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53)을 만나기로 한 곳은 그가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서울 목동의 한 방송국 앞이었다.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두 시간 방송을 마치고 나타난 그는 몸에 딱 붙는 ‘쫄바지’ 운동복 차림이었다. 평소 자전거를 타고 방송국에 오간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가 20~30대도 소화하기 힘들 법한 복장을 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사진 촬영을 해야 하는 기자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김창완은 덩달아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우, 나는 사진 찍을 생각은 미처 못 했어! 이제 어떡하지?”
순간 그의 얼굴에 MBC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장준혁을 외과 과장으로 밀어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던 우용길 부원장의 찌푸린 표정이 잠시 어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내 예의 사람 좋은 표정이 돌아왔다.
“시간 괜찮으면 우리 집 근처로 가요. 옷 갈아입고 사진 찍어야지, 뭐.”
결국 인터뷰는 애주가인 그가 자주 들르는 동네 단골 와인 바로 옮겨 진행됐다. 순식간에 연기자와 가수, 스타와 생활인으로서의 그의 두 모습을 동시에 훔쳐본 듯한 느낌이었다.
“자전거를 탄 지 올해로 한 10년쯤 됐어요. 이제는 완전히 생활의 일부죠. 술을 워낙 좋아해서 음주 단속 걱정 없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아니고(웃음). 그냥 차가 안 막혀서 좋아요. 우리 집 근처에서 방송국까지 가는 길이 워낙 막혀서, 아침에 한 5분만 늦게 나오면 30분이 늦어버리거든요.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오히려 약속시간을 딱딱 맞출 수 있게 됐죠.”
그가 자전거를 더 좋아하게 된 건 유학 가 있던 아들이 집에 왔을 때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한 뒤부터였다고 한다. 함께 자전거를 끌고 제주도를 일주했는데, 어찌나 좋았던지 그 뒤부터 동네 자전거 동호회에 들어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전거 일주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2년 전부터는 오토바이의 “두렵지만 황홀한” 스피드가 또 다른 취미생활이 됐다. 오토바이를 타러 나갈 때는 체감온도를 기온에서 10℃ 빼고, 자전거를 탈 때는 5℃ 정도 더하는 것이 그의 날씨 환산법이라고 한다.
“오늘도 오토바이 동호회 사람들과 같이 라이딩할 계획이 있었는데 이 인터뷰 때문에 못 갔어요.”
못내 아쉬워하는 그의 표정에서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같은 김창완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 김창완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아내를 만난 것”이라고 얘기해왔다. “어머니는 나를 낳았고 아내는 나를 키웠다”거나 “아내는 내게 큰 나무 같은 존재”같이, ‘김창완 어록’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멋진 말들을 쏟아내기도 했다. 김창완이 이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이유는 아내가 자신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집에 있지만 우리 부부는 굉장히 동떨어진 세상을 살고 있어요. 대화를 많이 나누지도 않고요. 제 경우 아내가 자는 시간에 귀가할 때가 많고, 아내가 출근할 때는 잠을 자고 있기 때문에 잘 마주치지 못해요. 하지만 아내는 단 한 번도 그런 걸 문제 삼은 적이 없죠. 제가 주말에 자전거나 오토바이 타러 혼자 놀러 나가는 것에 대해서도 지금껏 불만을 표시한 적이 한 번도 없고요.”
그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는 다소 벗어나 있지만, 진정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 누구보다도 쿨하고, 자신을 전폭적으로 이해해주는 아내는 보건소에 근무하는 의사. 두 사람은 대학시절 독서모임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는 김창완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고. 운명처럼 아내는 김창완의 첫사랑이 됐고, 두 사람은 5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자유를 안겨준 아내, 자유를 주고 싶었던 아들
서로를 절대 구속하지 않고 상대방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생활방식을 가진 두 사람 사이에는 외아들 신화군(29)이 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 통신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에게 김창완이 주고 싶었던 것도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같은 세상”, 진정한 자유였다고 한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혹시나 아버지의 앞서간 발자국이 아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칠까봐 집에서 텔레비전을 없애버렸을 정도라고. 그가 목표로 했던 건 아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아들을 방해하지 않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고 싶어했던 제 태도가 과연 잘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자유에 대해서 갖고 있던 막연한 동경이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작용한 건 아닌가, 자유를 알게 하려면 어느 정도 엄격한 선이 있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든단 말이죠. 하지만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이미 알고 시작한다면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겠어요? 모르는 게 낫죠. 그렇게 해서 매번 당하더라도….”
‘전형을 깨뜨린 파격’ ‘진정한 자유’는 사실 김창완이 록그룹 ‘산울림’으로 우리 가요계에 화려하게 등장했을 때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등이 수록된 1977년의 데뷔 음반을 비롯해 산울림이 발표한 셀 수 없이 많은 히트곡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늘 ‘파격적이고 참신하다’는 것이었다.
