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와 비데 등을 판매하는 교원 L·C 일산센터 유상희 사업지점장(46)은 지난 6월 8명의 직원과 함께 매출 3천6백만원을 올려 회사 전체에서 2등을 차지했다. 그러나 따뜻하고 푸근한 첫인상부터 조근조근한 말투까지, 그의 겉모습 어디서도 전문 영업인의 냄새를 맡기 어려웠다.
“스스로 생각해도 제가 영업을 하는 건 신기한 일이에요(웃음). 사회생활 시작하기 전엔 동네 아줌마들하고 수다 떠는 것도 좋아하지 않을 정도로 낯을 많이 가렸거든요. 지금도 수줍음 많은 성격이 남아 있고요. 보통 ‘잘나간다’는 얘기를 듣는 영업직원들에겐 독특한 전략이나 타고난 말솜씨가 있잖아요. 그런데 전 그런 것도 없어요. 성실과 끈기로 버티는 거죠(웃음).”
전업주부로 지내다 지난 99년 두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 시간 여유가 생겨 (주)교원의 빨간펜 선생님으로 처음 사회에 발을 들였다는 그는 “나 같은 사람에게 영업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회사에서 교육을 받고도 막상 고객을 만나면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돌아서기 일쑤였다는 것. 주택가 초인종을 눌렀다가 ‘누구야’ 하며 웃통을 벗은 채 나오는 남자에 놀라 기겁을 하고 도망친 적도 있다고 한다.
“매일 학습지 자료를 잔뜩 담은 가방을 들고 다녔지만, 제대로 열어보지 못한 날도 많았어요. 도저히 확장을 할 수 없어서 우리 아이들 책만 잔뜩 사줬죠. 거실에서 TV를 치우고 도서관을 만들어줬을 정도니까요(웃음).”
이제 와 돌아보면 당시 유씨는 다른 이에게 학습지 권하는 걸 ‘민폐’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아는 이들에게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남몰래 속앓이를 했다고.
“한번은 아이 친구 엄마가 ‘학습지 교사 시작했다면서 어떻게 해달라는 말 한마디를 못하냐’며 먼저 학습지를 신청해주기도 했어요. 상황이 이러니 수입도 정말 보잘것없었죠. 아예 한 푼도 못 버는 달도 있었고요.”
“숫기 없는 성격이지만, 진실성을 무기로 고객 감동시켰어요”
결국 유씨는 결혼 전 전자회사에 다녔던 경험을 살려 어디든 취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6개월 만에 일을 그만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년 뒤인 2000년 10월, 다시 (주)교원에 입사했다. 주부에게 열려 있는 문이 생각보다 좁았기 때문이다.
“전문 분야가 없는 주부를 받아주는 자리는 판매직뿐이더군요. 일도 하면서 초등학교 2학년·3학년생인 아이 공부까지 챙길 수 있는 회사를 찾다 보니 교원이 떠올랐어요.”
“영업은 고객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주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유상희 교원L&C 사업지점장.
일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사회의 높은 벽을 뼈저리게 체험한 그는 이번엔 단단히 의지를 다지고 일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조금씩 말문이 트였고, 운도 따르기 시작했다. 재입사한 뒤 회사에서 소개받은 첫 고객이 자발적으로 친구 10명을 유씨에게 소개해준 것.
“마침 그분이 바로 우리 옆집에 살았어요. 가깝기도 하고 제가 워낙 고객이 없기도 해서 정말 자주 찾아갔죠. 어쩌면 그런 제가 귀찮아서 다른 사람을 소개해준 건지도 몰라요(웃음).”
그제야 유씨는 자신의 장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전문 영업사원답지 않은 수줍음과 진실성이 오히려 상대에게 호감을 줄 수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유씨는 “다른 사람이 일주일 안에 성사시킬 일을 하는 데 나는 한 달이 걸린다. 처음엔 느린 듯 보이지만 이룰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게 바로 내 성공비결”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관계를 쌓기까지는 시간이 걸려도 일단 그와 한번 인연을 맺은 고객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기존 고객이 계속 그에게 새 고객을 소개시켜준다고.
“제가 꾸준히 찾아뵙던 고객 가운데 이사를 가는 바람에 2년쯤 연락이 끊어진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다시 학습지를 신청할 때가 되자 본사에 전화해 저를 수소문하셨더라고요. 저 말고도 우리 회사에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굳이 저를 찾아서 제게 신청을 해주시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정말 고맙죠.”
그런 고객들을 만나며 유씨는 “영업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 물건이 필요한 사람에게 좋은 정보를 주는 일”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고, 훨씬 자신 있게 영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실적이 좋아지고, 곧 월수입이 웬만한 월급쟁이보다 높아졌다고. 유씨는 재입사한 뒤 3년 만인 지난 2003년 본부장으로 승진했고, 올 4월 회사의 권유로 교원 L·C 일산센터 사업지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8명의 영업사원을 관리하면서, 직접 영업도 하는 자리다. 새로운 분야이기는 하지만 고객을 만나 상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은 전과 다를 바 없어 큰 어려움은 없다고. 특히 옛 고객들이 여전히 그를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이쪽으로 옮겨오고부터 바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죠. 요새는 거리 홍보를 하는 등 영업방식도 적극적으로 바꾸고 있어요. 지역 내 아파트에 장이 설 때마다 직원들과 함께 찾아가 열심히 제품을 소개합니다.”
유씨는 “전업주부로 살다 사회생활을 하며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남편과 아이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특히 이제 고등학생이 된 두 딸은 ‘엄마 덕분에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 좋았다’며 언제나 적극적으로 응원해준다”고 말했다.
어느새 영업직에 뛰어든 지 8년째를 맞은 유씨는 “숫기없는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걸 보면 영업일은 세상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부업을 찾는 주부라면 한 번쯤 영업직에 도전해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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