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한 지 보름이 채 안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이루마(30)는 짧은 머리, 단정한 셔츠 차림에서 군 생활을 막 끝낸 사람 특유의 분위기를 풍겼다.
“제대 후 딸 분유 타주며 지냈어요(웃음). 영국으로 이민 갔던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와 강원도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계셔서 얼마 전에 아내와 딸을 데리고 3박4일간 다녀왔고요. 오랜만에 가족 모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얼마나 좋았는지 아직도 꿈같이 느껴져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이루마는 열한 살에 영국으로 유학, 런던대 킹스칼리지 작곡과를 졸업했다. 대학졸업 후 한국에서 연극무대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던 그는 2001년 발표한 ‘When the Love Falls’가 드라마 ‘겨울연가’의 최지우 테마곡으로 삽입되면서 이름을 알렸다.
“윤석호 PD가 제 음악을 우연히 듣고는 ‘참 괜찮다’고 생각하셨대요. 뒤돌아보면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피아니스트로서의 한계 느낄 무렵 작곡 재능 발견
이루마는 피아노를 배우던 누나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접하게 됐다고 한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유치원 갈래 피아노 배울래?’라고 물어보시기에 ‘피아노 배울래’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나요.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선생님 도움 없이 혼자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어요. 악보를 보고 치는 것보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자유롭게 치는 게 더 재미있었거든요. 그때부터 멜로디가 떠오르면 악보에 옮겨 적는 식으로 어설픈 작곡을 시작했죠(웃음).”
그는 열한 살 되던 해부터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침 큰누나가 영국에서 대입시험을 준비하고 있어 그곳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음악전문학교인 퍼셀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오디션을 봤다.
“피아노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떨어질 거라 생각했어요. 심사위원도 제 연주를 듣더니 별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도 그럴 것이 같이 시험을 치는 아이들은 유명 선생님에게 오랜 기간 배워 실력이 출중했거든요. 심사위원이 ‘다른 악기 다룰 줄 아는 건 없냐’고 묻기에 ‘없다’고 하자 ‘노래는 할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서 방송국 어린이합창단으로 활동할 때 배운 동요 ‘갈매기’를 불렀는데 의외로 합격했어요.”
그는 입학 후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웠지만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담당 선생님은 그의 피아노 실력보다 청음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실력이 뛰어난 친구들이 너무 많아 주눅이 들었어요. 악보를 제대로 외우지 못해 무대에 서는 게 두려웠고, 피아노를 치는 게 점점 재미없어졌죠. 결국 중학생 때 ‘피아니스트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피아니스트의 꿈을 안고 도착한 영국에서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다고 한다. 대신 그는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진짜 재능을 발견하게 됐다고.
“어느 날 여덟 살 때 썼던 악보를 꺼내서 혼자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걸 들은 후배가 ‘그 곡을 연주해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의 아버지가 영국에서 유명한 드라마 배경음악감독이었는데 그런 아이가 제 곡을 좋다고 말해줘 상당히 기뻤어요.”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를 시작했고, 열심히 준비한 덕택에 킹스칼리지 작곡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현대음악의 거장 해리슨 버트위슬에게 사사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제가 계속 공부 하길 원하셨지만 전 한국에 가서 경험을 쌓고 싶었어요. 부모님을 설득해 한국에서 연극 ‘태’ 음악감독으로 일을 시작했죠. 그때 배우로 출연했던 오만석·홍록기·성지루씨 같은 분들을 알게 됐어요. 다 좋은 분들이라 함께 작업하면서 무척 즐거웠어요.”
하지만 연극이 끝난 뒤 실직자 신세가 된 그는 몇 달간 전당포에 시계·CD플레이어·MD플레이어를 맡겨 생활비를 충당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 인터넷 음악 관련 벤처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망했다고. 그 후 우연히 뮤직비즈니스 동호회를 알게 돼 그곳에서 지금의 소속사 사장을 만났다고 한다.
“제가 작곡한 곡을 듣더니 사장님이 음반을 내자고 하시더라고요. 자신감 넘쳤던 전 하루 만에 녹음을 다 끝낼 수 있다고 했죠. 다음 날 들어보니 너무 형편없어서 깜짝 놀랐어요(웃음). 그럼에도 그대로 음반을 냈는데 지금 들어보면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묻어나 가장 애착이 가요.”
“신혼생활 함께하지 못해 미안한 아내에게 앞으로 잘할 생각이에요”
꾸준히 앨범을 내며 공연활동을 하던 이루마는 2006년 지인의 소개로 아내 손혜임(30)을 만났다. 이루마는 상대가 누구인 지 모르는 상태에서 “소개팅은 부담스러우니 같이 차나 하자”며 약속을 잡았다고 한다.