71년 대학 1학년 때 구입한 기타를 독학으로 마스터했을 뿐, 따로 음악 수업을 받거나 작곡법을 배운 적이 없는 그는 가수가 될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두 동생과 아마추어 록밴드를 만들어 함께 곡을 만들고 연주를 즐겼을 뿐이다. 그러다 77년 대학가요제에서 둘째 김창훈씨가 작사 작곡한 ‘나 어떡해’를 샌드 페블스가 불러 대상을 수상한 뒤 “상 탄 기념으로 음반 하나 만들자”는 생각에 음반사를 찾았다고. 이미 만들어둔 노래가 1백여 곡이나 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처음엔 자비 출반할 계획으로 이리저리 융통해 돈 3백만원을 만든 뒤 당시 집에서 가장 가까운 레코드사였던 서라벌레코드사에 찾아가 데모 테이프를 주고 몇백 장만 찍어달라고 했는데, 바로 다음 날 ‘돈 안 가져와도 찍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러고는 2주일 만에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동아일보에서 우리 형제들을 인터뷰하러 오고, 신문 4단 만화에 ‘아니 벌써’가 등장하기도 했죠.”
순식간에 전국의 젊은이들을 ‘감염’시킨 산울림 열풍의 시작이었다. 김창완은, 그러나 이때 밝힐 수 없었던 뒷얘기도 들려줬다. 당시 ‘자유와 파격’으로 화제를 모은 1집 노래 가사가 실은 심의에 걸려 전부 다시 쓴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아니 벌써’ 원곡은 밤을 새워 술마시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왔다는 내용의 가사였는데 심의를 통과하지 못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벼운 아침 발걸음~ 모두 함께 콧노래 부르며 밝은 날을 기다리는 부푼 마음”이라는 건전 가요풍의 내용으로 바뀐 것이라고.
“우용길 역 위해 연기생활 20년 만에 처음으로 안경 벗었어요”
가수로, 연기자로, 동시에 DJ로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는 김창완.
“하지만 중요한 건 겉에 드러난 표현이 아니었어요. 당시 젊은이들은 가사에 상관없이 노래가 담고 있는 기성 가치에 저항하는 정신, 전형을 파괴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알아채고 환호했던 겁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지만 산울림의 음악은 여전히 신선하다. 그는 “한 시대의 지배적인 경향을 따르지 않고 본질적인 자유와 파격을 노래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산울림 음악이 살아남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창완은 이처럼 오랜 경력을 가진 가수이면서 동시에 85년 드라마 ‘바다의 노래’로 연기를 시작한 베테랑 연기자이기도 하다. 그동안 늘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 이미지를 선보이던 그는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병원 내 정치에 능한 부원장 우용길 역을 맡아 인상적인 악역 연기로 화제를 모았다. 김창완은 “우용길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우용길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은 건 그를 미워하거나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의 노회한 모습이 실은 누구나 갖고 있는,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을 테니까요.”
그는 이 때문에 우용길을 연기하며 특별히 힘든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다만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안경을 벗었을 뿐이라고.
“이 안경이 20년 동안 낀 안경이에요. 한 번 부러졌을 때 크게 애를 먹어서 똑같은 것만 4개를 사놓았죠. 그런데 그걸 빼니까 바로 인상이 바뀌더라고요. 처음엔 연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껴야 할 것 같아서 콘택트렌즈를 샀어요. 그런데 하루 종일 연습해도 도무지 렌즈를 눈 안에 넣을 수가 없는 겁니다. 걱정이 태산인 채로 첫 촬영에 갔는데 부원장한테는 운전기사가 있더군요. 그래서 운전도 안 하는데 안 보이면 어때 하는 생각으로 그냥 맨눈 연기를 했어요.”
그는 우용길 부원장의 가장 인상적인 표정 가운데 하나인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도 “잘 안 보이는 것을 보려고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안 보이지만 마치 보이는 듯 강한 인상을 짓기 위해 그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안경을 빼고 생활했다고. 그 과정에서 삐딱하게 쏘아보는 눈동자 연기가 탄생한 것이다.
김창완은 ‘하얀 거탑’으로 바쁜 스케줄에 쫓길 때도 지난 2000년부터 계속해온 SBS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DJ 자리를 놓지 않았다. 지난 78년부터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라디오를 진행해왔다는 그는 “새벽까지 촬영을 하다 아침 9시에 라디오 생방송을 하고 그게 끝나면 다시 경기도 이천 세트장으로 달려가곤 했다”며 “힘들었지만, 라디오는 진짜 내 생각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평소 TV를 보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연기조차 모니터하지 않는다는 그에게 라디오 진행은 대중의 생각을 느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 그는 “라디오는 생방송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 지나가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게 흘러가는 인생과 비슷하고, 그런 게 내 철학과 맞아떨어져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오프닝 멘트를 직접 쓰고, ‘김창완의 전화 독백’이라는 코너를 통해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한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그는 그날 방송에서 ‘전화 독백’한 말을 들려줬다.
“사람들은 뭐든지 과정이라고 하지. 으휴~ 난 정말 짜증나. 뭐든지 다 미리 마련돼 있다는 거야. 목적대로 운명의 꼭두각시처럼 나를 생각하는 버릇이 어디서 생긴 건지. ‘우연’이 나를 파먹게 내버려두면 안 돼?”
계획 대신 우연의 자유를 사랑하는 그는, 오는 5월 초 호암아트홀에서 콘서트를 열고 다시 무대에 선다. 연기자로도 DJ로도 성공했지만, 여전히 ‘가수’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그가 돌아온 무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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