇십만 개의 경쟁을 뚫고 엄마 배 속에서부터 혜택을 받아 태어나는 것이거든. 큰 축복을 받았으니 꽃을 피우고 받은 것을 갚고 가야죠. 전 젊은 시절부터 인생이 짧은 거라 생각했어요. 너무나 짧은 인생길, 주어진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해 살아야지요.”
이 회장의 취미는 무얼까. 그는 얼마 전 글씨공부를 하려다 그만뒀다고 한다.
“글씨를 쓰려면 명상을 오래 해야 하는데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열심히 일하는 게 취미라고 할까. 일에 몰두하는 게 행복하고 즐거워요.”
가천의과학대 교정에서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하고 나오는 간호학과 학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이 회장.
그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잠에서 깨어나서도 할 일을 계획하고 떠올리면 의욕이 넘친다고 한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좋은 아이디어를 메모지에 적어놓기도 한다는 그는 “좋은 아이디어는 순간 왔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귤을 크기에 따라 뚝뚝 떨어뜨리는 컨베이어 벨트를 생각해보면 돼요. 줍지 않으면 떨어져 흘러가는 거죠. 그 시간, 그 순간에 줍지 않으면 계속 못 주워요.”
그는 막 일을 시작한 신입사원처럼 의욕에 넘치는 모습이다.
이 회장의 애창곡은 신나는 리듬의 ‘여행을 떠나요.’
“우리 학생들이 무대를 꾸밀 땐 언제나 그 음악을 틀어요(웃음).”
“아까 보니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고 하자 “내가 나타나면 특히 신명여고(94년 신명학원 인수) 학생들은 연예인 대하듯 열광한다”고 웃으며 답한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학교 관계자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 회장에게 좋은 기(氣)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가겠다고 하면서 그의 손을 잡으려는 쟁탈전도 치열하다고.
인터뷰를 마치며 기자도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도 좋은 기를 좀 받을게요.”
▼ 이길여 회장은…
1932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과 퀸스종합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쳤으며, 일본 니혼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후 이길여 산부인과를 개원했으며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실시하고 병원 보증금을 없애는 등의 노력으로 병원 문턱을 낮췄다. 78년 전 재산을 털어 의료법인을 설립했고 여러 전문 병원을 열었다.
현재 직원 5천여 명의 대한민국 대표 공익법인 가천길재단의 회장으로 의료와 교육·문화·언론을 아우르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길병원·경원대·가천의과학대·경인일보 등을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가천문화재단·가천박물관·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가천미추홀봉사단 등의 문화 및 봉사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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