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고 영광스럽다는 말로 표현이 다 될까요? 그보다 더 큰 표현이 있으면 좋겠어요. 어떤 말로도 표현이 다 안 될 만큼 기쁘고 영광스럽거든요(웃음).”
지난 5월30일, 제60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들고 귀국한 전도연(34)의 얼굴엔 자랑스러움과 행복감이 가득했다. 그는 프랑스 칸 현지에서 ‘영화제에 처음 나온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건 기적 같은 일’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직 기쁘기보다 얼떨떨해보였다.
“저 자신도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시상식장에서 제 이름이 호명된 순간부터 그날 내내 아무 생각이 안 났어요.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냥 멍했다고 할까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만큼 아직 정신이 없어요(웃음).”
“연기생활 10년 만에 처음으로 촬영 중단을 요청했을 만큼 ‘신애’로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의 수상은 전도연 개인뿐 아니라 한국 영화계, 나아가 아시아 영화계까지 깜짝 놀라게 했다. 칸영화제에서 아시아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차지한 건 지난 2004년 장만옥에 이어 두 번째이며, 한국 배우로는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만옥이 당시 프랑스와 합작한 영화에서 영어로 연기해 상을 받은 것을 감안하면 아시아 배우가 자국의 언어로 연기한 뒤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칸영화제에서는 ‘밀양’ 시사회 직후 이미 전도연이 수상 유력 후보로 점쳐졌을 만큼 그의 연기에 높은 평점이 매겨졌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는 ‘밀양’에 대해 “고통받는 온순한 영혼을 표현해낸 전도연의 연기가 압권이다. 이 같은 명연기가 올해 칸을 빛내고 있는 그를 격렬하고 두려움 없는 여배우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는 평을 싣기도 했다.
“좋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죠(웃음). 하지만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는 매 순간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껏 10년째 영화작업을 해왔지만, 촬영하면서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었거든요.”
‘밀양’에서 전도연이 맡은 배역은 갑작스런 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아이를 데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에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여인 ‘신애’. 마음의 상처가 많고 나약하지만, 그걸 감추기 위해 오히려 똑똑한 척 강한 척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던 그의 ‘위장’과 ‘자기기만’ 때문에 아이는 유괴범의 희생양이 되고, 그 상처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신애는 극단적으로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전도연은 “솔직히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는 ‘이거 뭐야. 이런 감정이 다 있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은 “앞으로도 오래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창동 감독님이 연출하시고, 송강호 선배가 남자 주인공으로 정해졌다는 얘기를 듣고는 시나리오를 읽기도 전에 ‘하고 싶다’고 했어요. 하지만 막상 대본을 보니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무게감이 느껴졌거든요. 겁이 나서 주춤주춤 용기를 잃었고, 감독님께 ‘죄송하지만 못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애’를 연기하기로 한 건 “욕심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우로서 신애의 감정이 어떤 건지 한번 느끼고 경험해보고 싶어” ‘밀양’에 뛰어들었다고.
하지만 촬영 중에도 어려움은 계속됐다. 전도연은 연기생활 중 처음으로 촬영을 그만두기도 했다고 한다.
“유괴범이 정한 장소에 돈을 갖다놓고 집에 돌아와 범인과 통화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어요. 통화를 마치고 홀로 북받치는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데, 아이를 잃은 슬픔이 과연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는 거예요. 제 입으로 먼저 ‘감독님 이거 오늘 안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찍죠’라는 말을 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죠.”
전도연은 “난 아이가 없기 때문에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의 충격과 아픔이 내 안에서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고,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이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그때 이창동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제가 느끼는 감정 속에 해답이 있다고요. ‘지금 이게 실감도 안 나고, 막막하고, 뭐가 뭔지 모르고 그렇지 않냐. 그게 실제 아이 엄마가 그런 전화를 받았을 때 느낄 감정이다. 지금 마음속에 있는 그런 혼란이나 실감 안 나는 감정을 밀어내려 하지 말고 오히려 받아들여라’. 그 말씀이 다시 연기를 하는 데 큰 힘이 됐죠. 이번 영화를 찍으며 그때만큼 감독님이 고마운 적이 없었어요(웃음).”
‘밀양’ 제작사 쪽에서 공개한 메이킹 필름을 보면 전도연은 고통으로 울부짖다가 기침을 토해내는 장면에서조차 이 기침이 어떤 느낌의 기침인가를 고민하고 감독과 상의하며 연기한다. ‘밀양’을 통해 그가 극찬을 받은 건 매 순간 이렇게 섬세하고, 때로는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붙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도연은 ‘밀양’을 촬영하는 동안 “신애를 어떻게 보여줄까 고민하기보다, 전도연이란 사람을 최대한 빼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처음엔 저한텐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것인지 막연하기만 했어요. 하지만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안 되고, 카메라 앞에 앉아 있을 땐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막상 연기를 시작하니 분명 제 안에 뭔가가 있는 거예요. 단지 어떤 상황이 나하고 부딪치지 않아 나오지 않았을 뿐인 어떤 것이요. 그걸 끄집어내려고 노력했어요.”