“처음 만나던 날 녹음을 끝내고 약속장소로 가는데 차가 밀려 한 시간이나 늦었어요. 도착했더니 아내는 화가 난 표정으로 새침하게 앉아 있더라고요. ‘잘되기는 틀렸구나’ 생각하며 조용히 차를 마셨죠. 그때까지도 아내가 미스코리아 출신에 손태영의 언니인 줄 전혀 몰랐어요. 첫인상은 차갑지만 키가 큰데다 참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좀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와인바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와인바 사장은 그날 이루마의 앨범만 반복해서 틀어줬다고. 말주변이 없는 그였지만 자신의 음악이 나오자 곡명과 작곡 시기, 곡에 담긴 뜻 등에 대해 쉴 새 없이 설명해줬다고 한다.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재미있어하는 아내의 모습에 반해 그때부터 연애를 시작하게 됐어요.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아내는 ‘처음에는 재미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 속으로 ‘그만 좀 하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내를 만나기 전 이미 영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군 입대를 준비했던 이루마는 연애를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예정대로 입대, 해군 군악대에 배치됐다. 그는 손혜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입대 전 미리 프러포즈를 했다.
“돈을 차곡차곡 모아 반지를 사고 장소를 물색하는 등 프러포즈 계획을 짰어요. 그런 뒤 어느 날 저녁 삼청동에 가 저녁식사를 한 뒤 좀 걷자며 삼청교회까지 갔죠. 교회 앞 벤치가 참 낭만적이더라고요(웃음). 그곳에 앉아 결혼해달라는 말을 꺼내려는데 너무 긴장됐어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결혼해줄래?’라고 물었는데 곧바로 아내가 ‘그래’ 하고 답해줘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두 사람은 이루마가 군복무를 하던 지난해 5월, 특별휴가를 얻어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대전으로 내려가 군복무를 마쳐야 했기 때문에 둘은 결혼을 한 뒤에도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 항상 그리웠고 늘 같이 있고 싶었어요. 제대 직전에 독도함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리허설을 하는데 당시 진행을 맡은 정지영씨가 갑자기 ‘지금 아내에게 한마디하시겠어요’라고 질문을 던져 당황했어요. 갑자기 멍해지면서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가벼울 것 같아 어떤 말도 못하겠더라고요. 그 질문은 공연 때 빼달라고 당부했어요. 제대하고 행동으로 보여줄 거라 다짐했거든요.”
군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아내에게 자주 면회 오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아내가 면회를 오면 보내기 싫어지는데다 한동안 그리움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 서로 전화로 통화하며 보고 싶다는 투정만 했을 뿐 얼굴을 본 시간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가 남자동료들과 회식이라도 한다고 하면 괜히 걱정되더라고. 그럴 때면 선임이 ‘여자친구가 잘못을 해도 군인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며 저를 다독여줬죠. 군대를 가는데도 불구하고 잡고 싶었던 제 욕심을 순순히 받아주고 이해해준 아내가 말할 수 없이 고마워요.”
얼마 전 권상우·손태영과 커플 데이트, 소박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
손혜임은 이루마가 군복무 중이던 지난 7월 딸을 낳았다. 아이를 낳을 때 군에 있던 그는 처형의 전화를 받자마자 휴가를 나와 아내 곁을 지켰다고 한다.
“그런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어요. 아기를 처음 보는 순간 ‘얘가 누군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눈·코·입이 저와 닮았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아이의 이름은 아내가 그의 한글 이름과 비슷하게 ‘이로운’이라 지었다고 한다. 군대에서 결혼과 출산을 경험한 이루마는 아내와 딸, 두 사람을 생각하며 만든 곡으로 앨범을 준비 중이다.
“이번 앨범에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돼 있어요. 딸에게 바치는 곡, 태교할 때 들으면 좋은 곡, 부모님이 어린 시절의 저를 볼 때 느낌을 상상하며 쓴 곡도 있죠. 주변에 김현철, 유희열씨가 이미 아이를 위한 곡을 썼는데 아이를 갖게 되면 작곡가들은 절로 곡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그의 가족은 딸을 얻은 데 이어 또 하나의 경사를 맞게 됐다. 처제 손태영이 9월 말 권상우와 결혼하는 것. 그는 군복무 중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얼마 전 처제 커플을 삼청동에서 만나 같이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동서가 소박하고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죠. 저희를 보며 ‘얼른 결혼해서 처형부부처럼 살고 싶다’고 말해 기분 좋았어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잘 살면 좋겠어요.”
그는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음악을 준비해주기로 했다. 직접 선택한 곡들로 결혼을 축복해줄 생각이라고.
이루마는 10월 새 앨범을 발매하고 11월부터 두 달간 전국공연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한다. 그동안 관객 앞에서 자신의 음악을 들려줄 날을 기다렸다는 그는 “이번 공연에서 이루마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루마는 얼마 전 자신과 똑 닮은 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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