전도연이 처음부터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며 연기하는 배우였던 건 아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 우연히 잡지 모델로 데뷔하며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고, 탤런트 공채시험에 떨어진 뒤 CF에서 그의 모습을 본 청춘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PD에게 캐스팅돼 연기자가 됐다고 한다. 그 무렵 그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 때 퇴근하듯 일하는” 연기자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다고.
전도연이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 건 지난 96년 일일드라마 ‘사랑할 때까지’에 출연했을 때. 당시 아버지로 출연한 탤런트 박근형이 “네가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안 들린다, 네가 무슨 배우냐 앵무새지” 하며 꾸짖은 게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날 전도연은 울면서 집에 돌아와 부모가 녹화해놓은 자신의 연기를 처음 봤고, 연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말이 빠르고 발음도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때부터 조금씩 연기를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도연은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여인 신애 역을 생생하게 연기했다.
그가 스스로 “나는 배우구나”라고 느낀 작품은 지난 99년 최민식과 함께 찍은 영화 ‘해피엔드’. 전도연은 한 인터뷰에서 “촬영 전 노출 장면이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께 얘기하다가 (나의 장래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향해) 나도 모르게 ‘엄마, 난 배우야. 딸 시집 잘 보내려고 배우시킨 거 아니잖아’ 하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미리 생각하거나 준비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한 뒤 제 방에 돌아와 스스로 대견스러움을 느꼈어요”라고 말했다.
이후 ‘인어공주’ ‘너는 내 운명’ 등을 거치며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로 명성을 얻게 된 그에게도 ‘밀양’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배우 송강호가 “‘신애’는 전도연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연기 면에서 가장 난이도 높고 힘든 배역”이라고 말했을 정도. 실제 ‘신애’는 작품 속에서 끝없이 불행을 겪고, 쓰러지고 오열하며 자신을 파괴해간다. 전도연은 ‘밀양’ 촬영이 시작된 지난해 9월부터 꼬박 5개월 동안 밀양에 머물며 ‘신애’로 살았다. 그 길고 긴 고난의 시간 동안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준 건 지난 3월 결혼한 남편 강시규씨라고 한다.
전도연은 “‘밀양’ 촬영 도중 연애를 시작했다. 극중 신애가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역이다 보니 나 역시 자꾸 나이를 먹으면서 무언가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는데, 남편과 자주 통화를 하면서 위안을 얻었다. 그때 남편이 나를 지켜주는 커다란 기둥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강씨는 ‘밀양’ 촬영 도중 두어 번 현장에 내려와 그를 격려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남편은 내가 영화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도록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
그는 전도연이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이후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하고 있는 요즘도 역시 든든한 버팀목이다. 전도연은 칸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들고 귀국한 날, 남편과 단둘이 집에 머무르며 마음을 골랐다.
“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많은 분이 축하해주셨지만, 가족과 함께 조용히 지내고 싶더라고요(웃음). 연애를 짧게 했는데도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해요. 결혼 전에는 신혼 재미라는 게 남다르고 특별한 건 줄 알았는데, 제겐 그냥 일상적이에요. 그게 편안하고요.”
남편은 전도연을 유명 배우가 아닌, ‘여자’로 봐준다고 한다. 그가 출연한 영화 가운데 ‘접속’만 어렴풋이 본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본 작품이 거의 없다고.
“연애 시절 ‘야, 사람들이 너더러 한국 최고의 여배우래’ 하면서 놀렸을 정도예요(웃음). ‘밀양’은 시사회 때 같이 봤죠. 저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절대 안 봤을 텐데 말예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소식을 듣고는 기특하고 장하다고, 앞으로 더 잘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하더군요. 아! 그리고 제 트로피를 보고 정말 좋아했어요(웃음).”
한때는 “미칠 것 같은 사랑 없이는 결혼도 없다”고 믿었다는 전도연은 남편을 만난 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특별한 행동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조용한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서 다른 식의 사랑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결혼생활과 연기를 함께 잘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고.
“많은 분이 다음엔 어떤 작품을 할 거냐고, 해외진출 계획은 없냐고 물어보세요. 하지만 자꾸 ‘더, 더, 더’를 외치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전 ‘이제 해외로 뻗어나가야지’ 하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으면 외국 작품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목표로 하지는 않아요. 커졌을 때 작은 것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또다시 큰 모습이 보인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이 일을 굉장히 오래하고 싶으니까요(웃음).”
자신에게 있어 최고의 찬사는 “이번 연기 최고였다”가 아니라 “너는 이게 끝이 아니라 더 달릴 수 있어. 아직 많은 에너지가 남아 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라는 배우 전도연. 그가 앞으로도 작품마다 자신의 최고를 뛰어넘는 멋진 배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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